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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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항행
“아…”
“후아아…”
포션이 목구멍을 통해 흘러들어가는 순간, 노부부는 몸 안에 생명력이 화악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사실 그냥 플라시보 효과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한 병의 포션을 마시는 순간 노부부는 자신들의 몸이 어쩐지 한결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노부부가 자신들의 숙소에서 포션을 시음하고 있는 동안, 다른 승객들은 범선의 이곳 저곳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기자들은 먼저 조타실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기관실이나 조타실 같은, 일반적인 선박이 움직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그런 설비들이 이 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갑판에 조타기가 비치되어 있긴 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추진기도 없어.”
“그럼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설마 정말 돛으로 바람을 받아서 움직이기라도 하는 건가?”
“그럴리가! 뭔가 비밀이 있을 거야! 찾아보자!”
기자들은 물론이고 정부 관계자들이라든가 기업 관계자들은 이 배의 추진 장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물론 그들은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가 없었다. 당연하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한껏 부풀어 오른 돛이 정말로 이 배의 추진 장치였기 때문이다.
물론 정말로 고공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걸 타고 움직이는 건 아니다. 바람의 권능을 적용시켜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고 있는 것 뿐이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했어.”
프리츠는 황혼의 성물을 통해 다른 배로 옮겨가 있었다. 승객들의 눈앞에서 마술처럼 모습을 감추었던 것은 그의 모습이 증강 현실로 구현된 환영이라서가 아니다. 바로 은신과 잠행이라는 집행자 고유의 스킬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건 일종의 고도화된 트릭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먼저 기기 없이 현실화된 증강 현실을 보여주고, 뒤이어 은신으로 모습을 감추는 것으로 프리츠의 모습 역시 증강 현실로 만들어진 허상이라고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집행자들이 현실에서 은신과 잠행을 사용할 때를 위한 포석이기도 하다.
지금 프리츠가 성물을 통해 넘어온 곳은, ‘하늘’ 호보다 높은 고도를 날고 있는 자매함 ‘이슬’ 호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범선들에는 형진의 아기 공주들 이름이 붙었다. 형진은 왕성을 만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엘리시온에 분할 발주를 넣어 공주들 모두에게 한 척씩 선물할 예정이었다.
형진은 요안나가 타주는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하늘’ 호의 승객들이 전 세계로 전하고 있는 동영상들을 관람하고 있었다.
“조타실은 물론이고 운용요원이 하나도 없는 것이 다소 충격이었나봐.”
“그럴 만도 하죠. 아무리 무인기가 판치는 세상이라도 저 거대한 선체를 한 사람의 운용요원도 없이 조종한다는 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니까요. 아, 감사합니다.”
프리츠가 요안나에게서 찻잔을 건네받는 모습을 보며 형진이 말했다.
“자네 가족들도 부르지 그랬나. 하늘 호에 태우는 건 어렵더라도, 이슬 호라면 얼마든지 자리가 비어 있는데.”
“하하, 뭐… 천천히 부르겠습니다. 우선은 일이 먼저니까요.”
“알겠네. 편한 대로 해.”
프리츠는 필요할 때마다 관리자 메뉴를 통해 저들의 요청을 듣는 것을 포함해서 은신과 잠행으로 모습을 숨기고 있다가 중간 중간에 나타나 승객들과 인터뷰를 나누는 일도 할 예정이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훌륭한 예능 프로그램이 될 것이고, 어떻게 보면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세계 일주를 보다 다채로운 기억으로 남게 만들어줄 것이다.
“주방위군 전투기입니다.”
“환영인사가 좀 늦었군.”
요안나의 말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비행운을 길게 늘어뜨린 몇 대의 전투기들이 하늘 호에 접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일반적으로 바다를 운항하는 선박에 전투기가 접근하게 되면, 전투기 쪽이 압도적으로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식으로 관측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 하늘 호 주위를 날고 있는 전투기들은 마치 동화 속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 하얀 범선의 근처에 접근해 비슷한 속도로 비행하고 있는 중이다.
“통신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일단 들어나 볼까.”
형진이 느긋하게 대답하자, 곧바로 통신 회선이 열리며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경고한다. 귀 선박은 적법한 절차에 따른 비행 허가를 받지 않은 상태다. 즉시 비행을 멈추고 공군의 유도에 따를 것. 반복한다. 귀 선박은 적법한 절차에 따른 비행 허가를 받지…”
“뭐… 예상대로군.”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배가 하늘을 날 테니 비행 허가 좀 내주세요 하고 허가를 받았을 리가 없다. 그래서 미라지 코어에서는 선박 대신 회사가 보유한 전용기의 비행 허가를 취득한 상태였지만, 실제로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은 거대한 선박이니 주방위군이 부랴부랴 전투기를 발전시켜 회항을 유도하려 드는 것이다.
“정부 인사들이 난리가 났겠군요.”
전투기 조종사나 공군의 간부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는지 프리츠가 그렇게 말하자 형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어차피 저러다가 그냥 물러가든가, 다른 전투기들과 교대해서 호위를 하든가 둘 중 하나일걸. 아무리 그래도 민간인이 버젓이 탄 채로 전 세계에 비행 상황이 생중계되고 있는데 격추를 하긴 어렵지. 물론 시도한다고 성공할 리도 없지만.”
“그렇긴 하죠.”
‘하늘’호는 선체 전체에 황혼의 결계와 보호의 성역을 두르고 있다. 따로 공격 능력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난공불락의 공중 요새와 같은 물건인 셈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물건의 존재를 가급적이면 보안 대상으로 삼아 감추고 싶겠지만, 국방부와 연계된 프로젝트도 아니고 기반 기술을 제공한 것도 아닌데다, 예산을 보조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는 달리 자신들의 의지를 강제할 수단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바보가 아닌 이상 미국 정부는 지금쯤 형진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실상 이 비행이 되도 않는 로비에 휩쓸려서 반독점법 같은 카드를 만지작거린 것에 대한 미라지 코어의 강력한 의사 표시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미국 정부가 이를 악물고 딴지를 걸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미라지 코어라는 회사를 미국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다. 다른 동맹국들에 압력을 넣어서 미라지 코어의 지사를 대부분 폐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이라 해도 그런 미국에 대항하는 나라들, 이를테면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국가들은 그런 식으로 미국이 미라지 코어를 적대할 경우 두 팔을 벌려 환영의 입장을 표한 뒤 영토 일부를 떼어 줘서라도 자국의 품안에 넣으려 안으려 들 것이다.
“미국 정부가 항복 의사를 표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형진의 물음에 요안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렇게 답했다.
“일단은 미국 영토 안에 ‘하늘’호가 머무는 동안이 제한 시간이 되겠죠. 아마도 대서양으로 진출할 즈음 연락이 오지 않을까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프리츠가 요안나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모습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어디보자. 슬슬 저녁 시간이 되어 가는군. 림!”
-네! 스승님!
“만찬 준비는 끝났겠지?”
-물론이죠.
“수고했다. 원하는 대로 배 안의 시설을 즐겨도 좋다.”
-감사합니다!
신기한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요정들은 형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떼 지어 몰려다니며 ‘이슬’호의 시설을 즐기기 시작했다. 형진은 나중에 아기 공주들에게 배를 나눠 줄 때, 요정들에게 이 배의 승무원을 맡길 생각이다.
프리츠는 요정들이 그렇게 왁자하게 떠들며 물러가는 모습에 조용히 웃다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부탁하겠네.”
“걱정 마십시오.”
프리츠는 형진이 머물고 있는 선실에서 나온 뒤, 다시 은신으로 모습을 감춘 채 황혼의 성물을 통해 ‘하늘’호로 옮겨갔다. 조용히 잠행으로 움직이며 살펴보니 승객 대부분은 여전히 갑판 위에 남은 채 ‘하늘’호 주위를 날고 있는 전투기들의 모습을 지켜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몇몇 기자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마스트 꼭대기에서 주위의 모습을 촬영하며 뭐라 뭐라 떠들어 대고 있다. 슬며시 공중에 떠올라 다가가자 그들의 말소리가 프리츠의 귀에 들려온다.
“보이십니까? 지금 저희들이 있는 곳은, ‘하늘’호의 가장 높은 곳인 1번 마스트의 꼭대기입니다. 이렇게 봐서는 어느 정도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쪽을 보시면 주방위군의 전투기들이 호위하듯 따라붙고 있는 걸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항을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만, 벌써 로키 산맥을 넘어 네바다주를 지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배에는 추진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속도라니, 이건 그야말로 혁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잔뜩 흥분해서 얼굴마저 붉게 물들인 채 여기자는 그렇게 두서없이 이말 저말 마구 떠들어 대고 있었다. 프리츠는 그런 기자들의 모습에 피식 웃더니 ‘하늘’호의 조종 콘솔을 불러내어 이동 경로를 살짝 수정했다.
프리츠의 조작과 함께 ‘하늘’호는 천천히 선수를 기울이는가 싶더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어? 어어? ‘하늘’호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합니다!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걸까요? 앗! 저것은? 워커 호수입니다!”
흥분한 여기자의 중계를 들으며 프리츠는 호수 수면을 스치는 듯한 느낌으로 천천히 ‘하늘’호를 활강시켰다. 완만하면서도 빠른 ‘하늘’호의 그와 같은 기동에 주방위군 전투기들은 당황한 듯한 느낌으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갑자기 하늘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얀 범선의 모습에 워커 호수의 이름을 딴 인근 도시의 시민들은 놀란 표정으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그 모든 장면들을 자신의 휴대폰으로 찍어대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백악관 지하 1층에 위치한 회의실에서 그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지켜보고 있던 대통령은 허탈한 표정으로 웃어 버렸다. 이제는 뭔가 화를 내기도 기운 빠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리 쪽 사람은 몇이나 탑승했소?”
“네 명입니다. FBI 요원이 둘, 연방 정부 관계자가 둘입니다.”
“FBI 요원에게 명령해서 선박을 나포할 수는 없겠지?”
“비행 허가를 트집 잡으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만, 연락을 취해본 결과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대통령은 얼굴을 찌푸렸다.
“불가능하다고?”
“행사장에서 뽑힌 스무 팀의 승객 외에는 달리 승조원을 찾을 수가 없는데다 조타실이나 기관실 같은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설마… 저 배가 지금 무인 항해를 하고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프리츠인가 하는 자는? 그 자도 탑승했을 텐데?”
“그게… 모두가 감쪽같이 속아버렸습니다. 행사장에 나타났던 그의 모습은 실제가 아니라 증강 현실을 통한 홀로그램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맙소사. 완전히 당했군.”
이렇게 되면 저 배가 세계 일주를 하는 동안 손가락을 빨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실상 미라지 코어의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다. 세계 일주를 한답시고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구미에 맞는 제안을 하는 나라에 그대로 내려 앉아 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미국으로서는 그야말로 닭 쫓던 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후… 뉴욕의 경영진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인가.”
“자신들은 그저 명목상의 경영진일 뿐, 실제 무언가를 결정할 권리는 없다는 답변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실세가 누군지는 확인이 되었고.”
“그것도…”
“미치겠군.”
대통령은 허탈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정보 관계자가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건넨다.
“저… 이것은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뭔가.”
“아마도 현재의 미라지 코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한국 출신일지도 모릅니다.”
“한국? 한국… 아, 그 한국. 근거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국명에 대통령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범선의 이름입니다. ‘하늘’이라는 단어는 한국어로 하늘을 뜻하는 말입니다. 일부러 언론에 저 배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노출했다는 것 또한 어떻게 보면 하나의 의사표시가 아니겠습니까?”
“한국어라고? 그게 정말이오?”
“틀림없습니다. 원하신다면 한국 정부에 확인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건 너무 섣부른 일이겠지. 일단 보류해 두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벽 쪽의 의자에 앉아 있던 보좌관 가운데 하나가 어딘가로부터 연락을 받더니 국무장관에게 다가가 가만히 무언가를 건네며 속삭였고, 국무장관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대통령에게 자신이 들은 내용을 보고했다.
“대통령님. 지금 선내에 다시 프리츠 베커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요원의 휴대폰과 연결이 되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겠지. 들어 봅시다.”
대통령이 허락하자 국무장관은 건네받은 휴대폰의 스피커폰 볼륨을 올렸고, 곧바로 그곳으로부터 프리츠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