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61
00761 172. 축제 =========================
뭐랄까. 새삼스러운 얘기다.
“이미 결혼한 거 아니었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형진이 대답하자, 희망과 생명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그거 말고. 음… 그러니까, 결혼식.”
“결혼식이 하고 싶다고?”
“응.”
지금까지는 따로 결혼식이라는 풍습이 없는 타나토스의 관례에 따라왔는데, 아무래도 이 여신은 지구의 풍습에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역시나 공포와 죽음에게 경쟁심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불안해하고 있는 걸까. 자신의 여러 여자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는 것을.
“네가 원한다면.”
형진이 선선히 대답하자, 희망과 생명은 눈을 반짝거리며 되물었다.
“정말?”
“그래. 정말.”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다?”
“당연하지.”
형진이 재차 확언하자 희망과 생명은 벌떡 일어나더니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끼야호! 아잣! 아자잣!”
“훗.”
형진은 그런 희망과 생명의 모습에 피식 웃다가, 이내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여기저기 전화를 거는 모습에 당황했다.
“조나단? 나야. 예전에 말한 거 있지? 그거 말야! 그거! 플랜 엠! 그래! 당장 준비해! 지금 당장!”
“피터? 기자 회견 준비해줘. 음. 내일 당장. 어디냐고? 여기 토론토니까 장소는 알아서 잡아. 무슨 내용이냐고? 알거 없으니까 닥치고 준비해!”
“수잔. 전에 맞춘 옷 그거 언제 완성돼? 일주일? 늦어! 사흘 안으로 완성시켜줘. 무리? 난 수잔을 믿어. 당신이라면 할 수 있어. 그게 얼마나 중요한 옷인지 알지? 추가 금액이든 뭐든 다 낼 테니까. 알았지? 파이팅!”
처음에는 흐뭇하게 지켜보던 형진도 맹수처럼 돌변해서 전화기를 잡고 호통을 치고 있는 희망과 생명의 모습에 이내 흠칫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느 틈엔가 자신이 타나토스의 문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그, 그냥… 타나토스 식으로 하면 안 될까.”
“안 돼!”
“…”
그나마 다행인 건 형진에게 그 모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정도랄까. 얼마나 결혼식이 하고 싶었는지 뼈저리게 느껴질 정도로 희망과 생명은 사소한 준비 하나 하나까지 미리 만들어둔 체크리스트까지 점검해 가며 전화기에 대고 호령했다.
그렇게 약 삼십분쯤 정신없이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나서야, 희망과 생명은 결혼식 준비에 필요한 조치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준비가 다 끝난 게 아니다. 그냥 관련된 인원에게 연락한 것만 삼십분이 걸렸다.
“역시… 타나토스 식으로 하는 게…”
“안 돼!”
“…”
너무 일이 거창해지는 거 아닌가 싶어서 다시 말을 걸어봤지만 희망과 생명은 이것만큼은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는 듯이 맹렬한 기세로 뿜어냈다. 형진은 잠시 얼떨떨해 하다가, 자신에게 떠맡기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다는 것까지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결국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다.
“원래는 열흘간 여기서 머물면서 차근차근 설득할 생각이었지만, 당신이 바로 승낙해준 덕택에 일이 훨씬 쉬워졌어, 고마워!”
“어, 그래.”
그런 꿍꿍이였던 건가. 하기야 뭔 모르는 타나토스쪽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쪽 사람이라면 결혼식이라는 과정 자체를 번거로워할 여지가 있다는 판단에 설득에 만전을 기하려던 생각이었나보다. 하지만 형진이 의외로 단번에 수락한 덕분에 일이 훨씬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음, 설명할게. 한국 쪽에서는 먼저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 신고를 하게 된다고 들었어. 하지만 이쪽은 달라. 먼저 결혼 허가증을 신청한 다음에 대기기간이 지난 다음 결혼 허가증을 발급 받게 되면 한 달에서 석 달 이내의 유효 기간 내에 결혼을 진행하게 돼. 물론 이 결혼 절차는 정식 결혼식이 아닌 약식으로도 상관없고 결혼 당사자, 결혼 집행이 가능한 판사나 성직자, 그리고 증인 두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절차가 마무리 되면 서류에 서명하고 법원에 발송한 다음 결혼 증명서가 도착하면 모든 법적 절차가 끝나. 결혼 허가증을 신청하고 난 다음에는 대기 기간이 존재하는데, 이건 주별로 다르긴 하지만 캘리포니아 쪽에는 대기 기간이 없으니까 그쪽에서 신청하게 될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았지?”
“어,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기세에 밀려서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일단 내일 여기서 기자 회견을 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서 결혼 허가증 신청을 할거야. 예식장이라든가 다른 준비는 이미 내가 다 끝내놨으니까, 당신은 그냥 몸만 오면 돼. 알았지?”
“어, 그래.”
“좋아. 그럼 일단 씻고… 음, 내일부터는 정신이 없겠지만, 오늘은 일단 느긋하게 데이트를 즐기기로 해. 같이 씻을래?”
“그게, 난 먼저 씻어서.”
“그래. 그럼 나도 금방 씻고 나올게. 일단 뭐라고 시켜놓고 있어.”
“어, 그래.”
폭풍 같이 모든 일들을 후다닥 해치우고 욕실에 들어가는 희망과 생명의 모습에 형진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결혼식에 이렇게 목을 매는 이유는 단순히 여자의 꿈이라서 라든가 남들이 하니까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배우자가 그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확인 받고 싶은 것이었다. 지금처럼 그가 거느린 여러 여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만이라도 그의 유일한 반려가 되고 싶은 욕구를 그런 식으로 표출한 것 아닐까.
“이거 참.”
따지고 보면 다른 반려들에게도 이런 식의 욕구는 어느 정도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단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이것은 좀 더 진지하게 고려를 해봐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아이가 태어나고 시간이 지나면 이런 작은 앙금이 큰 문제로 비화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는 법이니까.
어쨌든 그 날도 둘은 어제과 마찬가지로 영화제를 즐겼다. 중간에 그들의 뒤를 쫓는 파파라치의 숫자가 갑자기 확 늘어나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은 아마도 갑자기 잡힌 기자회견에 대한 정보가 들어간 탓이리라.
그렇게 이틀째의 영화제 관람이 끝나고, 마침내 사흘째가 되었다.
“긴장 되는데.”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그냥 내 옆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돼.”
“…”
뭔가 역할이 바뀐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당장 드러난 신분만을 놓고 보면 그녀 쪽의 사회적 영향력이 더 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진짜 신분을 밝히면 그런 것도 역전이 되어 버리겠지만.
게다가 자신에게 다 맡기라고 하면서도, 잡은 손을 통해 그녀 역시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걱정 마. 도망가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훗.”
희망과 생명은 가볍게 웃더니, 문득 이렇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나야… 배우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못해서 인간 행세를 하고 있긴 하지만, 당신은 그냥 신이라는 사실을 밝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했거든.”
“음… 그건.”
처음에는 신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여파를 생각해서 스스로의 신분을 숨기고 있었지만, 죽음의 천사라든가 이런 저런 일들이 벌어지면서 그런 식의 명분도 빛이 바랜 것이 사실이다. 앙그릴을 비롯한 다른 세계에서는 거침없이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밝혀왔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지구에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행동은 살짝 위화감이 있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이쪽 사람들은 신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면 뭔가 사기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고. 어차피 이것도 변명이겠지만.”
“뭐야 그게.”
“그러게 말이야.”
그렇게 잠깐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잔뜩 긴장한 사람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왔다.
“가자.”
“응.”
둘은 손을 꼭 잡은 채 기자 회견장에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손을 꼭 잡은 채 모습을 드러내자 마치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엄청난 규모의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나름대로 미라지 코어에서 이런 저런 발표를 하며 이런 광경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막상 이렇게 기자들 앞에 함께 서게 되니 다시금 긴장이 된다.
일단 자리에 나란히 앉는 일이 끝나자 희망과 생명은 마이크를 손에 들고 간단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간단하게 요점만 말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기자들의 분위기는 순간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하게 바뀌었다. 혹시라도 그녀의 말을 제대로 전해 듣지 못할 까봐 집중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어쩐지 무섭게 느껴질 정도다.
“저희들,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렇지 않아도 혹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소문이 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희망과 생명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겨, 결혼이라고요? 그럼 배우자는?”
발언권조차 받지 않고 누군가가 외친 말이었지만, 희망과 생명은 선선히 대답했다.
“당연히 여기 있는 이 사람이죠.”
그러자 곧바로 기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질문을 받아달라며 손을 들었고, 희망과 생명이 그들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하자 바로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죄송하지만 옆에 계신 분은 이전까지 모습을 뵌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신분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희망과 생명은 자연스럽게 형진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미라지 코어의 기술 지원 이사를 맡고 있는 벨 크라드입니다.”
이 이름은 형진이 엘 파르드 왕국의 왕으로서 사용하는 공식 명칭인 벨크라드진에서 한 글자만 뗀 것이다. 처음 듣는 사람은 그런가보다 해도, 형진의 정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번에 알아챌 수 있는 그런 이름인 셈이다.
하지만 기자들은 이름 자체보다 미라지 코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인 미라지 코어와 헐리웃의 여신이라 칭송되는 엘피스 에스페란토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화제의 대상이었다. 바로 그 진실이 지금 이 순간 밝혀진 것이다.
형진이 이름을 밝히자, 기자들은 다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질문을 받아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희망과 생명은 마이크를 다시 받아들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의 결혼에 대해서는 이후에 서면으로 자세한 사항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이런 일이 있다는 정도만 말씀드리려는 의도입니다. 양해바랍니다.”
“잠깐만요!”
“그럼, 저희는 이만!”
“한 가지만 더요! 제발!”
기자들은 악을 쓰며 그렇게 질문을 받아달라고 외쳤지만, 희망과 생명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형진과 함께 기자회견장을 빠져 나왔다.
“저대로 놔둬도 괜찮아?”
“괜찮아. 해달라는 대로 다 받아주면 밤을 새도 빠져 나오지 못할 테니까.”
“하긴.”
그들은 기자 회견장을 빠져 나오는 즉시 부양형 자동차에 올랐다. 그들이 부양형 자동차에 오르자 카메라를 가진 기자들 백여 명이 비행형 퍼스널 모빌리티로 추격을 시작했지만, 고도를 높여 가속하자 순식간에 따돌려지고 말았다.
“이제 결혼 허가증을 받을 차례인가.”
“맞아. 그리고 내일 바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야.”
“어디서?”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뭔가 상당히 급하기는 하지만, 나름 준비를 해둔 모양이니 그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하객들은?”
자신도 그렇고 희망과 생명 역시 부를 만한 친지들이 별로 없다.
“일단 여기저기 알리긴 했지만 오든 말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이니까.”
“하하…”
희망과 생명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사실 어제 결정이 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급히 연락을 돌리고 하객들을 데리고 오는 작전이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어제 영화를 관람하며 보낸 하루라는 시간은 희망과 생명이 그 동안 이 세계에서 만나 친해진 사람들을 결혼식장으로 데리고 오기 위한 최소한의 유예기간이었던 셈이다.
“할 수 없군. 잠시만 기다려봐.”
형진은 곧바로 허세와 망상에게 연락을 취해 얼마 뒤 열릴 모터쇼에 출품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부양형 자동차 백여대를 긴급하게 공수해왔다.
“이거면 하객들을 데리고 오는데 도움이 될 거야.”
“모두 좋아할 거야! 그렇지! 기왕이면 이걸 활용하는 편이 좋겠어. 조금 계획을 바꿔볼 생각인데, 괜찮겠지?”
“원하는 대로 해.”
“고마워!”
미리 준비를 해둔 덕분인지 관청에 들러 결혼 허가증을 받는 일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이제 결혼식을 치르고 결혼 증명서를 발급받으면 법적으로 그들은 완벽한 부부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가 다시 지나고 마침내 결혼식 날이 되었다. 그야말로 벼락에 콩을 구워먹는 듯한 기세라고나 할까. 전격적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경우도 찾기 어려울 것 같다.
결혼식이 열릴 거라고 알려진 산타모니카 해변은 아침부터 각지에서 몰려든 취재진들과 관광객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정말 여기서 열리는 것이 맞아?”
“맞을 걸. 저길 봐. 무대 꾸며 놓은 거.”
“하지만 이상한데, 저기는 원래 초청받은 하객들이 앉는 자리 아니야? 저렇게 아무나 가서 막 앉는데도 통제를 안하다니 뭔가 이상해.”
“그렇긴 한데…”
“혹시 진짜 결혼식은 다른 곳에서 올리고, 여기서는 그냥 중계 방송만 한다는가 하는 건 아니겠지?”
“음…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데.”
그렇게 기자들과 관광객들이 긴가민가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잔잔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앗!”
“저기다!”
“맙소사! 저게 몇 대야!”
사람들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하늘 위로부터 천천히 내려오는 백 여대의 부양형 자동차를 보고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이번 결혼식이 벌어지는 진짜 장소가 어딘지를!
“맙소사!”
“진짜 예식장은 하늘 위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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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