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59
00759 172. 축제 =========================
초광속 항행 시험은 별다른 문제없이 무사히 끝났다. 하지만 형진은 허세와 망상과 의논해서 우선 다섯 척 정도의 탐사선을 제작해서 사고가 일어나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만한 장소를 중심으로 최소 백 회 이상의 탐사를 진행한 다음에야 유인 우주선에 실장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아직 안전하다고 생각지 않으시는 건가요?”
“이론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세상 일이 생각대로만 돌아가는 건 아니라서 말이지.”
예상외의 문제라는 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때문에 형진은 가급적 여러 가지 환경에서 탐사를 진행해서 그 모든 과정에서의 대응을 매뉴얼화 할 수 있을 정도의 데이터가 쌓이기를 원하고 있었다. 사실 우주는 너무나 넓고 광대해서, 백 회 정도의 탐사만으로 안정성을 논하기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나마도 포트니아 테론이 제시한 과제를 생각해서 최소한으로 잡은 것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중요한 일 하나가 마무리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모처럼의 회합을 마무리 하려는데, 문득 희망과 생명이 뚱한 표정으로 툭 한 마디를 던진다.
“있다가 시간 좀 내.”
“응? 나?”
“그럼 누구겠어.”
단순히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 정도라면 희망과 생명이 이런 식으로 말을 던질 이유가 없다. 그래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실은… 영화제가 있거든. 같이 가줬으면 해.”
“그래? 알았어.”
희망과 생명은 지구에서 헐리우드의 여신이라 불리는 위치에 있었고, 때문에 이런 저런 행사에 제법 불려 다니는 편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영화제가 있었나?”
“있지. 상업적인 면에서는 최고라고 불리는 영화제가.”
“그래?”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문득 아무 말 없던 공포와 죽음이 형진에게 다가와 팔짱을 끼더니 이렇게 말했다.
“안 돼.”
“응?”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형진은 물론이고 희망과 생명마저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희망과 생명은 이내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야!”
그러자 공포와 죽음은 담담하게 말했다.
“진은 이미 결혼한 걸로 되어 있어. 그래서 안 돼.”
“뭐? 그게 무슨…”
희망과 생명은 화를 내려다 말고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어 버렸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형진이 여러 여자를 거느린 것에 대해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희망과 생명이 주로 활동하고 있는 곳은 바로 지구. 일부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일부다처 같은 것은 용납되지 못하며, 몇몇 국가에서는 중혼죄나 간통죄로 처벌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헐리우드의 여신이 이미 부인이 있는 남성과 공식 석상에서 공공연하게 애정을 과시한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가는 대번에 전 지구의 연예계 기자들이 뒤집어질만한 역대급 스캔들이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진이 결혼한 걸로 되어 있다니. 누구와?”
“제랄딘.”
“허…”
제랄딘이라면 희망과 생명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다른 신들과는 달리, 희망과 생명은 제랄딘이 공포와 죽음의 아바타라는 사실마저 알고 있었다.
희망과 생명은 제랄딘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형진과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것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발목을 잡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녀와는 달리, 형진은 자신의 팔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꼭 끌어안고 있는 공포와 죽음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제랄딘이 공공연하게 자신을 남편이라고 말하는 건 알고 있었으나 형진 스스로도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한 수단이라고만 생각했지, 반대로 다른 여자가 형진의 옆에 달라붙는 걸 막기 위한 수단일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다.
역시나 공포와 죽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한 방 먹이는 데는 형진 못지않다. 아니, 오히려 한 수 위라고 해야 하나.
희망과 생명은 울상이 되어 버렸다. 사실 방금 전에는 퉁명스럽게 잠깐 시간 좀 내라는 식으로 말하긴 했어도, 오늘을 위해 그녀는 나름 열심히 준비를 했다. 드레스도 새로 맞추었고, 자기 마음대로 파트너를 동행시키기 위해 여기저기 손도 제법 써두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참에 형진과 공식적인 커플이 되어서 다른 여신들과는 달리 지구 식으로 결혼식까지 올릴 생각이었다. 단순히 결혼식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알콩달콩하게 신혼살림을 즐길 집까지 이미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신혼여행으로 전 세계를 돌며 이 남자가 내 남자라고 자랑하고 다닐 생각을 하며 혼자 바둥거리다가 어제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기까지 했을 정도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단숨에 물거품이 되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희망과 생명은 이내 울먹이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고심해서 짠 계획인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 그지없었던 그 모든 일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다니. 희망과 생명은 지금의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어, 음… 그게…”
평소에도 툴툴거리며 기가 센 모습만 보여 왔던 그녀가 이런 식으로 소리도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자, 형진은 물론이고 무슨 상황인가 하고 지켜보던 다른 신들마저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크흠.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모두 수고했어.”
어마 뜨거라 하는 식으로 허세와 망상이 얼른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사라지자, 그와 함께 일하는 잡신들 역시 허둥지둥 거짓된 천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신뢰와 헌신 역시 쓴웃음을 지은 채 말없이 형진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는 역시나 엘리시온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저기… 이거…”
보호와 균형이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건네주었지만, 희망과 생명은 모처럼 손에 쥐어진 하얀 손수건을 보자 서툰 솜씨임에도 불구하고 정성들여 직접 수를 놓은 자신의 면사포를 떠올리고는 이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뚝.”
“뚝…”
형진이 손수건을 눈가에 가져다 대자 그제서야 희망과 생명은 퉁퉁 부은 눈으로 울음을 그쳤다.
“그렇게 같이 가고 싶었어?”
“응.”
“진작 말을 하지.”
“하지만…”
사실 형진은 이미 이전에 한 번 그녀와 스캔들이 터진 일이 있다. 당시에는 직접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수준도 아니었고, 죽음의 천사 건으로 인해 스캔들 자체가 순식간에 흐지부지 되어 버렸을 뿐이다.
그 뒤로 희망과 생명이랑 맺어질 당시 데이트 하는 장면을 잠시 노출시켰던 전례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형진은 제랄딘이 자신을 남편이라고 소개할 때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되돌려 생각해 보니, 자칫 그때의 일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라 버렸다.
한 방 먹은 건 희망과 생명만이 아닌 셈이라고나 할까. 역시나 공포와 죽음. 그녀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에 형진은 마음속으로 깊이 안도했다.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희망과 생명의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형진은 이렇게 말했다.
“할 수 없지. 혹시 몰라서 다른 신분을 만들어 두긴 했는데, 그렇게라도 괜찮다면…”
“정말?”
“정말.”
이전에 났던 스캔들에 대해서는 희망과 생명이 온전히 감당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기존의 신분으로 그녀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긴 어려운 일이다. 눈 가리고 아웅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여러 여자를 거느린 죄이니 형진으로서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결국 형진은 만약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새로운 신분과 그에 어울리는 외모를 가진 아바타로 모습을 바꾼 채, 그녀를 따라 나서야만 했다.
“이건?”
“입어.”
“…”
방금 전까지 소리도 못 내고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던 그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퉁명스러운 태도로 옷 한 벌을 건넨다. 바라보니 제법 그럴 듯한 느낌의 턱시도다.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형진은 마찬가지로 드레스를 챙겨 입고 나온 그녀와 마주쳤다.
“어때?”
“예쁜데.”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여자 옷에 대해 그리 잘 알지는 못하는 형진으로서도 희망과 생명이 입은 드레스는 어쩐지 파티 드레스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 느낌이 있었다. 머리에 단 악세사리는 옅은 분홍빛의 수국 모양의 코르사주. 그 외에는 반지나 팔찌 같은 것조차 하지 않은 그런 모습이다.
얼핏 보면 평범한 하얀색 드레스처럼 보이지만 하얀 빛의 드레스에 촘촘하게 새겨진 은빛의 자수의 반짝거리는 느낌은 청순함과 고귀함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었다. 형진은 그런가보다 했지만, 여기에 면사포를 씌우면 그대로 훌륭한 웨딩 드레스로 변신할 수 있는 옷차림이기도 했다.
“감상이 고작 그거야?”
짤막한 형진의 감상에 희망과 생명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혹시나 자신의 의도가 드러나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가슴을 졸였던 것이 억울하게 느껴질 정도다.
“글쎄. 더 이상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칫.”
형진의 말에 희망과 생명은 투덜거렸지만, 이내 형진이 가만히 허리를 감싸안고 입을 맞춰오자 모르는 척 그의 손길을 받아들인다.
“이, 이만 출발해야해.”
“그런가. 아쉬운데.”
“…”
형진의 말에 희망과 생명은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이내 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미리 대기된 자신의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았다.
“보통 이럴 때는 다른 사람이 운전하거나 하지 않아?”
“나는 보통 여배우가 아닌 걸.”
“하긴.”
그들이 탄 부양 자동차는 시내를 가로질러 영화제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형진은 공중을 가로질러 가면서, 시내 전체가 영화제 행사로 들썩거리는 광경에 조금 놀란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냥 시상식만 하는 게 아니었어?”
“이 영화제는 좀 달라. 상의 경우에도 관객상이 최고의 상으로 꼽힐 정도로 관객들의 의사가 크게 작용할 정도니까. 그야말로 영화 축제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행사기도 하지.”
“아하.”
그들이 탄 부양 자동차는 이내, 레드 카펫이 자리잡은 장소에 도착했다. 형진이 먼저 차에서 내렸을 때는 그런가 보다 하더니, 그가 운전석을 열어 희망과 생명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야말로 번개가 치는 듯한 기세로 플래시가 쏟아져 내린다.
“어쩐지 당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영광으로 알아. 아무나 할 수 없는 역할이니까.”
“네. 여신님.”
“쿡쿡.”
보통은 여배우 혼자 포토라인에 서는 법이지만, 그녀는 형진의 팔을 놓지 않은 상태로 그대로 촬영에 임했다. 아무래도, 오늘 토픽에는 그녀의 남자가 누구인지를 탐색하는 기사가 여기저기 도배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봐야 오늘 형진의 외모를 보고 미라지 코어의 경영 지원 실장을 떠올리는 인물은 없겠지만.
“복수하는 거야?”
“복수가 아니라 벌이야.”
“벌?”
“세상 모든 남자들의 여신을 손에 넣은 죄는 무겁거든.”
“쿡.”
하기야 당장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만 해도 호의적인 감정이 섞인 것은 거의 없다.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놈팽이인가 싶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 모습은 어떤 신분이야?”
“음… 미라지 코어의 기술 지원 이사.”
“안 좋은데.”
“뭐가?”
“이전에는 경영 지원 실장. 그리고 이번에는 기술 지원 이사. 자칫하면 안 좋은 소문이 돌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할 수 없잖아. 나 정도 되는 남자를 차지하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칫. 말이나 못하면.”
“하하.”
개막식 자체는 별 다른 일이 없었다. 그녀와 함께 이전에 스크린 상에서나 봤던 유명인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개막식을 살펴보고 빠져 나오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형진은 이걸로 끝인가 싶었지만, 희망과 생명은 모처럼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끝난 거 아니었어?”
“끝나긴. 영화제에 왔으면 영화를 봐야지.”
“그거야 그렇지만.”
올해 들어 희망과 생명은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영화 촬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화제에 참여한 것은, 이번 기회에 형진이 자기 남자임을 확실하게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물론 공포와 죽음이 선수를 치는 바람에 예정이 다소 틀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포기하고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