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21
521====================
117. 약정
형진은 억울했다. 정말 정말 억울했다. 물론 여자들을 좀 많이 집적거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치마만 두르면 좋다는 식으로 껄떡거린 건 아니지 않은가. 다 그럴 만 하니까 인연이 닿아서 그렇게 된 건데.
이유 없는 무덤은 없는 법이라고 형진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보다 못한 신이 작작 좀 하라면서 천벌 운운한 시점에서 과연 그것이 다른 이들의 눈에 적당한 변명이었을까 싶은 것도 사실이긴 하다.
“쳇…”
형진이 그렇게 투덜거리자 위로랍시고 보호와 균형이 말했다.
“진님이 싫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냥 좀… 무서워서…”
그 말을 들은 요안나가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밤의 진이 좀 무섭긴 하죠.”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번 제대로 불이 붙으면 기절할 때까지 몰아붙이니 애정이 과한 것도 문제는 문제다.
“그 점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긴 하지.”
유아의 몸을 통해 그 모든 걸 느껴본 희망과 생명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남자들 속에 혼자 남으면 공주가 되고, 남자는 여자들 속에 혼자 남으면 머슴이 된다던가. 이대로 대화가 계속되면 천하에 다시없는 상변태가 될 듯한 모양새라 형진은 일단 말을 돌렸다.
“크흠. 달리 문제가 없다면, 새 몸을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요.”
그러자 희망과 생명이 흠칫하며 그 말을 받았다.
“역시 변태. 몸을 시험하다니. 세상에, 이젠 아주 대놓고.”
“그런 의미가 아니잖습니까!”
뭔가 자꾸 사실을 왜곡하려는 악의 무리가 있긴 했지만, 사람들 앞에 서려면 역시 요정 사이즈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지라 인간 사이즈의 아바타를 새로 준비하기로 했다.
일단 세 여신들과 요안나는 희망과 생명의 안내를 받아 그녀의 드레스룸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새로운 아바타로 몸을 옮기는 과정을 거쳐 형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때요?”
볼을 발그레하니 붉힌 보호와 균형의 모습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쪽은 홀터넥, 뒤쪽은 브이자 형태로 길게 파여 등이 드러난 하얀색 드레스에 머리를 띠로 가지런히 정돈하고 그녀의 눈빛을 닮은 붉은 루비가 조금 길게 늘어진 귀걸이로 포인트를 살렸다. 전체적으로 우아하면서도 발랄한 이미지를 잘 부각시킨 모습이다.
“좋습니다. 아름다우시네요. 사람들이 몰라볼 것 같습니다.”
“헤헤…”
보호와 균형은 쑥스러운지 고개를 수그리고는 형진의 맞은 편에 와서 앉았다.
다음은 꽃과 바람이었다. 그녀는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검은 색의 노슬리브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의 곡선이 우아하게 살아나는 데다 허벅지까지 옆트임이 올라와 있어서, 노출이라고는 드러난 팔과 슬릿 사이로 얼핏 얼핏 비치는 다리 정도가 고작인데도 농염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말없이 형진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꽃과 바람이 마찬가지로 보호와 균형 옆에 자리를 잡자, 이번에는 황혼과 망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목까지 올라오는 터틀넥에, 손목까지 완전히 뒤덮은 긴팔 소매로 이루어져 있었다. 완전히 노출을 배제한 상체와는 달리 하체는 나팔꽃 모양으로 너울거리는 느낌이었는데, 앞쪽은 무릎이 드러나고 뒤쪽은 발목까지 닿아서 붉은 속감이 잘 익은 석류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목에는 배꼽까지 줄이 늘어지는 긴 백금 목걸이를 걸어 포인트를 주고, 두툼한 검은 가죽 벨트로 조여매 날씬한 허리와 가슴의 볼륨을 강조하고 있다. 노출이 심하지 않으면서도 묘한 요염함이 느껴지는 것이 마치 정숙한 수녀의 숨겨진 비밀을 엿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어때?”
황혼과 망각을 뒤따라 나온 희망과 생명의 말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계약을 하길 잘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쪽이랑 이쪽은 감성도 다르고 유행도 다르니까.”
“그렇긴 하죠.”
요정들이 옷을 잘 만들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이 만드는 옷은 타나토스의 감성이 담겨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다른 세계의 패션이라는 것이 색다른 느낌을 주기는 해도, 너무 이질적인 것은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법이다.
“일단은 내가 대충 골라 입히긴 했지만, 나머지는 사람들이 오면 그 녀석들에게 맡겨.”
“아까 그 리즈라는 분?”
“그 아이도 있고, 톰이랑 클라크라고 전속 디자이너들이 있어. 그 녀석들이라면 믿고 맡겨도 될 거야.”
“알겠습니다.”
뭐랄까. 이렇게 인간 사이즈의 모습으로 성숙한 분위기의 옷을 갖춰 입고 마주 앉으니 뭔가 기분이 묘하다. 평소에 그 귀여운 꼬맹이 여신들이 맞나 싶은 느낌이랄까.
어쩐지 훌륭하게 자란 딸내미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흐뭇하게 웃어 보이자, 세 여신은 흠칫 놀라며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여, 역시…”
“아무래도 평소엔 그냥 꼬맹이 모습으로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다 들리거든요!”
“꺄아아!”
그렇게 잠시 떠들썩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자, 앞서 젠킨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노집사가 희망과 생명에게 다가와 조용히 고했다.
“마담, 손님들께서 오셨습니다.”
“누구?”
“리즈님을 비롯한 스탭 여러분들이십니다.”
“그래? 그럼 들여보내. 아, 올 때 젠킨슨도 함께 들어오도록 하고.”
“네. 마담.”
리즈라면 앞서 그 곰 같은 스타일리스트를 말하는 것이리라. 가만히 요안나와 한쪽 자리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자니, 예상대로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리페! 저희 왔어요!”
“빨리 왔네?”
“얼른 헬기 한 대 불러서 타고 와버렸죠. 차로 오긴 먼 거리니까요.”
“그랬군.”
무슨 헬기를 콜택시 불러서 타고 온 것 같은 느낌으로 말하고 있다. 하기야 세계 최고의 여배우를 돕는 스탭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하지만.
희망과 생명은 그야말로 여왕님 같은 느낌을 풍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들을 맞이했다. 리즈와는 상반되게 다른 손님들은 젠킨슨이라는 이름의 노집사와 마찬가지로 경건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리즈. 이리 가까이 와.”
“네?”
“어서.”
“네.”
곰 같은 체구의 스타일리스트 리즈가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희망과 생명은 전에 없이 근엄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명령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나에게 고개를 숙이도록.”
“이렇… 게요?”
“그래.”
리즈가 지시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희망과 생명은 그녀의 머리에 가만히 손을 얹더니 이렇게 선언했다.
“리즈. 그대에게 희망과 생명의 문장을 내린다. 앞으로 나를 섬기는 사제로서 그 역할에 충실히 임하도록.”
“아…”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던 형진은 희망과 생명의 말고 함께 리즈의 이마에 신의 권능을 상징하는 문장이 찍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버렸다.
“자, 잠깐! 이게 무슨…”
화들짝 놀란 형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하자, 희망과 생명은 그를 돌아보며 왜 그러냐는 듯이 되물었다.
“왜? 뭔가 잘못된 거라도?”
“아니… 그게…”
“아, 리즈한테 사제의 자격을 준 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희망과 생명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차피 너희들은 물론이고 저 녀석들도 이곳에서 추종자를 만들고 있잖아. 이들은 이곳에서 나의 손발이나 다름없는 자들. 너희들에 비하면 오히려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일이지.”
“그런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무슨 얘긴데.”
[여신이란 걸 이렇게 막 드러내고 그래도 되냔 얘깁니다.]
다른 이가 듣지 못하게 메시지를 통해 대답하는 형진의 모습에 희망과 생명은 피식 웃더니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스탭들을 향해 말했다.
“이중에 내가 여신이란 사실을 모르는 이가 있나?”
스탭들은 엉겁결에 고개를 저었다. 엘피스 리페 에스페란토가 헐리웃의 여신이란 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눈앞의 존재가 그런 별명 따위로 칭해지는 여신이 아니라 권능을 가진 진짜 여신이라는 점이겠지만.
“거봐. 이미 다 알고 있다잖아.”
“끙…”
형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본래 추종자란 신이 자신의 의지를 세상에 펼쳐 보이기 위해 손발로 삼은 자들. 뭔가 좀 초점이 어긋난 것 같지만, 지구에서 희망과 생명을 돕는 이들이 저들인 것도 사실이니 정체를 밝히고 추종자로 삼는 걸 형진이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일단 물러나자, 희망과 생명은 스탭들과 집사 젠킨슨을 모두 사제로 만들었다.
“리페… 정말로 여신이었어요?”
“응. 내 본래 이름은 희망과 생명. 들어본 적 있지?”
리즈는 물론이고 스탭들 모두가 크게 놀랐다. 공포와 죽음만큼은 아니지만, 그 이름을 부르면 신기하게도 통증을 가라앉혀 주는 신비한 힘을 가진 새로운 신. 쉽게 이름을 언급하기 어려운 공포와 죽음과는 달리, 희망과 생명은 이름만으로도 선신의 이미지를 착실하게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바로 그 희망과 생명이 자신들과 함께 일하던 대여배우 엘피스 리페 에스페란토라니!
“희망과 생명… 헉! 진통제 대신 부르라던 그 이름 아닌가요?”
“그래. 진통제 대신. 쳇…”
희망과 생명은 그렇게 혀를 차고는 느닷없이 형진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참고로 그 말을 지껄인 놈이 바로 저기 저놈이야.”
“네?”
리즈를 비롯한 스탭들은 형진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요… 자기 정체를 밝히는 것까지야 그렇다 쳐도, 저까지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잖습니까.”
“내 맘이야.”
“끙…”
형진이 얼굴을 감싸쥐고 앓는 소리를 내자, 희망과 생명은 새로 자신의 추종자가 된 이들에게 당당하게 형진의 정체를 밝혔다.
“저 녀석이 바로 요새 소문 자자한 그 죽음의 천사야. 그리고 그 옆의 금발 미녀가 순백의 여기사? 그거고. 그 앞에 나란히 앉은 세 명은 나랑 같은 여신들. 얼마 전에 하늘을 나는 범선에서 콘서트한 꼬맹이들 기억해? 걔들이야.”
“헉!”
리즈를 비롯한 사람들은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느닷없이 여신을 섬기는 사제가 된 것도 놀랄 일인데,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바로 그 죽음의 천사까지 자신들의 눈으로 목격하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탓이다. 게다가 여신들이라니.
“미처 알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엘리자베스 마르티네스입니다. 리즈라고 불러주세요.”
“토머스 테일러입니다.”
“클라크 게일입니다.”
“브릭 에반스입니다.”
“크리스 밀러입니다.”
“젠킨스 마이어입니다.”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텐데, 그들은 한톨의 의심조차 보이지 않은 채 형진에게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인사를 건네왔다. 의외로 희망과 생명은 저들에게 큰 신뢰를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째 나한테 하는 것보다 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는 것 같지 않아?”
“하하…”
느닷없이 여신이라고 정체를 밝히긴 했어도 희망과 생명은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동료나 고용주의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죽음의 천사는 극악한 범죄자에게 가차 없는 처벌을 내리는, 문자 그대로 사신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존재. 그런 이에게 공연히 책잡힐 일을 해서 좋을 일이 있겠는가. 공손한 자기소개와 인사는 나름대로 오랜 사회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조건 반사 같은 것이다.
그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희망과 생명은 이렇게 다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참고로, 내가 그동안 실종되었던 건 저 녀석이 날 감금하고 능욕해버린 탓이야.”
“헉! 그,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 내가 거짓말 할 이유가 없잖아.”
“그럼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잖아요!”
리즈의 외침과 함께 스탭들은 급히 희망과 생명의 주위로 둘러서서 형진을 경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형진으로서는 한숨만 나오는 일일 뿐이다.
“장난 좀 그만 치세요. 여신님.”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럼 차라리 한 마디 더 덧붙이시던가요.”
“뭐라고?”
“여신님조차도 감당 못하는 존재니까, 괜히 신경 건드리지 말라고요.”
“칫.”
희망과 생명은 투덜거리며 자신의 새로운 추종자들에게 말했다.
“그 말대로야. 나도 지금 저 녀석에게 목줄이 잡힌 상태니까, 괜히 미움 받지 않게 조심해. 알겠지만 굉장히 흉악한 놈이거든.”
“그, 그렇군요.”
형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 말을 받았다.
“그리고 또한 희망과 생명의 교단을 관리하는 대리자이기도 하죠. 물론 강탈하거나 한 거 아닙니다. 여신께서 여러분에게 사제의 자격을 준 것처럼 친히 하사하신 겁니다.”
“네?”
리즈를 비롯한 스탭들은 이제 뭐가 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여신을 감금하고 능욕한데다 목줄을 쥐고 있는데, 사실은 그 여신의 교단을 관리하는 대리자라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얘기란 말인가. 보통은 신에게 그런 일을 한 사람에게 교단을 맡기거나 하지는 않을텐데.
“으음… 그렇단 얘기는…”
문득 리즈가 잠시 끙끙거리며 고민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저 분이 사실은 리페의 남편이라든가?”
감금이니 능욕이니 하면서도 막상 범죄자를 상대로 하는 말투도 아닐뿐더러, 묘하게 투닥거리는 품이 부부싸움 같은 느낌이라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아니거든! 내가 어디 저런 놈과!”
“저런 놈이라뇨? 아까부터 너무 말이 심하신 거 아닙니까? 물론 아닌 건 맞지만.”
리즈의 말을 들은 여신과 형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극렬하게 부정했으나, 스탭들은 역시 뭔가 심상치 않은 관계라는 생각에 섣불리 끼어들기를 포기하고 슬그머니 한쪽으로 물러났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여신과 죽음의 천사 사이의 일에 공연히 끼어들어 봐야 좋을 일이 없다는 판단을 뒤늦게서야 내린 것이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