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87
00687 155. 방문자 =========================
“일단 무슨 병인지는 알 것 같아.”
재단에 속한 의사들에게 문진 내용과 왕자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 등의 정보를 보내 확인한 희망과 생명이 말했다.
“그래? 무슨 병인데.”
“샤르코 마리 투스 병. 희귀한 유전병 가운데 하나인데, 아직까지 근본치료는 불가능하고 증상 완화만 가능하다고…”
“그런가.”
그렇다면 역시 당장의 해결 방법은 아바타를 활용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요정 하나가 신들이 모여있는 자리에 불려왔다. 본래의 육체를 잠재우고 요정의 몸을 얻은 움리드의 마지막 생존자 릴이다.
“여러 신들께 인사드립니다.”
메이드복을 입은 귀여운 모습의 릴인 공손하게 인사를 하자 여신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생활하는데 불편함은 없고?”
-네. 모두 유쾌하고 친절한 분들이라 즐겁게 생활하고 있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릴은 요정으로서의 생활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의 어쩐지 인형 같았던 모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찬 모습이다.
“다행이네. 사실 오늘 우리가 널 부른 건…”
형진은 간단하게 첫째 왕자의 병에 관한 것을 릴에게 설명했다. 릴은 가만히 그 말을 듣고는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사실 저로서는 그런 병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역시 그런가.”
아무리 강력한 문명을 지닌 움리드의 마지막 생존자라고 해도 그 문명이 가진 기술을 모조리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나 움리드는 독자적인 진화를 거친 터라 인간과는 다른 부분도 꽤 많았다. 때문에 인간에게 나타나는 병이 움리드에게도 있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다만…”
릴은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움리드들은 제 유전자 정보를 자신의 몸에 덮어씌우는 식의 시술을 받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나 다름없었어요. 이 병이 유전자의 이상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그 방법을 써서 정상인의 유전자를 덮어씌우면 되지 않을까요?
모여 있던 신들은 순간 이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 그런 방법이 있었군!”
형진은 곧바로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의 정보를 검색했다.
“이중에 그 장비가 있나?”
“이거에요.”
역시나 한 시대를 풍미한 유행이라 그런지 관련된 유물이 꽤 많았다. 형진은 아직 온전하게 기능이 유지되는 유물을 찾아 그것을 길드성 한쪽에 들여놓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 병을 치료하는 데는 아무래도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며 안절부절하고 있던 왕은 형진의 그와 같은 말에 반색했다.
“서, 설마… 치료가 가능한 겁니까?”
“무조건 완치가 가능하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일단 방법은 찾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무리 많은 포션을 들이부어도 전혀 차도가 없었던 터라, 라야바르트의 왕은 형진이 직접 나서겠다고 해도 사실 치료 가능성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상황이었다. 형진마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제는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체념한 표정을 짓던 왕자 역시 형진의 그와 같은 말을 듣고는 형진에게 힘겹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을… 수만… 있다면… 앞으로 평생… 희망과 생명을 받들겠습니다…”
아무래도 단순히 신도가 되겠다는 말이 아니라 추종자가 되고 싶다는 듯한 느낌이다. 그의 동생인 레나리스도 추종자이므로 딱히 문제될 건 없지만, 어째 죽 쒀서 호구 준 듯한 느낌이다.
허세와 망상을 비롯한 연습생 신들이 불려와 유전자 정보를 덮어씌울 장치를 설치하고 작동시키느라 법석을 떨었다. 그 시간 동안 형진은 잠시 제랄딘과 함께 방 하나를 빌려서 휴식을 취했다.
“모처럼의 데이트가 엉망이 되어 버렸네.”
“그러면서 슬금슬금 어디를 만지는 거죠?”
“괜찮아.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까.”
“흔적이 남잖아요. 흔적이.”
“괜찮아. 세상에는 완전 범죄라는 것도 있거든.”
“어휴. 이 변태.”
하지만 제랄딘이 우려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예상 외로 잡신들의 작업 속도가 매우 빨라서 장비들의 설치와 시험이 후다닥 끝나버리고 만 것이다.
“휴가를 받으니까 사기가 치솟은 모양이야. 쳇. 이런 놈들에게 휴가라니. 시간 아깝게스리.”
“하하…”
불퉁거리는 허세와 망상의 모양새가 단순히 휴가를 주는 것이 아까워서만은 아닌 모양이다.
“휴가… 드릴까요?”
“응? 정말?”
아니나 다를까. 떡밥을 슬쩍 던지자 얼씨구나 하며 덥썩 물어버린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뭔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싶었던 모양인지 얼른 헛기침을 하며 얼버무린다.
“크흠. 나는 상관없는데, 너도 알지? 내가 데리고 있는 조수 녀석. 그 녀석이 바캉스 한 번 가자고 자꾸 칭얼거려서 말이지.”
아유무를 말하는 모양이다.
“그렇습니까.”
형진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허세와 망상은 머뭇거리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휴가를 받는 김에… 이번에 새로 지은 별궁이 꽤 괜찮다던데… 잠시 빌려도 될까?”
결국 목적은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엄청난 미인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나름 귀염성 있는 파릇파릇한 여고생과 단 둘이 외딴섬에서의 바캉스라니. 경찰도 같이 보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된다.
“물론입니다. 그러려고 만든 곳인걸요.”
“고마워! 역시 밤의 신이야. 하하하!”
칭찬인 것 같은데 뭔가 미묘하다. 역시 밤의 신이라니. 좋은 의미겠지. 형진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고 다시 왕자가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왕자는 의자에서 침대로 옮겨진 채 편하고 가벼운 옷을 입은 채 누워있고 주위에는 깨끗한 물이 놓여진 것도 보인다. 나름대로 치료를 위해 준비를 한 모양이다.
전부 헛짓이긴 하지만.
“장소를 옮기겠습니다.”
“네?”
“거기, 건장한 분. 왕자님을 옮겨야 하니 들어주세요.”
“그, 그게…”
이 와중에도 호위를 위해 방 한쪽에 버티고 서 있던 기사는 갑작스런 형진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지못한 표정을 지은 채 침대로 다가가 왕자를 공주님 안 듯 들어올렸다.
형진은 그 모습을 보고는 방 한 켠에 황혼의 권능을 사용했다.
“이건…”
“사용해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황혼과 망각의 여신님이 지니신 권능입니다.”
“허…”
신전에서 성물을 통해 어딘가로 가는 거라면 몰라도 즉석에서 권능을 발휘하다니. 왕은 놀란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다. 성물도 없이 신의 권능을 빌어다 쓸 수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알아차린 것이다.
“설마… 엘 파르드의 국왕께서는 황혼과 망각의 여신을 모시는 추종자셨습니까?”
일반적으로는 이게 가장 타당한 추측이고 결론이겠지만, 아쉽게도 형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다.
“그건 아니고, 그저 이해관계로 조금 얽혀 있을 뿐입니다.”
“허어…”
단순한 이해관계는 아니고 일방적으로 빨대를 꼽아둔 상태지만 그런 걸 일일이 다 말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라야바르트의 현재 왕과 유력한 계승자가 동시에 어딘지도 모를 곳을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형진이 나쁜 마음을 품기라도 한다면, 둘 다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될 수도 있다. 보통 이런 식으로 함정을 파서 죽거나 하면 계략을 꾸민 사람이 욕을 먹겠지만,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자가 그런 경우를 당하면 반대로 경솔하고 멍청하다고 욕을 먹을 수도 있다. 본래 나라 사이의 외교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라야바르트의 왕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겠습니다.”
“폐하! 하오나…”
“그만. 나는 이미 그렇게 정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누가 왕실 아니랄까봐 제법 사극 분위기가 난다. 하지만 사실 형진으로서는 왕이 함께 가든 말든 별로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왕자의 병을 살피고 치료하기로 한 것도 따지고 보면 단순한 선의만은 아니다. 실상은 혹시라도 자신의 아이나 자손에게 그런 식의 병이 생기는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 겸 임상 실험을 하는 것 뿐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귀찮게 장비를 가져다 설치하고 기동시키는 식의 일을 할 이유가 없다.
어쨌든 나름 비장한 분위기까지 풍기는 왕족 일행을 데리고 형진은 황혼의 경계를 넘어 길드성에 마련된 치료실에 들어섰다.
“오오…”
“뭔가… 대단하군요.”
난생 처음 보는 이런 저런 장비들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에 왕과 왕자, 그리고 그 외 기타등등 떨거지들은 모두 탄성을 질렀다. 이미 다른 신들은 자리를 옮기고 릴과 그녀를 도울 몇몇 친한 요정들이 기기를 조작하기 위해 함께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곳에 왕자님을 눕히십시오.”
“네.”
기사는 조심스럽게 왕자를 마치 커다란 유리관처럼 보이는 장비 안에 눕혔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정말입니까?”
“아마도요. 중요한 건 사실 그 부분이 아닙니다.”
“네? 그럼…”
형진은 팔짱을 끼고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왕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다시피, 이 병은 어릴 때는 그 증상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왕자가 이런 증상을 보이고 있다면 왕실의 다른 분들도 같은 병증을 앓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런 식으로 되물림 되는 병을 유전병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인 회복 능력이나 포션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합니다.”
“그 말씀은…”
“여기 계신 라야바르트 국왕 전하나, 레나리스 왕녀, 그리고 아직 어린 셋째 왕자 역시 같은 병이 잠복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깁니다.”
“헉!”
왕은 물론이고 함께 온 떨거지들 모두 크게 놀란 표정을 보였다. 형진은 일단 살짝 그렇게 겁을 준 뒤, 다시 천천히 어르듯 말을 이어갔다.
“왕께서는 이미 나이가 꽤 있으시고, 이제까지 비슷한 증상이 없었다면 새롭게 발병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만, 여기 계신 왕녀님이나 왕자님께서는 얘기가 다르죠. 그러니, 기왕 오신 김에 다른 분들께서도 검사를 받아보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증상이 없으면 좋은 거고, 만약 잠복해 있는 상태라면 미리 치료하는 편이 좋을테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첫째 왕자님부터요. 저희가 파악한 것이 맞는지 먼저 확인해야 하니까요.”
곧바로 첫째 왕자에 대한 검사가 시작되었다. 릴과 요정들이 장치를 가동하자, 살짝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던 유리관 속의 왕자가 의식을 잃고 잠에 빠져든다. 약물을 이용하지 않는 일종의 전자 마취로서 지구에서는 아직 개념 연구나 간단한 동물 실험 정도만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이다.
왕자가 정신을 잃자, 스캐너 같은 것이 위 아래로 움직이며 왕자의 상태를 확인했고 팔에 막대 같은 것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더니 이런 저런 정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부분이 문제 같아요.
“그런가.”
역시나 유전자가 문제였다. 아쉽게도 움리드들의 장비라 지구인이나 타나토스 출신 인간들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전무해서 바로 어떤 병이라는 식의 결과치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미리 왕성의 식구들을 불러다가 확인해 본 유전자 정보와의 차이점은 확연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니, 다른 분들도 검사를 해봐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우선 엉겁결에 따라온 떨거지들부터 시작해서 왕녀와 왕도 차례로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다른 이들에게는 왕자와 같은 이상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첫째 왕자의 모친이 문제가 되는 유전병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일단 그 부분은 함구하기로 했다. 물론 함구한다 해도 왕이 스스로 깨달을 가능성도 있지만.
“검사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치료를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마취가 실행되고, 왕자의 몸 위로 스캐너 같은 것이 다시 한 번 천천히 지나가며 빛을 쬐기 시작한다. 형진으로서는 당장 그 원리조차 알기 어렵지만, 저것도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만 하는 문제다.
치료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거의 두 시간 이상 천천히 진행되는 치료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것도 지구의 과학자들이 보았다면 혀를 빼물 정도의 일이다. 따지고 보면 신체의 모든 세포가 지닌 유전자 정보를 개변하는 작업이 고작 두 시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완료되는 것이니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깨어날 겁니다.”
“병은… 어떻게…”
“일단 원인은 제거했습니다만, 몸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는 데는 다소 시간이 필요합니다. 짧으면 몇 개월이 될 수도 있고, 길면 일 년 이상이 소요될 수도 있겠죠.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꾸준히 재활을 위한 운동을 병행하시면 그 시간은 더욱더 단축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지켜보시다가,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다시 희망과 생명의 신전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레나리스 왕녀를 통해도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치료를 마치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자, 왕은 보물 창고 열쇠 하나를 통째로 주었다. 가장 큰 근심거리 가운데 하나를 해결해 준데다, 신과 엄청나게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인한 터라 통 크게 쏜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황공해서라도 사양이라도 한 번 했겠지만, 형진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열쇠를 받아들고 왕실에서 내준 마차를 타고 공작 가문으로 향했다.
“보물 창고라. 잠깐 왕궁 나들이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보상이네. 줄까?”
“됐어요. 공주님들한테나 주세요.”
“그래야겠군.”
참고로 아기 공주들은 아빠한테 받은 열쇠를 잠시 가지고 놀다가 이내 싫증을 냈고, 어디엔가 던져둔 채 그대로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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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째.
나쁜 어른이 생활을 벗어나야할텐데 말이죠.
요즘 이상하게 저녁때 자꾸 잠이 쏟아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