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68
00668 151. 사절 =========================
우연의 일치?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공교로운 일 아닌가. 제국 동부에 거대한 무언가가 일어나 산 하나가 통째로 무너져 내린 뒤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도 한층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었던 것이 바로 속칭 ‘황제의 소녀’다. 황궁 안은 물론이고, 최근 수도 안에서 호사가들의 입담을 자극하는 가장 큰 흥미 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바로 그 주인공이 어느날 느닷없이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 내려 왔다. 과연 이걸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너…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카트린의 옆에 선 크루그가 작게 말했다. 하지만 카트린은 자신을 향해 의문과 경악으로 가득 찬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빠. 적당히 좀 해.”
“뭐?”
“나 올해로 몇 살이지?”
“…”
“더 노골적으로 물어볼까? 내가 결혼하려면 몇 년은 걸릴까?”
“그건…”
“제발 좀 적당히 해. 아니면, 설마 날 벌써부터 누군가의 신부로 줘버리고 싶은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여기선 그냥 잠자코 지켜봐. 이 사절단의 단장은 나야. 오빠는 바득바득 우겨서 내 호위기사로 온 것뿐이고. 그걸 잊은 건 아니겠죠? 오라버니.”
“…”
크루그는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사실 크루그가 좀 유난스러운 건 사실이다. 어렸을 때부터 애지중지하던 여동생이 늑대 같은 놈들에게 속아 불행해질까 두려워서 그러는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유난스럽다. 어떻게 보면, 카트린이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건 그런 오빠에게 자신이 아무한테나 막 속아 넘어가고 그럴 정도로 바보 같은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배에서 내려서 잠시 기다리자 카트린의 모습에 놀랐던 사람들은 허둥거리기 시작했고, 뒤이어 황제에게 이 일을 알림과 동시에 대신들 몇 명이 일단 황성의 사람들을 대표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물론 그 와중에도 호위병과 마법사들을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오신 귀한 분들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 일행의 대표인지 몰라 그나마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사람을 향해 말했지만, 대답을 한 건 다름 아닌 카트린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엘 파르드의 황녀 카트린입니다. 타나토스의 여러 존귀하신 신들의 명을 대신해서, 귀국을 비롯한 앙그릴의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네?”
엘 파르드는 이제까지 제국을 칭한 적이 없다. 사실상 타나토스의 다른 여러 나라들을 거느린 것이나 다름없는 위치지만, 굳이 왕국이니 제국이니 하는 식의 호칭에 신경 쓸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나라끼리의 외교에 있어서 이런 식의 호칭 문제는 매우 민감한 것이고, 첫 만남에서 스스로를 제국으로 소개하는 것과 왕국으로 소개하는 건 듣는 이로서는 어감상 큰 차이를 지니게 된다.
실제로도 카트린의 말을 듣는 순간 아운 제국의 대신들은 자신들을 찾아온 것이 뭔가 엄청난 상대라는 걸 바로 인식했다. 여러 존귀하신 신들의 명을 대신했다는 부분이 어쩐지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런 식의 발언은 별 의미 없는 외교적인 수사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일.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엘 파르드라는 국명과 타나토스라는 말, 그리고 아운 제국을 비롯한 앙그릴의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고자 찾아왔다는 내용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대신들은 엘 파르드라는 말도 타나토스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하늘을 나는 범선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얘기 또한 들어본 적이 없다. 단순히 하늘을 날기만 한 것이 아니다. 저들은 빛과 함께 어딘가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바꿔 말하자면 공간을 넘는 기술마저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힘을 갖춘 상대가 현재의 앙그릴에 존재하던가.
인사를 건넸던 대신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다시 되물었다.
“제가 견식이 얕아 엘 파르드라는 나라도 타나토스라는 말도 알지 못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실례랄 것이 있나요. 타나토스는 이곳과는 다른 세계입니다. 빛의 속도로 수만 년을 달려도 닿지 못할 그런 곳에 있는 세계에요. 엘 파르드는 그 타나토스에 자리 잡은 나라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무엇 하나 쉽게 믿기 어려운 일들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구체적이다. 다른 세계란 건 그렇다 쳐도, 빛의 속도로 수만 년을 달려도 닿지 못할 곳이라니. 빛의 속도에 대한 개념은 아운 제국의 마법사들 중에서도 극히 몇몇만 이해하고 있는 개념이고, 실제로 측정도 시도했지만 아직 성공한 사례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빛의 속도를 측정하는 건 특별한 장치를 만들지 않는 한 지표상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고, 최소한 천문학적인 방법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들은 마법학이 발달한 나라의 운영을 맡은 자들답게 마법사들의 최신 이론에 대해서도 비교적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편이었지만, 아직 시험 단계에 있는 개념을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소녀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전으로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헐레벌떡 뛰어 오기 시작했다. 기별을 받은 라만이 다급하게 거처에서 나와 달려온 것이다. 대신들은 황제가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달려오는 모습에 크게 놀랐다.
당황한 호위대장이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려 황제를 다시 안으로 모시려 했다. 이들의 목적이 확실치 않은 이상, 황제가 직접 모습을 보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급히 황제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하지만 우르르 달려가던 그들은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 같은 충격을 받으며 뒤로 벌러덩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 이게… 도대체?”
“뭣들 하는가! 어서 황제를 모셔라!”
“이런 멍청한! 그 입 닥치지 못하나!”
“헉! 죄, 죄송합니다.”
다급한 마음에 그렇게 외치던 지휘관이 호위대장의 말에 서둘러 입을 막았다. 자신도 모르게 지금 달려오고 있는 소년이 황제라는 사실을 저들에게 고해바친 꼴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에서 내린 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소년이 자기들 앞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헉… 헉… 헉…”
어찌나 급히 달려왔는지 라만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서둘러 호흡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바보같이. 천천히 와도 되는데.”
하지만 카트린이 그렇게 말하면 손을 뻗어 옅은 빛을 그에게 뿌리자, 거짓말처럼 거칠어진 호흡이 가라앉고 연신 흘러내리던 땀이 멈추며 몸이 안정을 되찾았다.
“고, 고마워.”
머뭇거리며 말하는 라만을 향해 카트린은 씩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사람들은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저게 무슨 뜻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라만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땀으로 젖은 손을 옷자락에 몇 번이나 쓱쓱 문지르고는 카트린의 손을 맞잡았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라만.”
“나, 나도. 카트린.”
“흥.”
옆에 서 있던 크루그가 콧방귀를 뀌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카트린이 조용히 발을 밟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 버린다.
악수를 마치자, 라만은 허둥거리다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이, 일단… 안으로 들어갈까?”
“기꺼이.”
다른 건 모르겠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 모든 광경을 통해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지금껏 황성을 나간 적이 없는 황제가 이들과 이미 구면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대신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말이 아닌 눈빛만으로는 제대로 의미를 전달하기 힘들다. 경비병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 막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중이고, 급히 마법사들이 달려갔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힘인지조차 파악할 수가 없었다.
비록 소년 소녀의 분위기는 부드러웠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결국 답은 하나다.
무력시위.
결국 이 모든 사태는 그 한 단어로 귀결이 되는 것이다.
“말은 부드럽게 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녀라. 그리하면 당신은 성공할 것이다.”
“뭐야 그게. 갑자기 무슨 신뢰와 헌신이나 지껄일 것 같은 얘기를 하고.”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하나가 즐겨하던 말이야. 무력에 기반한 외교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지.”
지금 카트린이 행하고 있는 일은 결국 포함외교다. 상대는 타나토스가 어디 박혀 있는 세계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의 무기로는 항거조차 할 수 없는 무기를 과시하며 접촉해 오면 아무리 사절단이 귀엽고 예쁜 소녀라 한들 그 위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게다가 상대국 황제가 사절단으로 보내진 소녀에게 완전히 빠져서 정신조차 못 차리는 상황이라면, 이건 이미 게임이 끝난 얘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영상을 통해 아운 제국의 황성 델 아운의 일을 지켜보고 있는 형진의 표정을 그리 밝지 않았다. 고집을 부려 끝끝내 사절단에 합류한 크루그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카트린이 저런 비실거리는 황제 녀석과 가까워지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은 것이다.
“못 살아. 카트린마저 이 모양이면, 벌써 열둘이나 되는 공주들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 그건…”
희망과 생명의 핀잔에 형진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그 예쁘고 귀여운 딸들이 언젠가는 누군지도 모를 놈팽이에게 시집을 가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안 될 일이지. 그럼! 뭔가 대책을… 대책을 세워야해!”
“…”
희망과 생명은 물론이고, 말없이 지켜보던 공포와 죽음, 그리고 보호와 균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야만 했다. 뭔가 다시 쓸데없는 일을 저지를 것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버린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형진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린 동안 카트린은 라만에게 안내되어 접견실도 아니고 내전의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오래된 제국인 만큼 외국의 사절을 접견하는데도 나름대로의 격식과 절차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지만, 지금 라만은 그런 걸 떠올릴 여유도 없었고 대신들도 감히 간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가, 갑자기… 웬 일이야?”
“보고 싶어서.”
“…”
눈빛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카트린의 모습에 라만은 그대로 승천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카트린의 목소리와 자신을 바라보는 영롱한 눈동자에 그대로 취해 버리고 만 것이다.
“쿡. 농담이야. 그렇게 정색하니까 이상하잖아.”
“그, 그런가.”
아아… 끝장이다. 저래서야 완전히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노는 식이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의 무력에 압도되어 있는 상황에서, 각국의 대표마저 저렇게 상하관계가 확실하게 정해져서야 방법이 없다.
“전에는 인사 못했지? 이쪽은 내 오빠. 인사해.”
카트린의 오빠라는 말에, 그렇지 않아도 경황이 없던 라만은 바짝 굳어버렸다.
“바, 바, 반갑습니다.”
“크루그다.”
“…”
얼른 자세를 바로하고 카트린에게 배운 대로 악수를 청했지만, 크루그는 내민 손 따위는 무시한 채 이름만 짧게 댔을 뿐이다.
명백하게 자신들의 황제가 무시당하는 모습에 신하들은 분노했다. 단순히 외교 사절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자리도 아니고, 무려 국가 원수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이런 무례라니! 아운 제국이 생긴 이래로 이런 상황은 경험한 적조차 없다!
하지만 분노한 대신들이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들의 시야가 갑자기 깊은 어둠에 휩싸였다.
“이, 이게… 무슨?”
그리고 당황한 그들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속삭인다.
“시끄럽게 굴지 마라. 영원히 침묵하고 싶지 않으면.”
“…”
카트린의 존재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카트린과 크루그를 호위하고 있는 이들은 보통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형진이 거느린 주시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강력한 힘을 지닌, 이전에 노스페라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자들이었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안녕히 주세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