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71
00771 175. 개변 =========================
상담을 한다는 것이 어째 상처만 들쑤신 꼴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에만 몰두해서 당신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형진이 얼른 그렇게 사과하자, 포트니아 테론은 빙긋 웃었다.
“자네의 그런 점이 나와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네.”
“네? 무슨…”
“이미 많이 봐왔으니 자네도 알겠지만, 신이라 해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니야. 하지만 신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고.”
“…”
“잘못은 누구나 하게 마련이지. 나는, 그리고 나의 아이들은 어째서 그 단순한 이치를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직접적인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포트니아 테론과의 대화는 다시금 형진에게 여러 가지 생각할만한 것들을 안겨 주었다. 이름값을 못하는 다른 신들에 비하면, 역시 포트니아 테론은 뭐가 달라도 다른 존재였다.
“가끔은 왕성에 와서 아이들과도 함께 지내보시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여기서 아이들이란 중의적인 표현이다. 단순하게는 형진 자신의 아이들을 뜻하는 것이겠지만, 다르게는 그 안에서 함께 하고 있는 여러 신들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포트니아 테론은 형진의 말에 담긴 그와 같은 의미를 이해하고는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글쎄. 이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기는 역시 좀…”
그런 포트니아 테론의 모습에 형진은 씩 웃었다.
“잘못은 누구나 하게 마련이죠. 중요한 건 그것을 바로잡아 가기 위한 용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포트니아 테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에겐 못 당하겠군.”
“그건 제 뜻에 따라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지금 당장은 좀 그렇고… 조만간 한 번 찾아가 보도록 하겠네.”
“얼마 뒤에 제 딸들의 재롱 잔치가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그 때 방문해 주시면 더 좋겠군요.”
“이 사람, 아주 작정했군.”
“제가 원래 좀 끈질깁니다.”
결국 포트니아 테론은 항복을 선언하고 조만간 왕성을 찾기로 정했다.
원했던 조언을 듣지는 못했지만, 포트니아 테론이 더 이상 어두운 심연 속에서 혼자 고독하게 지내는 일을 막아낸 것에 만족하며 왕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공간을 넘는 순간 앞서와는 달리 왕성은 조금 떠들썩하게 변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지나가는 요정에게 묻자, 화들짝 놀란 요정이 얼른 형진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마란님에게 아이가 생겼다고…
“그래? 그거 잘 됐군.”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경사가 늘었다.
오귀스트와 하마란은 그동안 아이를 가지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노력했다. 사실 아직 결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터라 그렇게 조급해 할 이유는 없었지만, 형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예가 바로 눈앞에 있는 탓에 그렇게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모양인지, 마침내 오늘 유아의 뒷바라지를 위해 왕성에 상주하고 있던 사제로부터 임신을 확인 받은 것이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폐하의 덕분입니다. 하하하하.”
그동안 알게 모르게 압박을 받아왔던 오귀스트는 오랜만에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젊고 건강한 하마란에 비해, 아무래도 나이가 조금 있는 오귀스트 쪽이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일. 그래서 하마란의 임신이 확인되자 오귀스트는 마음의 짐을 벗은 기색이 역력했다.
“다행이군요. 그럼 앞으로 영단은 필요 없는 겁니까.”
“커흠. 그, 그건 좀.”
“농담입니다. 하하하.”
“하, 하하… 하하하…”
농담이라고 건네긴 했지만, 오귀스트로서는 전혀 농담 같지 않았는지 식은땀을 삐질 흘리고 있었다.
식구가 늘어간다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때로 그것은 몇몇 사람들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후…”
할은 이전부터 왕성 안에 남은 유일한 노총각이었다. 본래부터도 현실의 여자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쪽이었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 왕성은 너무나 위험한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간만 나면 반려와 아이들을 데리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형진은 물론이고, 그나마 조용한 삶을 보내는 듯한 싶었던 오귀스트와 하마란 마저도 이제 아이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쳇… 부럽지 않아. 부럽지 않다고!”
게다가 오늘은 하마란의 임신 소식과 더불어 동생이 마침내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버티고 있던 탁스 두겐을 자빠뜨렸다는 소식마저 전해졌다. 따로 결혼식을 치르지 않는 타나토스의 풍습을 고려하면, 조만간 둘은 살림을 합치면서 공식적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주위에 알릴 공산이 크다. 탁스 두겐이 옮길지, 할의 여동생인 힐 데 마그가 옮길지는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라야바르트의 수도는 물론이고 힐 데 마그가 지키고 있는 헤트라 역시 중요한 지역이라 어떤 식으로 결정이 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그 날은 하마란의 임신을 축하하며 잔치를 벌였다. 할은 잔치가 벌어지는 내내 투덜거리는 모습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즐거운 기분으로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기뻐했다.
“그렇습니까. 오귀스트님도 드디어 아버지가 되는 건가요. 정말 잘 된 일입니다.”
역시나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한 프리츠 베커 역시 그 얘기를 전해 듣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나면 가끔 찾아가서 새내기 아버지로서 준비해야 할 것들에 대해 얘기를 좀 해주도록 해.”
형진의 말에 프리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거라면 저보다 마스터가 더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두 아이를 기르는 것만으로도 정신없는 판에, 열이 넘어가는 아이들을 기르고 있는 형진의 모습에서 프리츠는 신이란 이런 것이라는 느낌마저 받고 있을 정도다.
“내 아이들은 흑요호들이잖아. 인간과는 태어나는 방법부터가 다르다고. 유아의 아이는 태어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고.”
“아하, 그런 문제를 말씀하시는 거였군요. 이해했습니다.”
물론 왕성에는 출산에 대한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사제들이 대기중이지만,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대해 조언을 해주거나 상담을 들어줄 만한 이는 달리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로부터 좋은 아버지라는 평을 듣고 있는 형진조차도 아직 육아 일 년차조차 되지 않은 풋내기가 아닌가.
어쨌든 그런 식으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현재 형진이 고민하고 있던 부분에 대한 얘기 역시 프리츠에게 털어놓게 되었다.
“흠… 글쎄요. 저 역시 아직 이런 문제에 대해 누군가에게 충고할 정도로 연륜이 쌓인 건 아닙니다만, 한 가지 정도는 말씀드릴 만한 것이 있는 듯 싶습니다.”
“그게 뭔가.”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어긋나버리는 경우가 의외로 세상에는 꽤 많습니다. 흔히 나쁜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들도, 얘기를 듣다보면 자기들 나름대로는 그것이 자식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하긴, 맞는 말이야.”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런 문제가 생기는 근본적인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아이를 내려다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내려다본다…”
“아직 어리니까,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까, 아직 생각이 모자라니까… 이런 식으로 동등한 인격체라는 것을 은연중에 무시하고 그들의 일을 전부 자신이 결정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음…”
일리 있는 얘기다. 하지만 형진은 그런 프리츠의 말에 이렇게 반문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고, 아직 생각이 모자르는 건 분명한 사실이야.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는 일 아닐까.”
그 말에 프리츠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부정할 필요는 없죠. 다만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자신 역시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고, 아직 생각이 모자르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아이들을 보는 그러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점을 잊어선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어리다든가, 경험이 부족하다든가, 생각이 모자르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는 다른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아주 근소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것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 자체가 가소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얘기죠.”
프리츠는 다시 말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가끔씩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린다든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을 바로잡아 주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기른다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부모로서의 자신을 기른다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죠. 서로 배운다고 해야 하나…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그래. 그렇군. 무슨 말인지 알겠어.”
프리츠와의 대화는 거기서 끝을 맺었다. 하지만 형진은 그가 물러가고 나서도 한 동안 그가 던진 화두에 대해 생각했다.
이것은 단순히 부모 자식 간에게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었다. 조금만 내용을 바꾸면 신과 인간의 관계에도 훌륭하게 적용될 수 있는 화두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형진이 아버지라는 화두에 매달리게 된 것도 결국 이런 식의 의미 확장이 가능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에게 있어 아버지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도 같은 존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점차 몸과 머리가 커지고 정신이 확장되어 가면서 그런 절대적인 부분이 퇴색하게 되게 마련이다.
형진이 신이라는 존재와 처음 마주쳤을 때, 가장 놀랬던 것은 신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미숙한 그들의 정신이었다. 신이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함께 연상되는 완전무결함과는 여러모로 다른 그들의 모습에 알게 모르게 실망을 하고 얕잡아 봤던 것도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그가 신들과 마주치며 그들에게 빨대를 꼽았던 과정 자체가 전부 그런 식이었다.
자신이 이번에 있었던 일로 고민하는 이유도 결국 그런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다. 자신이 신들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그러한 기분을, 다른 인간들이 자신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것에 대해 그는 은연중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리츠와의 대화를 통해 그는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신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 역시, 결국은 여전히 성장해 가고 있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 신의 힘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 때문이다. 인간은 신들에게 있어 거울과도 같은 존재인 셈이다. 부모가 아이를 통해 자신의 미숙함을 깨닫듯, 인간의 미숙함 또한 신이 스스로의 미숙함을 깨닫고 성장하기 위한 발판인 셈이다. 부모의 권위란 결국 아이에게 있어 닮고 싶은 부모가 되었을 때 생기는 것처럼, 인간의 신앙이라는 것도 결국 같은 원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을 기른다는 것은, 부모로서의 자신을 기르는 일이라고 했던가.
“그런 것이었나.”
형진은 마침내 이제껏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무언가의 실마리를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밤이라는 신격을 얻고 난 뒤로 그는 자신의 신격이 지닌 진정한 의미에 대해 따로 고찰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생긴 신격이 지닌 의미를 어떻게 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고민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쩐지 조금 알 것만 같았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식의 신격이 생긴 것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은 어렴풋할 뿐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손에 쥐기 위해서는 더 많은 생각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이건…”
보고를 하러 왔던 제랄딘은 형진이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그가 일반적이지 않은 상태에 들어선 것을 그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랄딘, 아니 공포와 죽음은 급히 다른 이들을 불러 주위를 차단하고 그의 사색이 방해 받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하루, 이틀. 형진은 시간이라는 것의 존재조차 잊은 것처럼 사색을 이어갔다. 그가 움직이고 있던 모든 아바타들 역시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가 눈을 뜬 것은, 그렇게 사색에 들어서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