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430
430====================
94. 조우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형진은 당황했다. 아바타라면 볼 것도 없이 바로 천벌부터 때리고 봤겠지만, 지금의 형진은 영약 섭취 때문에 본신으로 사냥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무리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찰나의 실수로 일격을 허용하기라도 하면 그 순간 본신 상태의 자신이 끝장날 수도 있다. 게다가 상대는 본신인지 아바타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 이 상태에서는 싸워봐야 오히려 손해라는 생각이 형진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일단 왕성 라이언하트로 귀환하고 아바타로 다시 와야할지, 아니면 우선 천벌부터 때리고 봐야할지 잠시 고민하는 그 찰나의 순간.
거대한 먹구렁이와 싸우고 있던, 푸른 불꽃을 뿜어내던 누군가 역시 뒤늦게 형진이 지닌 강대한 파편의 힘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상대는 형진이 미처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곧바로 로그아웃으로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바로 로그아웃 해버린 상대의 모습에 형진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자신이 지닌 파편의 힘을 인식한 순간 바로 로그아웃을 해버렸다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파편이 무엇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대략 파악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나 다름없었다.
전투중에는 임의로 로그아웃하기도 힘들다는 점을 고려하면, 강제로 장치를 꺼버렸든가 물리적으로 접속을 차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파편의 힘을 인식하고 그것 때문에 놀라더라도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접속을 차단하는 식의 행동이 표출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방금 전 마주쳤던 파편의 소유자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지닌 파편의 힘을 인식하고 있고, 그것을 지닌 자들의 격돌이 어떤 식으로 끝을 맺고 있는지 또한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미국에서 때려잡은 미친놈의 영상이 전 세계에 퍼진 시점이기에, 방금 전 사라진 그 존재가 허세와 망상이 끌어들인 파편인지는 명확하게 판가름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만약 현실에서 이런 식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둘은 필연적으로 생명을 건 싸움을 시작할 수밖에 없으리라.
형진은 일단 여신들과 함께 왕성 라이언하트로 귀환한 다음, 전투용 아바타로 다시 엘리시온에 접속했다.
어떻게 보면 방금 전의 상황은 형진이 잠시나마 방심한 탓에 벌어진 일일수도 있었다. 만약 엘리시온에서 다른 파편과 조우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뒀더라면, 본신 상태에서 마주치는 바람에 잠시나마 망설이는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상대가 방금 전처럼 강제 로그아웃을 하게 된다면 선제공격을 가했더라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고, 설령 강제 로그아웃을 하지 않고 저항했더라도 본신이 아닌 아바타 상태였다면 아무리 인스턴트 킬이라도 상대가 지닌 파편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본신이든 아니든, 형진으로서는 방금 전 상황에서 싸움을 벌여봐야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셈이지만, 머리로 그것을 이해하더라도 마음은 역시 아쉬운 느낌을 저버리기 힘들다.
하긴 일전에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뻔히 알고 있을 허세와 망상이 이런 식으로 파편에게 엘리시온의 접속을 허용했을 대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 식으로라도 아쉬운 마음을 접을 수밖에.
“곤란한데.”
그러나 이건 이것대로 곤란하다. 지금 상황대로라면 상대가 엘리시온에서 분탕을 치고, 그것을 형진이 퇴치하더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전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형진은 다시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먹구렁이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허공에 대고 이런 말을 던졌다.
“방금 전 그 녀석의 접속 위치는 확인할 수 없습니까?”
보통 게임이라면 접속자가 취한 행동 같은 것이 로그로 남게 마련이고, 그것은 온라인 게임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엘리시온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상 엘리시온의 운영권 전부를 장악하고 있는 공포와 죽음이라면 충분히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할 터.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공포와 죽음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확인해 봤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모르긴 해도, 대미궁의 코어처럼 운영자에게 인식되기 어려운 뒷구멍을 만들어 둔 것이겠지.] “칫.”
어떻게 보면 이런 조치 역시 희망과 생명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가급적 그녀에게 들키지 않은 채로 파편의 소유자들을 비밀리에 육성하여 필요한 상황에 투입하기 위한 대비가, 엉뚱하게 지금 이 시점에 활용된 것이다.
혀를 차던 형진은 다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로그아웃 했으니 덫을 깔아두면 다시 접속했을 때 잡을 수 있지 않나요?”
[그럴 듯 하다만, 그 정도는 상대편에서도 생각해 두지 않았을까.]
“하긴.”
머리에 총을 맞지 않은 이상 뻔히 지킬 걸 알면서도 같은 장소로 기어들어오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멍청해도 그런 식의 요행을 기대하는 건 욕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래저래 입맛이 쓰다. 이번 일로 얻은 수확이라면,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는 파편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뿐이니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대책을 생각 하고 있던 참이다.] “어떤 식으로요?”[방금 전과 같은 상황에서 가장 곤란한 것은 상대가 치고 빠지기 식으로 나올 경우 자칫 엘리시온을 이용하는 일 자체가 상당히 곤욕스러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건 틀림없는 일이다. 자신이야 아바타를 이용할 수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식구들은 그렇지도 못하다. 물론 부활 기능이 제공된다고는 하지만 상대에게 파괴와 재생의 권능, 이를티면 인스턴트 킬에 버금가는 힘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경우 그 기능이 제대로 활용될지조차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공포와 죽음이 엘리시온을 장악했다 해도,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확인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차라리 일반적인 게임이라면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결과를 유추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가상과 현실이 복잡하게 뒤섞인 환상이기 때문이다.
“최악이군요.”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 본 것인데…]
공포와 죽음은 자신이 떠올린 방법을 형진에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바이러스를 심는 것이로군요.”
[바이러스? 아… 그것 말이로군. 맞아.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공포와 죽음이 내놓은 해결책은 상대의 아바타에 바이러스를 심어 놓는 것이다. 이 바이러스의 기능은 단 하나, 아바타의 사용자가 접속한 현실의 장소를 엘리시온의 운영권을 장악한 공포와 죽음에게 알리는 것뿐이다.
별 것 아닌 기능이긴 하지만, 이것이 성공한다면 곧바로 현실을 통해 형진이 파편의 소유자를 강습할 수 있게 된다. 게임이 아닌 현실 내에서라면, 그래서 강제 로그 아웃 같은 편법으로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전에 미국에 나타났던 엽기 살인마와 마찬가지로 허세와 망상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형진을 감당할 도리가 없다.
“문제는 바이러스를 어떻게 심느냐겠군요.”
[그렇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곤란한 부분이지. 이런 저런 방법을 생각해봤지만, 역시 방법은 단 하나 뿐인 것 같더군.]
어쩐지 딱 감이 잡힌다.
“직접 접촉입니까.”
형진의 말에 공포와 죽음은 바로 대답했다.
[그렇다. 어떤 식으로든 공격을 단 한 번만이라도 성공시킬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달리 수단이 없다면 직접 접촉으로 심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어쩐지 보균자가 된 기분이네요.”
바이러스를 몸 안에 지니고 있다가, 의도적으로 누군가에게 그것을 퍼뜨린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악질 보균자 아닌가.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허공에 대고 말을 건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보호와 균형의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보호와 균형의 대리자, 줄여서 보균자라는 시시껄렁한 개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춥다.] “크흠. 죄송합니다.”여러모로 아쉽긴 하지만 일단 형진은 파편의 소유자가 사라졌던 장소에 성소를 일으켜 세웠다. 만에 하나라도 상대가 돌아오거나, 이곳에 있는 숲의 주인을 처치하기 위해 올 경우를 상정한 조치다.
형진이 성소의 설치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거대한 먹구렁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대로라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바로 잡았겠지만, 지금의 형진으로서는 쓴웃음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꿩 대신 닭. 아니, 파편 대신 뱀인가.”
형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그 거대한 몸을 일으키는 거대한 뱀에게로 다가갔다.
“으우우…”
“이건 좀…”
“…”
시커먼 먹구렁이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 그 모습에 여신들은 울상을 지었다. 귀여운 것이라면 죽고 못 사는 만큼, 징그러운 것에는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인다.
달리 주위에 지켜보는 이들도 없으니, 형진은 속전속결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한 단계 거쳐야 할 일이 있다.
[엘리트 몬스터 ‘음산한 숲의 주인’이 ‘블러드러스트’를 발동합니다!] [블러드러스트 효과로 인해 엘리트 몬스터 ‘음산한 숲의 주인’의 체력이 20퍼센트 증가합니다!] [블러드러스트 효과로 인해 엘리트 몬스터 ‘음산한 숲의 주인’의 이동속도가 25퍼센트 증가합니다!] [블러드러스트 효과로 인해 엘리트 몬스터 ‘음산한 숲의 주인’의 공격속도가 40퍼센트 증가합니다!]형진이 앞으로 나서자, 먹구렁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블러드러스트를 발동했다. 이 거대한 몹집의 괴수가 이동속도와 공격속도까지 빨라지다니, 어떻게 보면 그 메시지만으로도 소름이 우수수 돋을 만큼 공포스러운 일이었지만,
화아악!
곧바로 형진을 향해 탄환처럼 쏘아져 나갈 것 같았던 거대한 먹구렁이는 순간 형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흑요호의 형상에 흠칫하며 동작을 멈추었고,
퍽!
다음 순간 흑요호의 꼬리가 사정없이 머리를 후려치자 주위의 폐허를 부수며 단숨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흑요호는 곧바로 번개처럼 몸을 날려 그런 먹구렁이의 머리를 앞발로 지그시 눌렀다. 먹구렁이는 그 큰 몸으로 버둥거리며 흑요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다음 순간 날카롭게 변화한 꼬리가 숨골에 내리 꽂히자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싸움이 순식간에 끝나고, 여신들이 머뭇거리며 룻을 챙기는 동안 형진은 먹구렁이의 뱃속에서 알처럼 모습을 드러낸 숲의 영혼을 챙겼다.
그나저나, 이 놈의 시체는 어쩐다.
나름 숲의 주인이긴 한데, 하필 뱀이라 좀 그렇다. 뱀고기가 정력에 좋다는 얘기가 있긴 해도 어디까지나 카더라 통신에 가까운 얘기고.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몸을 가진 녀석을 그냥 버리는 것도 아쉬운 일이라, 형진은 시체가 사라지기 전에 반사적으로 도축을 시작했다.
“으으으…”
“설마… 그것도 먹으려는 건가요?”
“…”
세 여신은 형진이 기계적으로 도축을 시작하자, 얼굴을 찌푸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싫으세요?”
“그러니까… 저는…”
싫다고 했다가 혹시라도 형진이 실망하거나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긴 한데, 그래도 체질적으로 뱀이 싫은 건 어쩔 수 없고, 보호와 균형은 여러모로 복잡미묘한 심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형진은 그런 여신들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얼른 도축을 마치고 인벤토리에 그것을 쓸어 담았다.
먹구렁이의 사체를 정리하는 일이 끝나자, 형진은 놈이 웅크리고 있던 곳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이놈이 웅크리고 있던 곳 역시 뭔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탐색을 시작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놈이 웅크리고 있던 굴의 입구에 도달하자 곧바로 메시지가 나타난다.
[축하합니다! 숨겨진 인스턴스 던전 ‘잊혀진 지하 도시’를 발견했습니다!]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형진은 앞서 도망친 파편의 소유자가 굳이 이곳을 찾았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숲의 영혼은 물론이고, 남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인던을 이용해 수련을 하려던 의도가 아니었을까.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도망친 파편의 소유자는 어떤 식으로든 감춰진 게임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경로를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허세와 망상의 수하라고 판단하기는 아직 이를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가능성이 높아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 작품 후기 ============================
오늘 분량 끝.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