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72
00772 176. 탄생 =========================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자신의 주위를 은은하게 감싸고 있는 결계였다. 사색이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펼쳐진 그 결계들은 각각 다른 속성을 막아낼 수 있도록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모든 결계들이 하나처럼 합쳐진 채 무지개와 비슷한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잠깐 생각에 잠긴 것 뿐인데, 어느새 시간이 꽤 지나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스스로의 사색에 몰입하는 바람에,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나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들 가운데 일부는 불멸의 삶을 지닌 신이지만, 나머지 일부는 그렇지 않다. 시간이라는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필멸자의 신분인 것이다.
“휴…”
그래서 얼른 시간을 확인해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대로 시간이 꽤 지나있긴 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대략 한 달 가량에 불과한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도하던 것도 잠시. 형진은 자신이 깨어난 시간대가 무언가의 예정일과 겹친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아차.”
다급하게 결계를 벗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왕성 전체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폐하?
-앗! 폐하! 깨어나셨군요!
그의 모습을 발견한 요정들이 호들갑스러운 모습으로 인사를 한다. 하지만 형진은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얼른 질문을 던졌다.
“유아는?”
그를 허겁지겁 결계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유아의 출산 예정일이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 날짜가 다가옴을 깨닫고 이렇게 깨어나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자 요정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저쪽의 안채에 계십니다. 기다리고 있으실 테니, 얼른 가보세요.
-축하드립니다. 폐하!
뒤이어 뭐라 뭐라 하는 것 같았지만, 마음이 급했던 형진은 허겁지겁 요정들이 가리킨 안채를 향해 달려갔다.
“오빠?”
깨끗하게 세탁된 수건을 한 아름 안고 달려가던 카트린이 그런 그를 발견했다.
“어, 카트린. 어느 쪽이지?”
그 말에 카트린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마침 잘 됐네요. 이것 좀 들어주세요.”
“…”
카트린은 안고 가던 수건들을 그에게 떠안기더니 퍼스널 모빌리티를 활성화시켰다.
“급하시죠? 빨리 가도록 해요.”
“그래.”
수건을 잔뜩 안은 채 그야말로 날아가 버리는 카트린을 따라 안채로 들어갔다. 그러자, 응접실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빠아!”
“헛! 폐하?”
“못 말려. 그 동안은 꿈쩍도 않더니 때 되니까 알아서 깨어나시네.”
“누가 바보 아빠 아니랄까봐. 쿡쿡.”
메이드복 차림의 아란에게 수건을 건네기가 무섭게 형진이 물었다.
“유아는?”
그러자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고 있던 미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안내할게요.”
“엄마! 나도!”
“나도 애기 볼래요!”
“안 돼. 일단은 아빠부터. 알았지?”
“히잉…”
아기 공주들은 오랜만에 보는 아빠에게 몰려든 채로 떼를 쓰려다가, 미엘의 엄한 표정을 보고는 찔끔하며 물러선다.
“미안하지만, 여기선 엄마 말대로 하자. 알겠지?”
“네에…”
평소 같으면 달라붙어서 떼를 쓸 법도 한데, 오늘따라 아기 공주들은 얌전하게 형진의 말에 따랐다. 오랜 만에 보는 아빠의 모습이 낯설어서일까. 아니, 낯설기보다는 뭔가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어떤 느낌을 받은 것 같은 모습이다.
어쨌든 형진은 미엘의 뒤를 따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좋은 결과를 얻으신 것 같아서 기쁘네요.”
“그래 보여?”
“네. 여러모로 축하해요.”
“고마워.”
미엘과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마침내 문 앞에 섰다.
“긴장되세요?”
“그, 그게… 조금 그러네.”
“쿡쿡.”
미엘은 재미있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정기나 기운에 민감한 그녀는 안채 응접실에 들어서는 그를 보는 순간 화들짝 놀랐었다. 그것은 아기 공주들도 마찬가지. 예전 같으면 형진을 보자 마자 찰싹찰싹 달라붙었을 아이들이 차마 그러지 못하고 주위에 모여들기만 한 것 역시 이유다.
하지만 그런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앞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미엘은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의 반려이며 아이들 아빠라는 사실은 변함없음이 그 모습을 통해 비춰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가요.”
“응.”
미엘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주위를 감싸고 있던 결계들이 느껴짐과 동시에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들에게로 쏟아진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못 말려.”
유아의 머리맡에 서서 축복을 내려주고 있던 희망과 생명은 형진의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그렇게 투덜거렸고,
“축하해요. 진님. 씩씩한 왕자님이세요.”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축복을 내리고 있던 보호와 균형은 방긋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축하해.”
공포와 죽음 역시, 아이에게 조금 물러선 채로 부정한 것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그렇게 말을 건넸다.
사실 세 여신은 형진이 결계 밖으로 나온 시점에서 그가 깨어났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은 것은 유아를 위해서였다. 내색하지는 않고 있어도 형진이 깨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출산이라는 일생일대의 일을 치러야하는 것 때문에 다소 의기소침해 있었던 그녀를 위한 깜짝 선물이라고나 할까.
형진은 세 여신들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이 에워싸고 있는 한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땀에 젖은 채 살짝 부어오른 얼굴로 유아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의 그 빈약한 가슴이 아니라, 터질듯한 가슴을 포대기에 감싸인 아이가 물고 있었다.
“기, 기척이라도 좀 하시지.”
유아는 부은 얼굴이라든가 산발이 된 머리카락, 그리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 같은 것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면서도 기쁘고 자랑스러워 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형진의 눈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은, 이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마도 그녀를 만난 이후로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미안. 늦어서.”
형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유아는 살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오히려 딱 맞게 오셨는걸요.”
“그래?”
“네. 그래요.”
사실 내심 출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 끝났으니 망정이지, 그 아비규환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유아로서는 역시 꺼려지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다가가도 좋을지 안절부절하며 그렇게 말하는 형진의 모습에, 희망과 생명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한 마디 툭 건넸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지 말고 안아주고 싶으면 안아줘. 너 답지 않게 뭐하는 거야?”
“미, 미안.”
“쿡쿡쿡.”
지켜보던 이들이 형진의 그런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이없다든가 하는 식의 웃음이 아니라,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행복의 표출이었다.
희망과 생명에게 한 소리를 들은 형진은 조심스럽게 산모와 아이의 옆으로 다가갔고 먼저 유아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리고 멈칫거리며 눈을 감은 채 젖을 빨고 있는 아이에게로 손을 가져가다가 무언가가 생각 났는지 흠칫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저기… 소독 안 해도 될까?”
그러자 이제야 그걸 떠올린 거냐는 듯이 공포와 죽음이 답했다.
“그거라면 방에 들어오는 순간 이미 조치를 취했어.”
“아…”
방을 에워싸고 있던 결계가 그런 용도였나. 하긴 지금 모여 있는 세 여신의 힘이라면 살균 소독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좋은 약보다도 이로운 효과를 산모와 아이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괜찮다는 말을 들은 형진은 그제서야 가만히 손을 아기에게로 가져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아기가 손을 뻗어 그의 손가락을 콱 움켜쥔 것이다!
“봐, 봤어?”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묻자, 희망과 생명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봤어. 누구 아이 아니랄까봐 역시 남다르네.”
“하하하…”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은 쭈글쭈글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와의 첫 스킨십은 형진에게 큰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희망과 생명은 잠시 형진이 그렇게 감동에 젖어 있도록 놔뒀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그의 행동에 유아가 부끄러워하며 난처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하자,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그나저나 일은 잘 된 거야?”
“응? 무슨 일?”
“먹지도 자지도 않고 뭔가 생각하던 일.”
“아, 그거… 그럭저럭.”
“…”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듯한 형진의 태도에 희망과 생명은 쌍심지를 치켜 올렸다. 누구는 혹시나 탈이라도 날까 싶어 안절부절 못하며 지켜봤건만, 당사자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말하고 있으니 속에서 욱하고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결혼식 이후 맞이한 꿀같은 신혼도 내팽개치고 그런 식으로 자기만의 사색에 잠겨버린 형진에 대한 야속함이 더 맞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에 자기 혼자 화를 내고 뛰쳐나간다든가 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닌지라 희망과 생명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다시 물었다.
“그렇게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고. 딱 봐도 뭔가 얻은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확실하게 말해 달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말 해야 해?”
“어, 음. 미안.”
어쩐지 깨어나고 나서 계속 사과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형진은 일단 유아의 수발을 들고 있던 사제들과 요정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들은 조심스럽게 예를 취하고는 조용히 방에서 물러났다.
형진이 사람들을 물리자, 미엘 역시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다. 신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이에게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미엘은 있어도 돼.”
하지만 형진은 방을 나가려는 미엘을 불러 세운 뒤,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뭐… 다른 이들이 들어도 상관은 없는데, 요정들이 듣게 되면 아무래도 호들갑스러운 녀석들의 특성상 동네방네 전부 소문내고 다닐 것 같아서.”
“하긴, 그렇겠네요.”
미엘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방문을 닫았다.
확실히 요정들이 형진의 말을 듣는다면,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모든 요정들이 그 내용을 전해듣게 될 것이다.
“그래서, 뭘 얻은 거지?”
공포와 죽음의 무뚝뚝한 질문에 뒤이어 보호와 균형도 물었다.
“혹시, 새로운 신격을 얻은 건가요?”
형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자 희망과 생명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라고? 그럼 뭘 얻었다는 거야.”
형진은 그 말에 이렇게 답했다.
“신격의 확장.”
역시나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대답,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신격의 확장이라고요?”
“말도 안 돼. 밤은 원래부터도 엄청나게 포괄적인 신격이라고. 그런데 거기서 더 확장?”
“도대체… 너란 존재는…”
세 여신이 그렇게 놀람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자, 젖을 물고 있던 아기가 투정을 부리듯 고개를 흔들어 댔다. 유아가 허겁지겁 아이를 다독이자, 세 여신은 얼른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사과했다.
“미,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해요. 아이는 괜찮아요?”
“네. 놀란 건 아니고 그냥 좀 언짢았던 모양이에요.”
“이 녀석, 물건이네.”
“하긴 누구 아들인데.”
“그 와중에도 자랑이냐.”
잠시의 소란이 가라앉자, 공포와 죽음이 다시 조용히 질문했다.
“신격이 바뀌거나 한 건 아니고?”
형진이 사색에 들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봤던 이들은 대부분 그가 새로운 신격을 얻어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신격을 갖춘 완전한 신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뜻밖에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격의 확장. 이건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다.
“응. 그건 아니야. 문자 그대로 신격의 확장일 뿐.”
신격의 확장이라는 현상에 대해서는 여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뭐라 해도 물벼룩과 클로렐라라는 예를 눈앞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확장된 건데?”
조바심 나는 표정으로 희망과 생명이 묻자, 형진은 이렇게 답했다.
============================ 작품 후기 ============================
“그런데 배고프지 않아? 일단 뭐좀 먹고 얘기하자.”
네, 그런 고로 식사하러 이만.
늦잠자는 바람에 아침도 못 먹고 썼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