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60
00760 172. 축제 =========================
“그런데 이 차림으로 다닐 거야?”
영화를 보러 다니는 거야 상관없지만, 드레스에 턱시도 차림이어서는 아무래도 편하게 즐기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 큰 일 하나를 끝낸 것도 있고, 앞서 펑펑 울던 일을 떠올리면 하루쯤은 희망과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아니지. 호텔을 잡아뒀어. 그리로 가자.”
“철두철미하군.”
“흥. 영광으로 알라고.”
“넵.”
희망과 생명이 모는 부양 자동차가 다시금 나타나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쏟아진다. 몇몇 사람들이 호버 보드 같은 것을 타고 쫓아오는데, 그 와중에도 스마트 글라스나 헤드캠 같은 걸로 차량을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다.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대책을 만들고는 싶지만 어쩔 수 없어. 관련 법규는 각국 정부의 몫이니까.”
“하긴.”
영화제가 열리는 곳은 미국도 아닌 캐나다. 북미 최대의 영화 축제라 불리며 헐리우드 영화들이 대세를 이루긴 하지만, 그래도 본래 속한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 온 탓인지 뭔가 기분이 색다르다.
곧바로 미리 예약된 호텔에 가서 옷을 갈아입는다. 아주 정성들여 계획을 세운 것인지 이번에도 형진의 것까지 깔끔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음, 좋아.”
영화제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와 청바지, 흰 줄무늬가 들어간 파란색 스니커즈. 여기에 로고가 없는 야구모자와 레이븐 선글라스. 영화제 기간 중에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옷차림이면서도 일부러 커플룩을 맞춘 것임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옷차림이다.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그래서, 싫어?”
“그건 아니지만.”
하지만 역시 이런 차림으로 거리에 나갔다가는 바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꼼짝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인식 저하 정도는 걸어도 되겠지?”
“안 돼.”
“자칫하면 꼼짝도 못하고 발이 묶일 수도 있는데.”
“이게 있잖아.”
희망과 생명은 곧바로 반지 모양의 퍼스널 모빌리티를 드러내 보인다.
“어, 그거 아직 일반에는 공개되지 않은 건데.”
“좋잖아. 이번 기회에 공개도 하고.”
“끙…”
반지형은 자동차 같은 대형 탈것이 결합된 3세대 퍼스널 모빌리티다. 아직 2세대조차 추종자들에게만 공개된 상황에서 갑자기 자동차가 짠하고 나타나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자동차는 꺼내지마.”
“걱정마.”
호텔 바깥을 슬쩍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앞서 자동차가 호텔로 들어오는 광경을 포착한 기자와 팬들이 입구 앞에 모여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정면 돌파는 어려울 것 같은데.”
“나는 상관없지만, 부담스럽다면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결국 그들은 호텔 입구가 아닌 루프탑에 위치한 라운지로 향했다. 그리고 투숙객들이 놀란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퍼스널 모빌리티를 작동시켜 하늘로 날아올랐다.
“엘피스다!”
“어? 여기서?”
“퍼스널 모빌리티는 고도제한이 걸려 있을 텐데?”
처음에는 모른 척 시선을 돌리려던 투숙객들이 허공을 산보하듯 날아오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비행형 퍼스널 모빌리티는 호버 보드나 기타 비슷한 탈 것에 탑승하는 형태이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길이 있는 것처럼 한가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신형 퍼스널 모빌리티!”
“대, 대단해!”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미라지 코어의 신제품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투숙객들이 급히 스마트폰을 들어 둘의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하자, 둘은 마치 스케이트를 타듯 허공을 슥슥 미끄러지며 다른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인식 저하라도 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대로는 영화 관람은커녕 길을 걷는 것조차 어려울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지만, 희망과 생명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 정도쯤은.”
그리고는 팜플렛 하나를 꺼내들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자.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
“못 말리겠군.”
갑자기 허공으로부터 두 사람이 스윽 떨어져 내리며 극장 앞에 늘어선 줄의 끄트머리에 멈춰서자, 영화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톱스타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꺄아!”
“엘피스!”
“세상에! 어쩜! 너무 예뻐!”
설마 하니 헐리웃의 여신이라 불리는 인물이 이런 차림으로 이렇게 뜬금없이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탄성을 터트리자, 엘피스는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른 분들에게 실례가 되니 조금만 조용히 해주세요.”
“네.”
사람들은 순순히 그녀의 말에 응했지만, 조심스럽게 다가와 사인이나 사진을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희망과 생명은 능숙하게 그들을 다루며 요청에 응해 주었고, 그렇게 팬들과 시간을 나누는 와중에 소식을 접한 극장 측의 인원이 달려 나왔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피스님.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자리를 마련해 두었을 텐데… 들어가시죠.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저만 특혜를 받을 수는 없죠. 신경 쓰지 마세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보안 문제라든가… 여러 가지로 번거로우실 텐데.”
“걱정 마세요. 든든한 보디가드와 함께니까.”
희망과 생명은 그렇게 말하고는 형진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극장 관계자는 그녀의 행동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헛기침을 하며 좋은 시간 되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물러났다.
“혹시… 아까 개막식에서도 함께 계시지 않았어요?”
“맞아요.”
“설마… 연인?”
“그래 보여요?”
“네. 너무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슬그머니 연인에 대한 언급은 피해가면서도 직접적인 부정은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나 이런 상황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희망과 생명을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가지고 노는 공포와 죽음은 도대체 얼마나 노련한 건지.
그렇게 잠시 줄을 서서 기다리자, 알음알음 희망과 생명이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극장으로 모여들어 줄을 서기 시작했다. 뜻하지 않게 헐리웃의 여신이라 불리는 탑스타가 찾아옴으로 인해 자신들의 영화가 톡톡한 홍보 효과를 누리게 되자, 극장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상황을 지켜보러 온 관계자들도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진다.
“잠깐만.”
희망과 생명은 잠깐 줄에서 이탈하더니 근처의 푸드 트럭에서 홍차가 담긴 텀블러와 팝콘 한 아름을 가지고 왔다. 그냥 잠깐 가서 군것질 거리를 사오는 것 뿐인데도, 게다가 홍차와 팝콘이라는 일반적이지 않은 조합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광고 영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그래서일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푸드 트럭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자, 받아.”
“고마워.”
마침내 시간이 되어 관객들이 극장 안으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자리를 잡고 앉고 나서야 비로소 영화 팜플렛을 확인했다.
“호오, 이건.”
희망과 생명이 꼭 보고 싶은 영화라길래 뭔가 스피드가 폭발하는 그런 활극을 예상했던 형진이었지만, 그들이 보게될 영화는 의외로 잔잔한 분위기의 드라마였다.
“의외야?”
“조금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중에 마침내 영화 상영이 시작되었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시골에서 벗어나 본 적도 없고 휴대폰조차 쓰지 않는 구닥다리 성직자가 도심으로 상경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내용이었다. 가상현실과 퍼스널 모빌리티 같은, 지금까지는 본 적이 없는 문물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상황 속에서 현대 문명을 거부하며 신앙만을 최고라 여기며 살아가던 성직자가 겪는 혼란스러움을 약간의 코믹스러움과 함께 잔잔하게 풀어낸 영화라고나 할까.
영화 자체는 어찌 보면 구태의연할 수도 있는 내용이었지만, 자신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변화해 버린 세상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고 번민하면서도 신앙을 지켜나가는 성직자의 모습이 현실감 있게 묘사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나 주연을 맡은 중년 배우의 감칠맛 나는 연기가 아주 일품이었다.
“아, 주인공이다.”
첫 번째 상영이라 그런지 영화가 끝나자 주연 배우와 감독 등이 나와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무래도 다소 수수한 영화라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모양인데, 갑작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조금 당황하면서도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좋은 배우네.”
형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자, 문득 희망과 생명이 물었다.
“볼만 했어?”
“응. 데리고 와줘서 고마워.”
그러고 보면 급작스럽게 변해가는 세상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특히나 옛것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 자칫 오래된 것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고 뒤처진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니까.
“고마우면 앞으로 잘 해.”
“네. 알겠습니다. 여신님.”
“흥.”
콧방귀를 뀌면서도 얼굴이 발그레하니 붉어진 모습이 꽤 귀엽다.
배우와 제작진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상영이 모두 끝나자, 희망과 생명은 다시 형진의 팔을 급히 잡아끌었다.
“급해. 빨리빨리.”
한국에서나 들었을 법한 말을 내뱉는 여신의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
“당연하지. 이번 영화제에 출품된 영화만 수백편이야,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그걸 다 보려면 한 시라도 게으름 피울 수는 없는 일이라고.”
“설마 그걸 다 볼 생각이야?”
“그건 아니지만, 최대한 많이 보려고. 그러니까 빨리 움직여.”
“어휴. 알았어.”
잠깐 데이트를 즐기는 정도라고 생각했던 형진은, 여배우와 영화제를 헤집고 다니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중노동인지 이제야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여신의 힘을 쓰지 않고 헐리웃의 여신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희망과 생명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의 진면목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영화를 좋아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는 날이 완전히 저물 즈음이 되어서야 끝을 맺었다.
“후아아… 만족스러워. 아주 좋아.”
“식사는 어떻게 할래?”
“음… 그냥 간단하게 룸서비스로 할까. 나가기 귀찮은데.”
“방금 전까지 도심을 마음껏 누비던 사람의 말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걸.”
“사실 난 지금 굉장한 포만감을 느끼고 있어. 비록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거 다행이군.”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나자, 희망과 생명은 어리광을 부리며 형진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되기라도 한 듯한 모습으로 이것저것 부탁하는 그녀의 요구를 형진은 충실한 기사나 시종이라도 된 것처럼 하나하나 수행했다. 이를테면, 몸을 씻기는 일이라든가, 머리를 감겨주는 일이라든가, 잠옷으로 갈아입히는 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잘 준비가 끝나자, 희망과 생명은 형진에게 입맞춤을 요구하고는 그의 품에 폭 안겨서 새근거리며 잠이 들어버렸다. 원래대로라면 불꽃같은 하룻밤을 보냈겠지만, 역시나 그녀로서도 피로감을 숨기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나서 아침이 되었다. 형진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그녀를 두고 방을 빠져 나와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는 가운을 입은 채 텔레비전을 켰다.
“역시나.”
텔레비전에서는 그들 두 사람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헐리웃의 여신이 시내 한복판을 하루 종일 그렇게 쏘다녔는데, 언론이 그런 토픽을 놓칠 리가 있겠는가.
잠시 그렇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자니, 부스스한 모습으로 희망과 생명이 터덜터덜 침실로부터 걸어 나온다.
“우웅…”
걸어 나온 것 까지는 좋았지만, 역시나 졸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이내 형진의 무릎을 베고는 그대로 누워버린다.
형진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쩐지 새로운 신분을 드러낼 때마다 스캔들이 나는 것 같아.”
“쿡쿡. 그러고 보니 그러네.”
희망과 생명은 이전의 일이 떠올랐는지 키득거리며 웃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바로 누운 채 형진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진.”
“응?”
“나랑 결혼해 줄래?”
“…”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딩가딩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