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88
00688 156. 파란 =========================
그렇게 첫째 왕자의 일은 좋게 좋게 해결이 되는 건가 싶었다. 포션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유전병 등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은 데다, 라야바르트 왕실이 안고 있던 문제도 해결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뜻밖의 소식이 공작가로 전해졌다.
“뭐? 그게 정말이야?”
“네. 첫째 왕자는 그대로 요양을 가고 셋째 왕자로 태자가 정해졌대요.”
병이 나았다는 말을 전해줄 때는 금방이라도 태자로 책봉할 것 같은 모양새더니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어째서? 병이라면 이제 좋아질 텐데… 설마… 그건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그렇게 말하자, 제랄딘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출생의 비밀이에요.”
“허…”
혹시나 싶어 말하지 않고 넘어갔던 부분을 왕이 알아차린 모양이다.
유전병이란 결국 선대의 조상으로부터 전해지는 병이다. 즉, 왕자에게서 이런 병증이 나타났다면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어야 한다는 뜻. 형진은 두루뭉술하게 설명하고 넘어갔지만 약간 어벙해 보이던 왕도 의외로 그런 부분에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자신에게도, 레나리스를 비롯한 다른 아이에게도 같은 병은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선대의 조상들에게 그런 병이 있었는지 찾아봤지만 역시나 마찬가지. 그렇다면 왕자의 병은 모계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확인해 본 결과, 왕후의 모계에서도 이런 식의 병증을 가진 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무리도 아니다. 그런 식의 병이 가계로부터 전해진다는 것을 알았다면 간택 단계에서 이미 걸러졌을 테니까.
그렇다면, 결국 답은 하나.
“이런 식의 결과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닌데. 일이 참 공교롭게 되었군.”
“자세한 내막은 왕실에서 함구하고 있는 중이라 정확히 파악하긴 힘들지만, 아무래도 왕자를 빨리 낳아야 한다는 식의 강박관념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아요.”
“그런건가.”
이렇게 되면 비슷한 또래였던 둘째 왕자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지만, 이미 죽어버린 마당이니 확인할 방법은 없다.
“첫째 왕자로선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겠군.”
“그렇겠죠. 모처럼 자신을 괴롭히던 병이 나았는데, 전부 헛일이 되어 버렸으니.”
“그거 참…”
왕실에서는 쉬쉬하며 가급적 시끄럽지 않게 일을 처리하려는 모양이었지만 소문은 삽시간에 귀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귀족들은 황당한 결말에 실소하면서도 자신들의 집안에도 그런 문제가 없는지 내부 단속에 들어갔다.
“당신은 괜찮아?”
“뭐가요?”
“따지고 보면 당신도 바꿔치기해서 공작가에 들어온 셈이잖아.”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제랄딘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긴 이 일은 그냥 농담 식으로 할 만한 얘기는 아니다. 이런 저런 과거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이니까.
“보상으로 받은 보물 창고의 열쇠를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관둬요. 뭐라고 말하면서 돌려줄 건데요?”
“하긴. 그렇겠네.”
왕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아도 속이 쓰린 판에 상처를 들쑤시는 것을 넘어 소금까지 뿌리는 식이 될 터. 이 경우에는 그냥 모른 척 있는 편이 낫다. 돌려달라고 그러면 몰라도, 일부러 찾아가서 돌려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예상외의 사태가 발생하기 했지만 그래도 요리 대회는 예정대로 이어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실의 비사에 대한 건 모른 채 모처럼의 축제를 즐겼다.
“예선은 어때?”
시선을 돌려 아란에게 묻자, 그녀는 특유의 눈웃음을 지은 채 대답했다.
“모두들 의외로 실력이 좋아서 좀 고전했어요.”
“하긴, 전에 보니까 길거리에서 구운 감자를 파는 장인급 요리사도 있더라고.”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실력이 좋은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이참에 특훈을 좀 해보는 건 어때? 내가 잘 가르쳐 줄 수 있는데.”
“요리보다는 다른 데 관심이 있는 거 아니고요?”
“어떻게 알았어? 크앙!”
“꺄앗!”
요리 연습을 빙자해서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는 동안에도 예선은 꾸준하게 이어졌고, 마침내 본선의 날이 다가왔다.
아란은 고전했다는 말과는 달리 우승 후보 중 하나로 손꼽히며 본선에 진출해 있었고, 형진과 제랄딘은 공작의 초대를 받아들여 본선의 주빈 가운데 하나로 참석했다.
형진에 대한 소문은 이미 귀족들 사이에 파다한 상황이라 시비를 건다거나 하는 멍청한 귀족들 따위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아쉽네.”
“뭐가요?”
“제랄딘의 미모에 혹한 철모르는 귀족 청년의 도전을 당당하게 격퇴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말이지.”
“풉. 뭐에요, 그게.”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해프닝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들 호위 하나 없이 다른 나라에 대담하게 모습을 드러낸 형진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기는 해도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여러 신과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소문으로 돌고 있는 모양이다.
다만 형진의 주위가 모두 평온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혼담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에요.”
“혼담? 누구? 나?”
제랄딘은 형진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아뇨. 크루그요.”
“크루그?”
“네.”
형진에게는 제랄딘이 이미 반려가 된 상황이니 왕족 가운데 누군가를 밀어붙이기는 여러모로 곤란하다. 형진이나 제랄딘은 물론이고, 공작가문까지 적이 되어 버릴 수 있는 상황이니까. 모친의 출신이 한미한 탓에 기반이 약한 셋째 왕자의 일을 생각하면 그런 식으로 일을 벌이기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는 편이 좋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바로 레나리스와 크루그의 혼사였던 모양이다.
“질리지도 않나봐. 그 사람들은.”
“혼사만큼 좋은 정략의 수단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왕실의 입장에서는 한 번의 혼사로 막강한 신들의 도움을 받는 엘 파르드 왕실과 자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가진 공작 가문까지 끌어들일 수 있으니 실로 일거양득의 기막힌 계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성사되었을 때의 얘기다.
크루그의 혼사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연 녀석이 제대로 짝을 만날 수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 슬쩍 구미가 동하기는 한다. 레나리스라면 그리 나쁘지 않은 아이인 것도 사실이고.
“녀석의 의견을 들어봐야겠지만, 역시 거절이겠지.”
“아마도요.”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본선 진출자가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 형진과 제랄딘의 시선은 그들 가운데 단정한 옷차림으로 서 있는 아란에게 가장 먼저 향했지만, 그 시선은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넉넉한 인상의 아주머니에게로 옮아갔다.
“역시… 참가했었군.”
“저 아주머니가 참가했다면, 아무래도 힘들겠네요.”
“우승을 노렸던 거야?”
“기왕이면 했었죠.”
문제의 아주머니는 시장에서 통감자 버터 구이를 팔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다른 요리는 어떤지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실력에서 너무 차이가 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억지를 써서라도 아란을 장인 수준까지 올려놓는 건데.
간단한 참가자의 소개가 끝나고 마침내 본선의 막이 올랐다. 이번 요리 대회는 참가자가 많은 터라 본선도 사흘에 걸쳐서 진행되고, 그 모든 과정을 거쳐 마지막 남은 두 명의 참가자가 왕실 인사가 참석한 결선에서 실력을 겨루게 된다.
“그럼 본선을 시작하겠습니다.”
공작의 선언과 함께 본선 첫째 날이 시작되었다. 본선 참가자들은 하루에 하나씩 모두 세 가지 요리를 선보이게 되는데, 그 세 번의 경연 결과를 종합해 결선에 나갈 최후의 승자를 결정하게 된다.
형진과 제랄딘은 아란이 결선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원했지만, 다른 나라 출신의 요리 장인이 두 명이나 모습을 드러내는 바람에 그녀는 순위권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성물의 제한을 푼 결과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다른 나라의 참가자가 나설 여건이 되지 않았다면, 우승 까지는 어렵더라도 순위권에는 충분히 들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도리가 없다. 요리 전문가와 요리 장인의 간극은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크고 깊었기 때문이다.
아란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요리 장인들 간의 불꽃 튀는 대결은 요리 대회를 주최한 공작 가문 입장에서는 매우 큰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번 기회에 세 명 가운데 하나를 가문의 요리사로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브라드로슈 공작 가문은 예전에도 비슷한 일을 하려고 했던 전례가 있다.
물론 그 당시 일을 맡았던 것은 제랄딘이고, 그 결과 기사단의 전투 식량을 군에 도입할 수 있었다. 물론 새로 요리사를 영입하더라도 형진처럼 말도 안되는 속도로 물량을 뽑아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훌륭한 요리사는 가문의 힘을 강화시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렇습니까. 어느 쪽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아무래도 라야바르트 출신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렇겠죠.”
이번에 제랄딘이 엘 파르드의 왕비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공작가의 위상은 한 번 더 뛰어 올랐다. 과거에는 견제를 걱정해서 제랄딘 스스로 신분을 감추기를 원했었지만, 지금은 또 예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누구도 엘 파르드의 이름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존재가 되었더라도 역시 견제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라는 건 무리일지도 몰랐다.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문제의 소지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외국인 보다는 역시 자국민 쪽을 선호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가문의 사람들이 매일 먹는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이므로 인선에 신중을 기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결선 진출자는 세 명의 요리 장인 가운데 시장에서 구운 감자를 팔던 아주머니와, 구릿빛 피부를 가진 건장한 체격의 외국인 요리사 두 명으로 결정되었다.
“수고했어.”
“고마워요. 하지만 역시… 좀 아쉽네요.”
“이제야 특훈을 받아볼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야?”
“네. 처음에는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자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지고 보니 좀 열이 받네요.”
“하하…”
마침내 본선 진출자가 정해지자, 브라드로슈 공작은 성대한 연회를 열어 결선에 오른 두 명의 요리사를 소개하는 자리를 가졌다.
“축하드립니다. 전에 시장에서 통감자 버터 구이를 먹어봤습니다. 정말 맛있더군요.”
“기억합니다. 눈에 확 들어오는 선남 선녀라 특히 기억에 남았지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피긴 했어도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푸근하게 느껴지는 아주머니라 마주 한 채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꽤 좋아질 정도다.
“설마 저 아주머니한테도 마음이 동한 건 아니겠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은근히 저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끙…”
그렇게 오랜만에 제랄딘에게 바가지를 긁히며 별채로 돌아온 형진은 간단하게 몸을 씻고는 보고를 받았다.
“역시… 아직 종적을 찾지 못한 겁니까.”
“네. 집행자와 수호자들을 총동원해서 흔적을 찾고 있지만 전혀…”
“이 정도면 뭐라도 나올 법 한데.”
요리 대회가 진행되는 중에도 위성을 파괴한 존재를 찾기 위한 수색은 계속 되고 있었다. 당장 형진에게 보고를 하고 있는 라야의 총괄 지부장 탁스 두겐만 해도 그토록 오랫동안 해왔던 대장간 일까지 쉬면서 수색에 매진하고 있을 정도다.
예전에 라야에 와서 탁스 두겐을 처음 만났을 때는 이제 막 집행자에 입문한 풋내기에 불과해지만, 지금은 여신의 반려이며 또한 스스로도 신으로 올라선 상태. 탁스 두겐이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보고를 받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런 관계가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
“알겠습니다. 피곤하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 주길 바랍니다. 이건, 타나토스의 명운이 걸린 일이기도 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집행자들끼리 나눠 드십시오. 그 밖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말하도록 하시고.”
“감사합니다.”
탁스 두겐은 형진이 건넨 꾸러미를 받고는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도대체 어디로 숨은 건지.”
형진은 혀를 차며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이내 몸을 씻고 나온 제랄딘과 아란의 모습을 보고는 그녀들의 손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