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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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탐사
우르릉!
어째서인지 구름 속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가 제법 반갑게 느껴진다. 하도 천벌을 때려 대서 그런 건지도. 항상 맞는 입장인 할이라면 기겁을 하며 움츠러들었겠지만, 항상 때리는 입장인 형진으로서는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 같은 기분마저 느껴질 정도다. 사실 집행자로부터 벗어나면서 어지간한 일이 아닌 이상 천벌 맞을 일도 사라졌으니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천벌을 받을 일이 없다고 아무렇게나 마구 일을 저질러서는 곤란하겠지만.
처음에는 옅은 눈발이 날리는가 싶더니 이내 주먹만한 우박이 비와 함께 쏟아진다. 진눈깨비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형진이 급히 몸 주위에 결계를 치자 그것에 부딪힌 우박들이 후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서져 튕겨 나간다.
얼음 덩어리와 비가 섞여 내리고 있지만 바닥에는 그다지 물기가 없다. 내리는 즉시 과냉각된 빗방울들이 얼어버리는 현상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형진이 호버 보드가 아닌 일반적인 운송 수단을 사용하거나 그냥 지면을 밟으며 이동했다면 꽤 곤란을 겪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조금 더 전진하자 그나마 얼음이 녹아 지표가 드러난 곳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오랜 기간 같은 지역에 계속해서 비나 눈, 우박 등이 쏟아지다 보니 드러난 지표에는 토양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깨끗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민둥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젖은 바위들이 흉하게 드러나 있는 모습이 꽤나 을씨년스럽다.
바람은 점차 강해지며 이내 폭풍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 정도는 우습게 날아가 버릴 듯한 폭풍이지만, 형진은 별다른 기색 없이 호버 보드를 탄 채 유유히 지나칠 뿐이다. 황혼의 결계는 물론이고 바람의 권능마저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문에서 정한 약혼자이며 존엄한 노스페라투 가운데 가장 활력 넘치는 존재로 일컬어지는 지스크 대공을 만나러 왔다가 난데없이 형진의 손에 사로잡히게 된 힐리에타는, 아까부터 형진이 보여주는 모습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오래된 자가 아닌 것 같은데, 사용하는 힘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하다. 자신마저 은연중에 굴복시키려 드는 강대한 지배력은 둘째 치고서라도, 지스크 대공의 수하 심복 가운데 하나인 젠다브를 일격에 소멸시키고 모습을 변화시켜 도망치려는 자신의 본질을 단숨에 낚아채기 까지 했다. 그런데 이제는 절대 마법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신비한 힘으로, 어지간한 자들은 감히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서 주저앉아 버리는 중간 지대를 유유히 돌파해 나가고 있지 않은가.
꽈릉! 우르릉!
폭풍이 심해지면서 내리치는 벼락의 강도와 빈도도 점차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천신이 노한 것 같은 느낌으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벼락은, 일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의 장막처럼 시야 전부를 뒤덮어 버린다.
-꺅!
유유히 쏟아져 내리는 폭우와 휘몰아치는 폭풍, 그리고 미친 듯이 내리치는 벼락 속을 돌파하고 있던 형진은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신의 손에 쥐어진 불덩어리 모습의 힐리에타에게서 들려온 작은 비명 소리를 들었다. 꺅이라니. 언데드에게서 이런 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쏟아지는 비들은 이내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격류를 형성해 어디론가 흘러갔다. 처음에는 작은 계곡이었다가, 이내 격렬한 침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듯 보이는 거대한 협곡이 모습을 드러낸다.
“궁금한 것이 있다.”
-마, 말씀하세요.
여전히 잔뜩 겁을 먹은 목소리. 하지만 형진은 감정을 내비치지 않은 채 고저 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런 식의 자연 환경이라면 낮의 영역과 소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오래된 자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손에 쥐어진 힐리에타만 하더라도 지금 상황을 꽤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런 식이라면 그 이하의 신분을 지닌 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
그런 형진의 의문을 이해했는지, 힐리에타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보통의 존재들은 감히 중간 지대를 넘지 못해요. 물론 목숨을 걸고 돌파하려고 한다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그래서… 실질적으로 낮과 밤의 영역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자는 노스페라투 이상의 지위를 지닌 자들 뿐이에요. 그분들의 힘을 빌린다면 저희들도 오가는 것이 가능해지죠.
빛이 없으면 광합성을 하는 식물은 살아갈 방법이 없다. 물론 특별한 버섯이나 박테리아 종류는 그런 환경에서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들에게만 하위 생태계를 의존해서는 다른 생물들이 살아가기 어렵다. 즉, 밤의 영역은 근본적으로 생태계가 번성하는데 한계를 지닌다는 의미다.
때문에 낮의 영역이 중요해진다. 물론 언데드들이 최상위에 자리 잡은 이 행성의 생태계를 일반적인 그것과 비교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하다못해 저택 안을 장식하고 있던 목재 같은 것조차도 밤의 영역에서는 생산이 불가능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노스페라투는 단순히 지배력만이 아니라, 그런 생산지로의 이동과 운송을 통제하는 실제적인 권력을 지닌 지배층인 셈이다.
“노스페라투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라.”
-그분들은…
힐리에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아는 대로 몇 가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실체를 손에 쥔 시점에서 이미 목숨이 저당 잡힌 것이나 다름없기에 항거의 의지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앞서 접견실에서 젠다브를 몰아붙일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 좋게 말하면 형진의 위세와 힘에 굴복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강한 자에게 속절없이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중이다.
간단하게 각 가문의 계보로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담당하는 지역과 하고 있는 일에 이르기까지 힐리에타의 지식은 제법 넓은 편이었다. 물론 세부적인 것은 파고들어가지 못하는, 피상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얕은 지식이 전부. 하지만 당장 형진에게는 오히려 이런 식의 지식이 더 쓸모가 있었다. 각 가문의 세력 구도를 파악하는 데는 이 정도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이긴 하지만 노스페라투들 가운데 몇몇은 다른 세계로 불려 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불려간다?”
-네. 자세히는 모르지만, ‘가장 오래된 자’의 위세를 다른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라고. 그래서 그분들이 다른 세상에 온전히 자리 잡게 되면 저희들도 이런 땅에서 벗어나 더 아름답고 멋진 세상을 지배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힐리에타는 생각나는 대로 그렇게 말을 주워섬기다가 어느 순간부터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경황중이라 깊은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지금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있는 이 존재가 어쩌면 다른 세상에서 온 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약혼자였던 지스크 대공이 다른 세계로 넘어가려다가 실패해서 이런 무지막지한 존재를 불러들이고 만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제서야 겨우 떠올린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방금 전의 말을 입에 담은 것은 정말 큰 실수다. 노스페라투 지스크 대공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다고 판단한다면, 이 존재는 젠다브를 처리했던 것처럼 오래된 자들을 처리해 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신에 근접했다고 일컬어지는 ‘가장 오래된 자’라면 이런 무지막지한 존재라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겠지만, 자신을 비롯한 존재들은 지금 협곡을 따라 휘몰아치며 내려가는 격류에 빠진 것처럼 그대로 휩쓸려 떠내려 가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힐리에타의 얘기를 들으며 협곡을 따라 내려가자, 마침내 거대한 강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하늘 저쪽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어느새 낮의 영역에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여전히 폭풍과 비, 그리고 벼락이 내리치고 있는 중이라 하늘 일부가 조금 밝아진 것 외에는 그리 달라진 것도 없었지만, 어쨌든 구름에 가리워져 밤의 영역보다도 더 어두운 곳이다보니 별것 아닌 빛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강은 급격히 넓어지다가 어느 순간 수평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밤의 영역과 낮의 영역을 마치 반지처럼 휘감아 돌고 있는 바다에 도달한 것이다.
바다에 도달하자 급격하게 주위가 밝아오기 시작한다. 여전히 구름이 하늘에 가득 끼어 있었지만, 칠흑 같은 어둠이라기보다는 잔뜩 흐린 날에 가깝다. 그렇게 좀 더 바다를 가로지르자, 마침내 수평선 너머로 푸른 숲과 함께 구름 여기저기서 새어 들어오는 화창한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낮의 영역이라고 해도 갑자기 기온이 확 올라가거나 하지는 않는다. 낮과 밤의 경계면은 지구로 치면 툰드라 같은 고위도 지역에 가깝고, 때문에 태양광의 입사각도 낮은 편이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백야 현상이 일년내내 일어나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
하지만 그런 것은 둘째 치고라도 일단 태양이 비추는 지역에 도달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위성으로 파악하긴 했지만, 이곳의 태양은 지구의 그것보다 어둡고, 대신 가깝다. 정확히는 어둡다기 보다는 강렬한 붉은 빛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지만.
심연의 눈가리개를 쓰고 있는 상황이라 가만히 태양을 올려다보아도 눈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때문에 잠시 홀린듯한 모습으로 정말 주먹만한 붉은 태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태양의 한 귀퉁이가 쥐 파먹은 듯한 모습으로 가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식인가. 그러고 보면 밤의 영역에도 커다란 달이 둘이나 보였었는데, 낮의 영역에서도 저런 식으로 일식이 생길 정도라면 이 행성에는 달이 꽤 많은 모양이다. 원래는 자주 일식이 일어나지 않다가 하필 지금 일어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항상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이렇게 발견한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곳에서는 일식이 자주 일어나나?”
-일식… 이요?
“태양이 무언가에 가리는 현상.”
-아… 네. 아마도. 천공의 다섯 자매들이 항상 하늘을 맴도니까요.
“다섯 자매?”
-네. 우리가 살고 있는 차야 메사의 형제별들이죠.
형제별이라면 단순한 위성은 아닌 건가. 중요한 일은 아니니 일단 한 귀로 흘린다. 어차피 이 행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위성들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 더 확실하니까.
파랗기는커녕 시커멓게 보이는 바다를 좀 더 달리자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높은 언덕 너머에 자리 잡은 마을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구에서라면 해안가에 집락을 건설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이곳에서는 격심한 폭풍과 풍랑이 심심하면 몰아치는 곳이다 보니 저런 식으로 방파제 역할을 할 언덕 너머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달리 선박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어지간한 선박으로는 지금 몰아치고 있는 삼각 파도 같은 것은 돌파하기 힘들다. 지구에서도 파도의 마루와 골 사이의 고저차가 이십 미터가 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식의 파도를 측면에서 맞게 되면 제 아무리 거대한 대형 선박이라도 답이 없다. 하물며 이곳은 그런 식의 풍랑이 사시사철 밀려오는 수준이니, 배를 타고 나가 바다에서 뭘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셈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바람과 파도를 막아줄 언덕에 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형성한 것도 모자라 아래쪽에도 상당한 수의 나무들을 심어 언덕 자체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주고 있었다. 바람을 견디기 위함인지 집들은 야트막한 편이었고, 대부분 흙을 두껍게 바른 벽을 지니고 있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창문과 출입구가 나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굳건하게 닫혀 있는 상태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깨끗하게 정돈된 마을의 상태로 봐서는 딱히 버려진 마을 같아 보이지 않는데, 기이하게도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자고 있을 거에요.
“자고 있다고? 아… 과연. 그런 거군.”
낮과 밤이 구분이 되어 있다면 그에 맞춰 움직이면 되지만, 계속 낮만 이어진다면 가급적 공동체에 속한 이들끼리는 생활 사이클을 맞춰 가는 편이 여러모로 편리하게 마련이다. 즉, 지금 이 마을의 사람들은 스스로가 정한 취침 시간에 따라 잠이 들어 있는 것이다.
잠시 기다리자, 한 곳의 집에서 문이 열리더니 노인 하나가 기지개를 켜고는 문가에 매달린 작은 종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집의 문 역시 열리며 순식간에 마을 전체가 활기찬 모습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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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