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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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재편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일컬어지는 강대국 셋의 인식 변화는 ‘하늘’호와 ‘세연’호의 나포를 시도했던 북한에 대한 정세 변화로 나타났다.
사실 북한이 온갖 미친 짓을 하고서도 국가라는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중국의 존재 때문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파나마 침공이나 니카라과 봉쇄 같은 사안만 놓고 보더라도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국가를 가만히 두고 보는 나라가 아니다. 그런 미국이 흔한 공습 한 번 때리지 못하고 조막만한 북한에 쩔쩔 매는 이유가 배후에 위치한 중국 외에 달리 있겠는가.
어찌 보면 이번과 같은 미친 짓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과거의 전례 때문이었겠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미국이나 러시아는 물론, 이번만큼은 중국도 북한의 배후를 자처할 수 없는 사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러시아가 평양 주재 공관을 철수시키고 국교 단절과 함께 자국내 북한의 자산을 동결시켰다. 이것은 사건 발생 후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루어진 일이었고, 다시 한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중국이 같은 일을 했다. 지금껏 북한의 배후령이나 다름없던 두 나라가 동시에 같은 행동을 취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고 지도자를 어이없이 잃고 그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북한 군부가 어떻게 대처할 틈도 없이, 수교 중이던 다른 나라들 역시 일제히 러시아와 중국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채 몇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북한은 수교국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진정한 왕따 국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유엔 결의안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각국의 즉각적인 행보에, 전 세계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세상이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북한 군부는 즉각 전시 체제로 전환하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한미 연합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하지만 주한미군도, 한국군도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미라지 코어가 이미 미국 정부의 손에서 벗어나 버린 상태라고는 해도, 어쨌든 형식적으로는 자국의 기업이기에 ‘하늘’호와 ‘세연’호의 나포 시도를 명분 삼아 군사 행동을 일으킬 명분은 충분했다. 그러나 미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생색을 낸다 해도 죽음의 천사가 고마워 할 리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밥숟가락을 얹으려 든다고 화나 내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너무 많이 보여줬나.”
“‘이슬’호보다는 베커씨의 모습에 더욱 놀랐겠죠.”
“하긴.”
요안나의 말에 형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프리츠는 고개를 수그린 채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저도 모르게 그만 욱하는 바람에.”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저들도 조금쯤은 눈치 채고 있었을 테니.”
어차피 성역의 효과는 그런 상황에서라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몇몇 언론들은 미라지 코어의 최고 기술 책임자인 프리츠 베커가 사실은 공포와 죽음이라는 신을 따르는 사도 중의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사실 굳이 언론들이 오늘만 사는 것 같은 느낌으로 떠들어 대지 않더라도 당시의 상황을 중계를 통해 지켜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주먹질 한 방에 사람의 몸이 날아가 버리고, 총알을 가볍게 튕겨내는 초인. 일반인들이야 전문가들처럼 무효화니 뭐니 하는 식의 용어를 써서 분석하기 보다는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이해하는 쪽이었고, 당시의 상황을 지켜봤던 다른 승객들의 증언도 대개 그와 비슷했다.
게다가 프리츠가 항해 중에 모습을 자유자재로 모습을 감추고 드러냈던 일까지 새삼 밝혀지면서 더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고 말았다. 적어도 실체가 없는 홀로그램이 사람을 날려버리고 총알을 튕겨 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 프리츠가 감히 ‘하늘’호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이슬’호로 도망치듯 넘어와 있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어쨌든 ‘하늘’호를 비롯한 범선들은 중국의 동쪽 해변을 따라 남진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평양에서 태웠던 아이들은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의료진들에게 맡겨서 일단 병을 치료하는 중이고, 그 아이들을 방패삼아 나포를 시도했던 북한의 특수 부대원들은 창고 하나에 몰아넣은 상태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앞서 프리츠의 손에 죽임을 당한 지휘관 같은 꼴로 만들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음 기착지인 싱가포르에서 인터폴에 넘겨져 네덜란드의 국제 형사 재판소로 넘겨질 예정이다. 아무리 프리츠가 집행자인 것이 뻔히 다 들통 난 상황이라도, 미라지 코어의 경영진 가운데 한 사람인 이상은 그걸 또 스스로 그렇다고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싱가포르까진 다소 시간이 걸릴 테니, 그 전에 놀란 아이들을 좀 진정시킬 필요가 있겠군.”
“어떻게 하시려고요?”
“간단하게 파티나 열어줄까?”
“파티요?”
“그래. 이참에 여신님들도 데뷔시키고.”
요안나와 프리츠는 괜찮은 생각이라고 판단했다. 일단 배부르고 등따시면 불안 같은 건 아무래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귀여운 여신들의 춤과 노래라면 아이들에게도 충분히 먹힐 것이다.
“나쁘지 않겠네요. 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는 무리 아닐까요?”
“괜찮아. 어차피 홀로그램 같은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하하…”
프리츠가 멋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직접 나서서 지휘관을 쓰러뜨리는 바람에 모처럼 홀로그램이라고 생각하도록 속인 것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 버렸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형진은 우선 왕성 라이언하트에서 여신들을 불러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신님.”
“헤헤. 감사합니다!”
프리츠의 대답에 보호와 균형은 물론이고 꽃과 바람, 그리고 황혼과 망각까지도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녀들에게 이런 식으로 격식에 맞춰서 응대해 주는 사람도 드물다. 사실 왕성의 식구들에게 있어서 이 셋은 여신보다는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와 낭만처럼 장난감 취급당하는 신도 있긴 하지만.
형진은 세 여신들에게 이곳에서 해주었으면 하는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본격적인 데뷔를 고대하며 매일 땀 흘리며 연습에 매진하고 있던 여신들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드디어 데뷔인가요?”
“네. 일단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하는 위문 공연의 형식이 되겠지만, 그 모습이 세계에 전해질 테니 여신님들의 데뷔에 어울리는 무대가 될 겁니다.”
이미 그녀들은 집행자들의 연회에서 쇼케이스를 겸해서 축하 공연을 한 적이 있다. 직접적으로는 그때보다 관람객의 수가 줄었지만, 실제로는 텔레비전 등을 통해 지구라는 세계 전체에 실황으로 중계될 테니 훨씬 규모가 큰 공연이 된다.
“모르긴 해도, 이번 공연이 잘 치러진다면 여신님들의 팬클럽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게 될 겁니다.”
그 말에 세 여신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힘차게 대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슬’호의 무력시위로 미라지 코어가 지닌 힘을 과시했으니, 이번에는 갑작스런 힘의 표출에 놀란 사람들을 달랠 차례다. 너무 강하게만 나가면 결국은 부러지게 마련, 결국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던가.
형진은 림과 람을 불러 여신들의 공연 준비를 시켰다. 요정들은 슬슬 뱃놀이도 질려가던 와중에 새로운 일거리가 떨어지자 얼씨구나 하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나자 프리츠는 다시 ‘하늘’호와 ‘세연’호의 갑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로 홀로그램을 사용한 방문인 셈이다.
“바다를 건너는 동안 어린이 여러분을 위한 만찬을 열릴 예정입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모두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프리츠는 여전히 정중한 모습으로 그렇게 안내를 했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앞서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 때문인지 다소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록 그들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죽음의 천사라는 이름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니까.
저마다 마음속에만 품은 채 남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했던 작은 인생의 오점이라든가, 실제로 행하지는 않았더라도 여러 가지 충동을 느꼈던 적 한두 번 쯤은 있게 마련. 그런 식으로 양심에 새겨져 있던 가책들이 지금 이 순간 표면으로 올라와 두려움이라는 형태로 변화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야 말로 공포의 본질. 다소 강제적이긴 하지만 공포와 죽음이라는 신이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촉매와 같은 감정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강요할 때가 아니다. 너무 강력한 공포는 사람을 경직되게 만드는 법. 모든 것이 그러하지만 너무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니 적당히 풀어줘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공포 그 자체로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라면.
프리츠의 공지가 나오자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것을 본 프리츠는 신호를 발했고,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하늘’호와 ‘세연’호의 머리 위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이슬’호가 모습을 드러내 두 배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럼, 만찬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프리츠의 목소리와 함께, ‘이슬’호가 다시금 변형을 시작했다.
“어?”
“저건!”
‘이슬’호의 용골이 다시금 뒤로 젖혀지고, 용골에 닿아있던 늑골들이 벌려진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전투 상태로의 전환과 비슷하지만, 선수의 대포 같은 것이 나타나지도 않았고 옆구리에서 마법을 발현하는 구슬이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형태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변형하는 선체를 보고 다시금 앞서의 전투를 떠올렸던 사람들은 ‘이슬’호의 늑골이 양 옆에 가지런히 늘어선 범선의 선체를 움켜쥐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들은 곧이어 놀람 가득한 탄성을 터뜨려야만 했다.
화악!
서로의 선체를 연결하는 과정이 끝나자, 다리들로부터 빛이 흘러나오며 무지개로 이루어진 다리 같은 형상이 만들어졌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슬’호의 선체 곳곳에 아름다운 꽃들이 마술처럼 툭툭 터져 나오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앞서 평양을 초토화시켰던 강력한 선체는 꽃과 나무로 뒤덮인 아름다운 정원의 형태로 변화했다.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갑작스런 그 변화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 앞에 한 무리의 요정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무지개다리 위를 건너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위를 맴돌더니 손과 옷깃들 붙잡고 그들을 ‘이슬’호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어어?”
-괜찮아요. 겁 먹지 말아요.
“자, 잠깐…”
-우리랑 같이 놀아요. 네?
“어이쿠… 이거 참, 허허허…”
-자, 어서 가요! 어서요!
요정들은 그렇게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승객들을 이끌었고, 몸이 불편한 아이들은 가마를 태우듯 염동력으로 들어올려 옮겼다.
사람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 요정들은 아무리 봐도 단순한 홀로그램으로 보기 어려웠다. 대부분 산타옷이나 메이드복 같은, 아무래도 누군가의 특이한 취향을 담은 것이 분명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사이즈가 작아서인지 그저 귀엽게만 느껴질 뿐이다.
“아하하하!”
“와아아!”
요정들의 행동에 적의가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아이들이 먼저 반응했다. 그렇게 한쪽에서 웃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하자, 죽음의 천사라는 이름 때문에 경직되어 있던 다른 승객들의 마음도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퐁! 포퐁!
그들이 ‘이슬’호의 갑판에 도달하자, 다시금 마술처럼 음식이 가득 담긴 식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이들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가장 먼저 선발되어 탑승하고 있던 승객들은 일부나마 그 멋들어진 요리의 맛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은 조건반사를 일으켰다.
“와! 이거 너무 맛있어요!”
“정말! 대단해!”
처음의 만찬은 ‘하늘’호의 출항이라는 사건에 휩쓸린 탓에 요리의 맛이 부각될 기회가 적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마치 요정들의 숲에 들어온 듯한 느낌의 만찬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이들에게 꿈같은 기억을 만들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아름다운 추억에 화룡점정을 장식할 또 다른 한 가지 사건이 바로 그때 일어났다.
쿵짝쿵짝.
어디선가 박자를 맞추기 위한 드럼 소리와 함께 ‘하늘’호와 ‘세연’호의 마스트로부터 빛이 터져 나와 뒤로 젖혀진 채 허공으로 솟아 있던 ‘이슬’호의 용골 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어느 틈엔가 무대 같은 것이 마련되어 있었다. 반짝 반짝 빛나는, 하지만 어쩐지 일반적인 무대보다 훨씬 작은 그런 무대다.
저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그곳으로부터 작은 인영 셋이 또다시 마술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바라보니 요정 사이즈의, 하지만 요정과는 어쩐지 다른 분위기의 아름다운 여성 셋이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잘 부탁드려요!”
“바, 반갑… 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일까. 분명히 요정처럼 작은 이들이고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지켜보는 사람들의 망막은 그런 그녀들의 모습이 확연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여신으로서의 존재감.
드디어 지구라는 이름의 세계에 사는 이들 앞에 신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지금 이순간 그녀들을 신이라고 제대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그녀들의 추종자가 되어 버린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 뿐이겠지만.
============================ 작품 후기 ============================
두편째.
즐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