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67
00667 150. 대면 =========================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형진이 결단을 내렸다.
“일단 전부 취소. 너, 이만 돌아가라.”
“네?”
뭐가 뭔지 이해할 틈도 없이 라만의 의식은 다시 본래 그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호위병들이 침대의 네 면을 둘러싸고, 시종들이 빼곡하게 방 안에 들어차 있으며, 마법사들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위험 요소를 차단하기 위해 대기 중인 그곳에서 다시 눈을 뜬 것이다.
“…”
마치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것처럼 소리도 없이 눈을 뜬 라만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일까. 상황을 보면 그런 것 같긴 한데, 너무 생생해서 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증거는 없다. 눈앞에 나타났던 이상한 문자 같은 것도 없고, 카트린이 건네주었던 쿠키도 손에 들려 있지 않았으며,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으슬으슬 몸을 떨게 만들던 이상한 한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아…”
어째서인지 모를 깊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천장에 빙긋 웃고 있는, 갈색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치 낙인이 찍혀 버린 것처럼, 아주 잠깐 밖에 보지 못한 그녀의 모습이 라만의 망막에 그렇게 선연하게 남아 버린 것이다.
라만은 잠시 멍하니 그렇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다시 화들짝 놀랐다.
“폐하?”
“종이. 그리고, 그리고… 화구. 그림 그릴 수 있는 것들을 빨리. 급해!”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폐하.”
얼마 전부터 종이가 대량 제작되기 시작했지만, 황실에서 쓰는 최고급 종이들은 아직 전부 정교한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진다. 지금 라만의 눈앞에 놓여진 하얀 빛의 종이도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명품이다.
잠시 눈을 감고 다시금 마음 속의 심상을 가다듬는다. 인간의 기억은 점차 마모될 수 밖에 없는 일. 그렇게 마모되는 기억은 자신이 보았던 사람의 외모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라만은 자신이 보았던 누군가의 모습이 그런 식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자신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화폭에 옮기기 위해 이렇게 준비를 하고 있다.
황제가 되기 위한 과정 중에는 당연히 교육도 포함된다. 라만은 제국의 누구보다도 넓고 얕은 지식을 전해 받았다. 모든 것을 전부 세심하게 알 필요는 없지만, 또한 모든 것을 조금씩은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 황제다. 비록 그것이 겉핥기에 불과한 것이라도, 상대가 그것에 대해 말했을 때 알아들을 수는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라만도 그런 식으로 많은 교육을 받았고, 그렇게 교육 받은 교양 가운데는 그림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단순히 예술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알리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 가운데 하나로서 그는 그림이란 것을 배우고 익혔다. 때로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림을 그려 표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배울 때는 귀찮고 힘들었지만, 지금 이 순간 라만은 무엄하게도 자신을 마구 몰아붙이던 교사들의 행태를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의 노고가 아니었다면, 라만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표현하고 남길 수단마저 지니지 못했을 테니까.
잠시 눈을 감고 심상을 가다듬던 라만은 목탄을 들고 종이 위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목탄을 움직이던 것도 잠시, 이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종이를 치워버리고 새 종이에 다시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지우고 그리고, 지우고 그리고를 반복하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마침내 라만은 자신이 원하는 그림 한 장을 얻을 수 있었다.
“화폭을.”
“네, 폐하.”
원하는 스케치를 완성하자, 라만은 시종이 준비한 깨끗한 화폭에 그것을 옮기기 시작한다. 티 하나 없이 고르고 균일하게 짜여진 새하얀 천을 네모반듯한 틀 위에 고정시킨 화폭 위에 방금 그렸던 스케치가 옮겨지는 작업이 끝나자, 라만은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궁정 마법사들에게 종이에 그린 스케치 원본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 처치를 명령했다.
“후우우우…”
깊게 숨을 몰아쉬며 다시 한 번 심상을 가다듬는다. 스케치와 본격적인 유화는 또 다르다. 라만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붓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그림 수십 장이 그려졌다.
유화는 상당히 사치스러운 취미였지만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즐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루 종일 틀어박혀 그림만 그리고 있으니, 다른 이들도 점차 라만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지고 왔는가.”
“네. 여기, 이것입니다.”
“이건…”
제국 동부로 파견된 함대로부터 현지의 상황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자, 그것을 정리하고 파악하여 대책을 세우기 위해 부심하던 대신들에게 있어 라만의 그런 모습은 또한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갑작스런 괴한의 난입으로 제국의 황제가 잠시나마 다른 이의 통제 하에 고립되었던 상황이 다시 벌어질까 싶어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을 잊고 오직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으니 어찌 걱정스럽지 않겠는가.
“여자 아이의 모습이군.”
“나이는 비슷한 것 같고… 외모를 봐서는 다른 나라 출신인 것 같은데.”
“그렇게만 단정할 수는 없지. 식민지 출신일 수도 있으니.”
“하긴.”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복사한 그림을 보며 대신들은 혀를 찼다. 딱 봐도 지금 라만이 어떤 상황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신 건 좋은 일입니다만, 어디의 누군지조차 모르는 상대여서는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껏 수없이 많은 여성들이 황제의 침실을 드나들었다. 이런 저런 연령대의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각양각색의 미녀들이 어린 황제를 유혹하려 했지만, 지금까지 라만은 그 누구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한창 이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나이에, 그토록 목석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니 어떤 이들은 황제의 취향이 조금 독특한 걸지도 모른다는 얘기마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일련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것은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의 사태가 대신들의 통제 하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정도. 단순히 지나가던 여자 아이를 보고 꽂힌 것이 아니라, 자칫 적국에서 모의한 공작에 넘어간 것이기라도 하면 실로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숙위 중인 인원들은 뭐라고 합니까.”
“이전의 일이 있은 후, 거처를 옮기고서 잠시 낮잠을 주무시다가 벌떡 일어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들로서도 이 아이에 대한 건 알 수가 없다고.”
“그럼 꿈속에서 본 아이란 말입니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위기 상황에 마음이 동요되어 이전에 보았던 여자 아이를 그리는 마음이 커졌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하긴.”
단순히 상상 속의 인물이라고 하기에는 묘사가 너무 자연스럽고 상황의 표현 또한 지극히 세세하다. 라만은 카트린과 만났던 상황을 마치 파노라마를 구성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그리고 있었다. 만나서 직접 대화를 나눈 건 고작 몇 분조차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그 모든 시간들을 이런 식으로라도 붙잡아 두고자 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일류 화가의 명작과 비교하기는 어려워도, 대신들이 보기에도 이 그림에 남겨진 라만의 간절한 마음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단… 확인해 봅시다. 실존 인물이라면 어딘가에 흔적이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은밀하게 그림 속 인물들을 수소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제국 전역에 사람이 보내졌다. 하지만 그림 속의 인물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식민지 총독의 수양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한 명의 소녀가 식민지로부터 보내어져 왔다. 하지만 그 소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대신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뭐랄까. 그들 앞에 서 있는 소녀에게선 인공적인 느낌이 너무 많이 전해지고 있었다. 꽤나 공들여서 얼굴을 바꾼 것 같기는 하지만. 아마도 권력에 눈이 먼 총독이 그림을 보고 비슷하게 꾸며서 보낸 모양이다.
어쨌든, 그래도 찾기는 찾았으니 일단 위험한 것을 감추고 들어온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는 황제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라만은 대신들이 힘겹게 찾아서 데리고 간 소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불같이 화를 냈다.
“네놈들이 감히 나를 능멸하려 하는가! 끌어내라! 어서 끌어내지 않고 무엇을 하는가!”
식민지 총독의 수양딸은 한 마디 말도 건네 보지 못한 채 침전에서 쫓겨났고, 그 소녀를 보낸 총독은 곧바로 직위가 해제되어 수도로 불려 와서 심문 과정을 거친 후 유배형에 처해졌다. 라만은 아직 온전하게 권력을 구사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그런 상황이라 해서 황제를 능멸한 죄가 가볍게 여겨질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한 번 이런 짓을 벌이는 자가 나온다면, 이번처럼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반역죄로 다스려 그 친족들까지 모조리 엄벌에 처할 것이니 명심하라!”
“폐하의 말씀, 뼈에 새기겠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림 속의 소녀에 대한 것을 누구보다도 황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음이 명확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인공적인 냄새가 난다 해도 약간의 흔들림조차 없이 보는 순간 그토록 크게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황제의 소녀’에 대한 소문은 더 멀리 퍼져 나가고 말았다.
과연 누굴까.
과연 그림 속의 소녀가 누구이기에 앙그릴 최강이라 칭해지는 아운 제국의 황제가 뭐라 말도 못하고 그렇게 냉가슴만 앓고 있는 것일까.
라만은 조금씩 여위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까도 싶었지만, 카트린을 그리는 그의 마음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주위의 사람들이 보기에 이러다 큰일 나는 것 아닌가 싶은 느낌마저 받을 만큼, 그의 모습은 위태로웠다.
“아무래도 안 되겠소. 뭔가 특단의 대책을 세우는 수밖엔…”
특단의 대책이라고 해봐야 그림 속의 인물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입장에선 쓸 수 있는 방법이 얼마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비슷한 외모의 아이를 대령하는 정도가 고작인 것이다.
“하지만 전에 폐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소. 허튼 짓을 하면 반역으로 다스리시겠노라고.”
“그거야… 그렇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반역의 죄를 뒤집어쓰는 것을 무릅쓰고자 하는 대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며 대신 나서줄 사람이 없을까 하고 있을 뿐이다. 당장 숨이 넘어갈 정도로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신은 물론이고 가문까지 위태롭게 만들 일을 벌일 생각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라만은 조금씩 야위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야위어 가면서도 그는 방안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교육을 받았다 해도 아이의 그림 실력이란 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계속 그림만 그리다보니 실력이 점차 나아지는 건 당연한 일. 사람들은 그제서야 총독의 수양딸이 그렇게 내쫓긴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원래… 이런 모습이었던 거군.”
“그래서 대뜸 쫓겨났던 건가.”
라만이 처음 그려낸 초상화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이 정도로 차이가 나니 그 그림대로 모습을 바꾼 소녀가 오히려 불쌍해질 지경이다. 어떻게 보면, 어린 아이가 개발새발 그려놓은 모습대로 겉모습을 바꾼 셈이니까. 라만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제대로 그려지지 않아서 분통이 터지는 마당에 그 그림대로 모습을 바꾼 소녀가 떡 하니 모습을 드러내니 놀림을 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제국 동부에 파견되었던 함대가 귀환했다. 산이 통째로 붕괴되어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긴 했지만, 생각보다 피해도 그리 크지 않은 수준이고 다른 위험 요소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 방위를 위해 다시 귀환한 것이다.
위풍당당한 철갑선들의 위용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부두로 나아가다. 각양각색의 함선들이 그렇게 한데 무리지어 항구로 들어오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칩거중인 황제를 대리해 대신 가운데 몇 명이 함대의 귀환을 마중 나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저, 저게 뭐지?”
“비상! 비상이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번쩍 하고 터져 나오더니, 그곳으로부터 아름다운 선형을 가진 순백의 범선 일곱 척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곧바로 귀환중이던 함대가 전투 태세에 들어가고 수도는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 비상사태에 들어갔지만, 바다도 아니고 하늘을 통해 저런 거대한 함선들이 날아드는 상황 같은 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라 비상이 걸려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고작해야 마법사들이 황성을 보호하기 위해 긴급하게 소집되는 정도가 전부다.
일곱 척의 아름다운 범선들은 소란스러워진 수도 상공을 유유히 지나쳐 황성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멈추었다. 그리고, 긴장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무리의 사람들을 내려 보냈다.
다급하게 뛰쳐나온 대신들은 정체 불명의 범선으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곳에 있었다.
어린 황제가 밤이고 낮이고 계속해서 그려대는 초상화 속의 소녀.
그 소녀가 바로 그곳에 처음 보는 아름다운 양식의 드레스를 입은 채 서 있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