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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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죽은 자 vs 죽지 않는 자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싶을 정도로 막막했지만, 일단 그런 식으로 유저들의 도움을 받고 나자 초반의 혼란은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물론 언데드의 내습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지만, 달리 큰 변수가 없다면 더 이상 사태가 확대되는 것은 막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단 처음의 당황스러움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타나토스의 사람들, 특히 그 중에서도 권력을 잡고 있는 각국의 왕족과 귀족들은 현재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지배계층의 무능이 피지배계층에게 여실하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물론 브라드로슈 가문처럼 솔선해서 언데드 퇴치에 앞장서고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귀족들이 그렇게 자신의 책임과 의무에 철저한 자들만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감히 입 열어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굳이 구분을 하자면 유능한 자보다는 무능한 자가 더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전이 주민 소개를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귀로 흘려버린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민들의 소개보다 자기 가문의 재산을 옮기는 일에 치중하다가 중요한 타이밍을 놓친 경우도 있었다. 신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마을의 주민들을 소개하는 일을 잊고 있는 일 정도는 손으로 꼽기도 어려울 정도였고, 신전의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피난 온 주민들을 성문 안으로 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 추종자들의 기민한 대처와 퀘스트를 통해 파견 나온 유저들의 도움으로 인해 큰 피해는 입지 않고 끝났으나, 이런 자들에 대한 불만이 순식간에 끓어올랐음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초기의 혼란을 벗어난 자들이 다급히 수습에 나섰으나 자칫 누군가가 불씨를 던지기만 하면 그동안 쌓여있던 앙금과 이번 일로 인한 불만이 단숨에 반응을 일으키며 폭발할지도 모르는 위태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때, 몇몇 왕족들이 앞으로 나섰다.
“이제는 우리도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와 같은 모습으로는 결국 뒤처지고 맙니다.”
“왕실이 변화의 격랑에서 매몰되어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그 변화에 앞장 서야만 합니다.”
이 왕족들은 이전에 왕성 라이언하트에 볼모 대신 보내졌다가 추종자로서 받아들여져 엘리시온에의 접속을 허가받은 바로 그들이었다.
대부분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이들이었으나, 그들은 엘리시온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지구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국가가 얼마나 열악한 상황인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이런 식으로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주장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가 아니었으나, 추종자라는 새로운 그들의 신분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제 타나토스에서 신의 추종자라는 신분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가 되어 버린 탓이다.
그렇게 각국의 왕실에서 자발적인 변화의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할 즈음, 공포와 죽음은 마침내 이번 사태에 대한 원인 분석을 마치고 형진에게 그것을 전했다.
“역시… 지구가 문제였던 겁니까.”
[그렇다.]
지구는 인구가 많다. 타나토스 전체 인구의 열 배는 가볍게 넘을 정도다. 세계 규모의 인구 조사를 한 적이 없어서 정확한 수치를 밝혀내긴 어렵지만, 최소 열 배에서 스무 배 정도의 격차가 있을 거라고 형진은 추측하고 있는 중이다.
이 정도의 인구 차이라면 당연히 한 해 죽는 사람의 수도 압도적이다. 뿐인가. 지금까지 지구에는 세계 대전이라 일컬어지는 커다란 전쟁이 두 번이나 벌어졌다. 그 중에서도 이차 대전의 사망자 수는 최소 육천 만에 달한다. 정확한 추산조차 안 되어 최소치로 잡은 수치가 그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고통과 죽음을 통해 만들어진 사기는 마치 해저에 쌓이는 눈처럼 조용히 가라앉기만 할 뿐이었다. 지구는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소외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쌓여있던 사기가 어느 순간 휘저어졌다. 가만히 가라 앉아 있던 사기들은 그 영향을 받아 사방으로 피어올랐고, 그렇게 피어오른 상태에서는 작은 충격만으로도 큰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하다. 마치, 본래대로라면 폭발과는 무관한 시멘트나 밀가루가 원인이 되어 분진폭발을 일으키는 것처럼. 하물며 그것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사기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는 일.
어떻게 보면 지구는 거대한 화약고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셈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쌓였던 사기가 내부로부터 폭발하여 영적인 경계가 붕괴되었다면, 지금 타나토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대로 지구에서 재현되었을 테니까.
차라리 인구가 적은 타나토스에서는 제때 조치를 취해 피해를 최소한으로 틀어막을 수 있었다. 이미 성역으로 보호되는 신전이 존재하므로 대피할 장소 또한 있었다. 하지만 지구는 어떤가. 수백 수천만이 사는 메트로폴리스 한복판에 앞서 망자의 대지에서 상대했던 것 같은 언데드가 출몰했다면 그 피해는 감히 추산하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의 일이 되었을 것이다. 고도화된 만큼 그 일로 인한 파장도 컸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지금까지 쌓아올린 문명 자체가 붕괴하는 이른바 종말과 같은 상황이 도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재의 지구는 그 폭발력을 분출할 통로가 있었다. 바로 타나토스라는 이름의 전혀 다른 세계가.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형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조용히 가라앉은 사기들을 휘저어 이번 일의 단초를 만든 당사자가 자신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처음 이 사태에 직면했을 때 예상한 대로 커다란 결과에는 커다란 원인이 필요하게 마련. 그 커다란 원인은 다름 아닌 형진이 얼마 전 희망과 생명의 이름을 빌어 지구에 퍼뜨린 선고였던 셈이다.
물론 지구가 지니고 있던 위험성을 고려하면 이런 식으로 일이 번진 것이 차라리 나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조용히 가라앉아 있던 사기들을 휘저어 버린 것이 형진 본인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죄송합니다.”
선고 자체가 앞뒤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즉흥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 일의 책임은 온전히 형진에게 있었다. 그는 이전에도 몇 번의 실수를 한 적이 있지만, 이번 사태는 그런 사소한 실수와는 비교도 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문제다. 자칫 하나의 세계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됐다. 어차피 나도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니까. 희망과 생명에게 미루기는 했어도, 허락을 내린 것은 나도 마찬가지고.]애초에 최고 권한 명령서라는 것의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다.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을 건네준 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의 백지 수표나 다름없는 그런 물건이라고나 할까.
“감사합니다.”
형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이 상사 하나는 잘 만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하급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꼬리를 자르는 상급자들만 봐왔던 그로서는, 자신이 신 하나는 잘 만났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당장 허세와 망상처럼 꼬리 자르기를 밥 먹듯 하는 신들이 있음을 생각하면 역시 공포와 죽음의 손에 의해 선택된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원인을 파악했으니 이제 대책을 마련할 차례.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떻게?]
“지구로부터 유입되는 사기의 흐름을 타나토스가 아닌 엘리시온으로 돌리는 겁니다.”
[엘리시온이라. 과연. 나쁘지 않군.]
제법 그럴 듯 하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 또한 아니니까. 게다가 엘리시온이라면 사기에 의해 다소 침식이 되더라도 타나토스처럼 파멸적인 국면으로 치닫지도 않을 것이다. 지구에서 만들어진 사기이니, 지구인들이 처리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고. 물론 신들의 간섭에 의해 이루어진 두 세계의 연결을 완전히 차단하고 모든 사기의 흐름을 엘리시온으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니 타나토스에서 일어나는 페스타의 빈도가 증가할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지금처럼 통제 불능의 상황은 일단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공포와 죽음이 지구와 엘리시온 사이에 영적 통로를 만드는 일에 부심하고 있을 때, 모처럼 지구에서의 데이트를 중단하고 급히 귀환한 제랄딘이 형진에게 연락을 보내왔다.
“무슨 일이지?”
“타나토스의 각국 대표들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해요.”
“날? 왜?”
“각국 왕실간의 연락 내용을 확인해 본 결과, 이번 기회에 타나토스에 존재하는 각국 대표들이 상주하는 의사 결정 기구를 만들고 싶어 하는 눈치에요.”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일인가 싶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 보면 타나토스에도 지구의 국제 연합과 같은 기구 하나쯤은 존재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나 이번 같은 세계 규모의 재앙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형진이 허락하자 곧바로 각국에서 신전을 통해 사절단들이 왕성 라이언하트에 도착했다. 이전의 대관식과는 다른, 왕족 한 명에 실무진 몇 명과 호위 정도만 포함된 단출한 규모의 사절들이다.
지부장들이 귀환하면서 빈 숙소에 그들을 머물게 한 형진은 곧바로 회의장에서 그들을 접견했다.
“의사 결정 기구를 만들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이번과 같은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각 국가의 총의를 빠르게 모아 결정할 수 있는 의사 결정 기구가 필요하다는 데 대다수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흠…”
이미 어느 정도 사전 조율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 부분은 이미 신전과 요정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연락 내용을 확인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의사 결정 기구란 것은 생각처럼 그렇게 빠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수평적인 관계에서는 아무래도 수직적인 관계보다 의사 결정과 그것을 전파하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형진이 그 부분을 지적하자, 왕족 가운데 하나가 곧바로 발언권을 요청한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싶더니 라야바르트 왕국의 레나리스 왕녀다.
“말해 보라.”
발언을 허락하자 레나리스 왕녀는 조신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번 기회에 추종자에 대한 문호를 왕국민들에게도 개방해 주십사 하는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추종자?”
형진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추종자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왕실이나 귀족들에게 대단히 민감한 문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피지배층이었던 자들이 한순간에 지배층도 무시할 수 없는 자들로 탈바꿈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왕족이라 해도 집행자나 수호자 같은 추종자들에게는 말 한 마디 함부로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보면 이것은 기존의 국가 체제를 완전히 뒤흔들어 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처럼 호구 취급당하는 사례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경우에는 사제들을 돌봐야 하는 신이 방치한 때문이고 보통은 함부로 여길 수 없는 것이 맞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 하는 얘긴가.”
“물론입니다.”
“놀라운 발상이군.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빼앗길 수도 있음인데.”
레나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왕족이나 귀족이라 하여 추종자가 되지 말란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형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렇다. 이건 의외로 간단한 문제였다. 피지배층이 추종자가 되어 지배층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앉는 것이 문제라면, 지배층 또한 추종자가 되면 그 뿐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허나, 그것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벽을 허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일단 추종자가 된다면, 그들끼리는 신 앞에서 평등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추종자라는 것이 되고 싶다고 해서 다 되는 것도 아니야. 신께서 정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지고한 신분이라도 추종자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할 테니까. 그런 점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일을 추진하겠다는 건가.”
형진에게서 그런 말이 흘러나오자, 왕족들은 서로를 돌아보더니 빙긋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신께서도 받아들이지 못할 망나니가 왕족이라면, 어찌 그 자리에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하기야 보호와 균형 같은 여신이라면 어지간한 결격 사유가 아닌 이상 대부분 받아들일 것이다.
사실 추종자에 대한 문호를 개방한다 해도 집행자나 수호자 같은 존재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자격 제한 자체가 높기도 하고, 집행자의 경우엔 신분을 마구 드러내는 것 자체가 계율로서 금지되어 있는 것도 문제다.
그렇다면 해당되는 것은 희망과 생명을 비롯해, 형진이 대리자를 맡고 있는 다섯 신들이다. 황혼과 망각, 그리고 비와 낭만의 경우엔 어느 정도 추종자가 사용할 힘에 제한을 가해야겠지만, 이들이라면 이미 신전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하게 다가간 상황이니 추종자에 대한 문호를 개방한다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의사 결정 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권한을 가지는 것은 역시 신들이 되시겠군.”
“그렇습니다. 그분들께서 최상위에 자리하신다면, 의사 결정 기구 자체는 각국의 위치가 수평적으로 정립이 되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신들이 국제 연합의 상임이사국과 같은 위치를 보유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신들이 지니는 영향력과 권위를 생각하면 그보다 훨씬 막강한 위치를 지니게 되겠지만.
형진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얘기다. 그는 공포와 죽음에게 속한 집행자들 가운데서도 최상위에 자리잡은 조정자이며, 다른 다섯 신의 대리자이기도 하니까. 어찌 보면 이 의사 결정 기구는 이미 시작부터 그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얘기인 것도 사실이다. 이전이라면 몰라도, 자신의 즉흥적인 결정이 얼마나 큰 여파를 야기할 수 있는지 형진은 이번 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물며 그것이 신들의 이름을 빌려 세계 전체를 통할하는 일이라면, 그 부담감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될 수밖에 없다.
“알겠다. 여러 신께 의견을 여쭈어 보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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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