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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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준비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다. 이곳에 처음 와보는 제랄딘이야 그렇다 쳐도, 요안나와 함께 돌아다닌 적이 많은 형진으로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테라포밍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나온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살피면서 천천히 차를 몰고 가는데, 몇몇 사람들이 들고 있는 무지개 깃발이 보인다.
“저건… 혹시.”
설마 싶어서 날짜를 확인해 보았다. 6월 마지막 일요일. 역시나 예상이 맞다. 형진은 연신 주위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제랄딘을 보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오늘 제대로 컬쳐 쇼크를 느끼게 될 것 같다.
일단 모르는 척 도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길을 피해 대학으로 향한다. 예상한대로 꽤 한산한 풍경이다.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실리콘 밸리 근처라 고액 연봉자가 많다고는 해도 대학가 주차장에 이런 수퍼카가 들어서는 건 역시 흔히 보기 어려운 일이니까.
“자, 이거 껴.”
“이건…”
“선글라스라고, 강한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해 주는 안경이야.”
“아하.”
물론 쨍쨍 내리쬐는 태양빛으로부터 제랄딘의 시야를 보호해 주기 위한 것도 한 가지 이유지만, 활짝 피어난 미모를 숨기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나. 선글라스로 가렸는데도 방긋 웃으니 주위가 환하게 밝아진다. 이걸 어찌 해야 좋을지.
“가요.”
“응.”
잡아달라고 가만히 손을 내미는 모습이 마치 무도회에 나서는 아가씨 같다. 평범한 여대생처럼 옷을 갈아입었어도 평소에 배어있는 습관은 어쩔 수 없는 모양.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풍겨지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웃어요?”
“우리 마눌이 이렇게 예뻤나 싶어서.”
“…”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눈을 흘긴다. 그 모습조차 귀엽고 예쁘게 느껴지니 확실히 콩깍지가 덮이긴 했나보다.
그렇게 가만히 손을 잡은 채 교정을 거닌다. 역시나 아메리칸 스케일. 뭔 놈의 학교에 야구장, 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 소프트볼 경기장까지 다 있는지. 좁디좁은 나라에서 학교를 다닌 형진으로서는 이게 학교가 맞는 건가 싶을 정도다.
“저게 전부 유리인가요?”
“응.”
“와…”
하지만 제랄딘은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로 마감된 건물들이 더 인상적인 모양이다. 하긴 땅 같은 거야 썩어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는 공작 가문의 영애이니 굳이 학교 넓이 가지고 감탄하거나 하진 않겠지.
안쪽으로 들어서자 이삼 층짜리 야트막한 건물들 사이로 잘 정돈된 나무와 화초들이 자리 잡고 있다. 길가에 놓여진 벤치들 역시 깨끗하게 청소 되어 있어서 건물들만 아니라면 그냥 잘 정돈된 공원이라고 해도 좋을 듯한 느낌.
하지만 역시 제랄딘은 별로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원래 이렇게 한산한가요?”
실제로 어떤 이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휴일이라 그래. 근처에서 큰 축제가 열리기도 하고.”
“축제요?”
한산한 대학 풍경에 조금 실망한 기색을 보이던 제랄딘은 축제라는 말에 반색했다. 선글라스를 꼈는데도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학교 구경은 이 정도로 하고 축제 구경이나 갈까?”
“음… 그래도 도서관은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도서관이라면 휴일이라도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겠지. 하지만 형진은 살짝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아까 보니까 공사 중인 것 같던데.”
“그래요?”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전부를 말하지 않았을 뿐. 공사 중인 것은 사실이지만, 도서관 서비스는 그대로 이용이 가능하다고 앞서 공고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제랄딘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럼 우리 축제 보러 가요.”
“알았어.”
다시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역시나 시간이 가까워진 탓인지 인파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와아아…”
제랄딘은 그렇게 불어난 인파의 모습만으로도 이미 눈이 휘둥그레진 상황.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라는 생각에 형진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일단 차를 근처 주차장에 세워 두고는 그녀와 함께 거리로 나섰다.
“레이 사세요.”
히스패닉으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두 사람 앞에 불쑥 나타나 무지개 색으로 만든 레이를 내민다. 레이란 하와이 특유의 꽃목걸이를 일컫는 말이지만, 아이가 팔고 있는 것은 무지개색으로 되어 있어서 더 알록달록한 느낌을 주고 있다.
“둘.”
“감사합니다!”
아이는 돈을 받아들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레이 두 개를 건네 주었다.
레이를 걸어주자 제랄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지개색에 뭔가 의미가 있는 건가요?”
“응.”
“뭔데요?”
“이 축제의 주인공들을 상징하는 색깔.”
“헤에…”
“아, 시작된다.”
“어디요?”
“저기.”
곧바로 빵빵 거리는 클락션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에 탄 사람들이 나타났다. 날개처럼 두 팔에 무지개 깃발을 단 사람부터 시작해서, 짝을 이룬 사람들이 퍼레이드의 시작을 알리며 도로를 달린다.
제랄딘은 처음 보는 탈것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내자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다가 이내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되어 버렸다.
“헉! 저, 저, 저 사람…”
그럴 수밖에 없다. 오토바이에 탄 사람 가운데 몇몇이 상의를 벗은 채 무지개색으로 바디 페인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랄딘도 영애시절에는 몸단장을 할 때 시녀들 앞에서 벗을 몸을 드러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은밀한 장소에서 시녀들의 도움을 받을 때의 일. 이렇게 불특정 다수의 사람 앞에서 벗은 몸을 드러내는 경우는 생각해 본 적조차 없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와는 달리, 사람들은 환호하며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진.”
“응?”
“이거 무슨 축제에요?”
그제서야 자신이 뭔가 심상치 않은 축제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랄딘의 물음에 형진은 씩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성적소수자들을 위한 축제.”
“성적소수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기타 등등.”
“네?”
사실 타나토스에도 성적소수자가 없는 건 아니다. 단지 쉬쉬하며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제랄딘도 소문 정도라면 사교계에서 남 얘기 하는 것을 즐기는 귀부인들을 통해 몇 번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놓고 정체를 밝힌 채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을 보는 건 역시나 문화적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오토바이 행진이 끝나자 그 뒤로 깃발과 피켓을 든 사람의 행렬이 이어지고, 그 뒤를 이어 퍼레이드 차량이 나타난다.
“저 퍼레이드 차량들은 이 행사를 지지하는 회사들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거야. 저기 상표 보이지?”
“회사에서… 지원을 한다고요?”
“아까 그 학교에서도 나왔을 걸.”
“세상에…”
작년에는 사과 회사의 CEO라든가 얼굴책의 CEO 같은 사람도 퍼레이드에 참가했다고 알고 있다. 혹시 올해도 참가 했으려나. 진작 알았다면, 형진도 미라지 코어 이름으로 참여했을 테지만 아쉽게도 이 퍼레이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미리 사인업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어째 참가자들이 외치는 구호가 뭔가 특이하다. 뭔가 시끄러워서 알아듣기는 어렵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은데.
“차별하지 말라! 너희가 정한대로!”
“차별하지 말라 하시었다! 너희가 정한대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그런 내용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선고에서 형진이 했던 말 가운데 하나다.
“하하…”
샌프란시스코 퍼레이드는 성적소수자들의 행사 가운데서도 참가자들이 많고 화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올해는 특히 많은 사람들이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형진이 희망과 생명의 이름을 통해 발했던 선고의 영향 때문이었다.
“꺅!”
제랄딘이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린다. 왜 그러나 하고 봤더니 검은 색 가죽 팬츠만 입은 털북숭이 남자가 가슴을 쭉 편 채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내숭은.”
“내, 내숭이라뇨!”
“남자의 벗은 몸 따위 매일 보잖아.”
“그, 그거랑 이건 다르죠!”
“다른가?”
“달라요!”
그렇게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퍼레이드는 계속 이어졌다. 뒤로 갈수록 참가자들의 노출도가 점점 심해지는 건 눈의 착각일까.
“꺅! 꺅!”
맥주 캔 컨셉의 퍼레이드 차량에 수영복만 입은 남자들이 하나 가득 올라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제랄딘은 비명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계속 질러댔다.
“눈을 가리려면 다 가리지, 그게 뭐야?”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아님 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즐기며 형진이 이죽대자 제랄딘은 옆구리를 꼬집어 버렸다.
“으악!”
“나빠요. 당신, 다 알고 날 이리로 데리고 온 거죠?”
“당연하지. 일 년에 한번 뿐인 축제라고.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이 시기에 이 도시에 와서 이 퍼레이드를 못 보면 그것만으로도 손해막심이지.”
“그런 건가요?”
“그런 거야.”
형진은 제랄딘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저 사람들이 전부 성적소수자인 것도 아니야.”
“그래요?”
“응. 그래서 모두가 함께 즐기는 축제인거고. 그만큼 자유로운 곳이라고 이해하면 돼.”
너무 자유로워서 탈인 면도 좀 있긴 하다. 히피 문화의 탄생지이기도 하고, 각종 록이 붐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며, 포르노 산업 붐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 유명한 우주 전쟁이나 도시전설 파괴자 같은 컨텐츠도 이곳이 고향이다.
처음에는 꺅꺅거리며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던 제랄딘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진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환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역시 내숭이었어.”
“뭐라구요?”
“아냐. 내가 뭐라 그랬나.”
한산한 대학의 풍경에 조금 실망한 기색을 보였던 제랄딘이지만, 축제의 모습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결정했어요!”
“뭘?”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요. 이 세계에 대해서. 도와주실 거죠?”
“물론이지. 누구 부탁인데.”
형진은 귀여운 마눌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대답했다.
마침 잘 되었다. 어떻게 보면 폭거라고도 할 수 있는 자신의 선고로 인해 세계가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는지 확인할 기회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좋은 일 뒤에는 나쁜 일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젠장! 어떻게 된 거지?”
“아무래도 뭔가 잘못 된 거 같아. 지부장한테는 아직 소식 없어?”
“연락은 했어! 금방 돌아올 거라고 그랬는데.”
“망할! 돌아오는 거 기다리다가 다 죽겠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곳은 델 레 라그리아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 헤트라. 그곳에 위치한 망자의 대지라는 장소는 페스타가 자주 일어나기로 유명한 곳이다.
사실 여기에는 비밀이 있다. 망자의 대지에서 페스타가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그곳이 대륙 전역에서 모이는 부정한 기운들을 모아 처리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들의 총의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서, 특히 헤트라 지부는 망자의 대지에서 발생하는 페스타의 처리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앗! 지부장이다!”
“살았다! 죽는 줄 알았다고! 이 노처녀야!”
“누가 노처녀라는 거야! 죽고 싶냐!”
집행자들의 환호와 함께 하늘에서 고함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OooOooooOOOoooOOoooOoo.
거대한 체구를 지닌 기이한 형태의 무언가가 그녀를 바라보며 그렇게 소리를 질렀지만,
“우랴아아아아아!”
힐 데 마그는 갑자기 어디선가 거대한 망치를 꺼내 들더니, 자신을 향해 괴성을 지르는 망자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 찍었다.
망치라고 표현은 했지만, 그녀가 휘두르는 그것은 일반적인 망치와는 차원이 다른 무기였다. 드럼통 크기만한 머리의 양 끝에는 거대한 쇠막뚝 같은 것이 튀어 나와 있었다. 머리는 물론 자루까지 모두 강인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그 무게 만으로도 어지간한 사람은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할 그런 무기다.
콰드드드득!
힐 데 마그가 휘두른 망치는 거대한 망자의 머리를 그대로 뭉개 버렸다. 행동을 제한하던 울부짖음이 그와 동시에 사라지자, 수세에 몰려 있던 집행자들인 일시에 자신들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스킬들을 투사해 거대한 망자의 몸을 발기발기 찢어 버렸다.
“역시 지부장!”
“노처녀의 분노는 여전히 최강이구만!”
“이것들이 자꾸…”
집행자들을 위협하던 언데드가 소멸하자 힐 데 마그는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눈을 찌푸리며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하는 망자의 대지를 바라보았다.
“농담이지… 이거?”
막 거대한 망자를 처리했다. 이 정도의 크기를 지닌 언데드라면 한 동안은 페스타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그런 크기와 힘을 지닌 녀석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순간 이 빌어먹을 망자의 대지는 다시금 요동치며 또다른 무언가를 토해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힐 데 마그는 그것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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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