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95
00795 182. 회합 =========================
각국의 대표자로 이 자리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이들에게는 무언가를 결정할 권한 따위는 전혀 없었다. 애초에 이들이 뽑힌 이유부터가 무엇인가. 초대한 이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 정도의 격을 갖추었으면서도, 설령 일이 잘못되어 해를 입어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만한 이를 골라 보낸 것 아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을 여기서 드러내놓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이에 대한 증오가 사무친 탓에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그들에게 분노가 떨어지도록 유도하려는 심산이 아니고서야.
“죄송합니다만, 저희들은 그런 일을 결정할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 점, 유념해 주십시오.”
한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그렇게 외쳤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 목에 칼이 떨어질지 몰라 바들바들 떨고 있던 이들은 화들짝 놀라며 그 말을 외친 자를 바라보았다.
미친 거 아닌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 알고 저런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자신들까지 걸고넘어진단 말인가!
하지만 막상 화를 내리라 생각했던 형진은 그 말을 외친 자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창백한 느낌의, 하얗다기 보다는 푸른빛이 살짝 도는 피부의 남자 아이다. 카트린이나 라만과 거의 비슷한 나이가 아닐까 싶은 느낌. 하지만 녀석의 눈동자에는 카트린이나 라만에게는 없는 빛이 서려 있었다. 굳이 비교를 하면, 크루그와 비슷한 쪽이다.
“재미있군.”
형진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그건…”
사실 이건 굳이 말로 알려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 대부분은 아무리 봐도 한 나라의 실권자라고 하기에는 관록이 부족한 모습이었으니까. 당장 형진의 수족 노릇을 하고 있는 라만조차도 겉모습은 애송이에 불과하다. 설마 앙그릴이라는 세계 전체가 어린 왕을 섬기는 것이 전통일리도 없고, 결국 우연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제어샤 형진이 처음에 이들을 보고 너무 예상대로라서 할 말이 없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는지 소년은 부끄러운 기색을 보였다.
“너희가 이전에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상관없다. 이제 나의 신물을 받은 이상, 너희들은 이전에 어떤 신분이었건 간에 내 앞에서 너희 나라의 이익을 대변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 그렇습니다.”
형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엎드려 있는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이 그 반지를 낀 순간, 그 어떤 존재도 내 허락 없이 너희들을 벌하거나 해를 끼칠 수 없다. 또한 내 허락이 없이는 그 반지를 너희들에게서 빼앗지도 못할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겠는가.”
“…”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반지를 받은 자들은 그것에 어떤 효과가 담겨져 있는지 면밀하게 확인의 과정을 거쳤으나, 그 안에 숨겨진 보호와 균형의 권능에 대한 단서는 털끝만큼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이 안겨다 주는 권능을 알았더라면, 이들에게 반지가 주어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제서야 참석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행운을 거머쥔 것인지 이해했다. 형진의 뜻을 저버리지만 않으면, 그들은 지금껏 자신들을 두렵게 만들었던 모든 위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형진은 또한 그들에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의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긴 채 나태하고 방만한 생활을 보내라는 얘기도 아니다. 너희들은 내 신물을 지닐 만한 가치가 있는지 끊임없이 시험 받을 것이다. 만약 내가 정한 기준에 모자란다고 생각다고 생각되면, 신물은 너희들을 떠나 새로운 주인을 찾게 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준엄한 당부를 들은 그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다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항상 잊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형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좋아. 그럼 하던 얘기를 계속하도록 하지.”
그는 우선 모두의 눈앞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그것은 위성 궤도에서의 관측을 통해 측량된 앙그릴이라는 이름의 행성이었다.
“이것은 너희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실제 모습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다소 생소할지도 모르겠군.”
떨거지 취급을 받기는 해도 각국에서 최고 권력자의 가계에 속한 이들이다 보니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둥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애초에 대항해시대라는 것 자체가 이런 식의 측량 기술이 전제되지 않고는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보는 건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괜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잇는 것이 아니다.
홀린 듯한 표정으로 머리 위에서 푸른빛이 은은하게 퍼트리며 아름다운 블랙오팔처럼 빛나고 있는 앙그릴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형진은 조금 더 그들의 시야를 확장시켰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들의 세상이 속한 항성계의 모습이다.”
곧바로 그들의 눈앞에는 오렌지 빛의 태양과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열 개의 행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문학자들이 밝혀낸 앙그릴 주변의 천체는 밤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다섯 개의 천체 정도가 고작이고, 외행성에 속하는 다섯 개의 행성은 아직 그들의 인지 범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너희들이 세상의 전부라 생각하던 앙그릴은 이렇게 작은 티끌에 불과한 것이다.”
“…”
“하지만, 이것조차도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시야가 다시 한 번 확장되었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수백 개의 별들이 흩어져 있는 산개 성단. 그 별의 집단 중에서 앙그릴의 태양은 아주 작은 반딧불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이 세상의 전부일까.”
그 산개 성단조차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다. 곧이어 나타난 것은 두 개의 팔을 가진 거대한 은하였고, 그 안에서는 성단 조차도 또한 티끌에 불과했다.
“이 거대한 은하조차도 우주 전체를 놓고 보면 또한 작은 티끌일 수밖에 없지.”
한 번 더 시야가 확대되자, 이번에는 알려진 우주 내에 존재하는 수천 개의 은하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쯤 되자 회합에 참석한 이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주가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들이 지니고 있던 인식의 한계가 산산이 부서져 버린 것이다.
“너희는 내가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앙그릴에 직접 손을 뻗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너희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앙그릴 따위, 우주 전부를 놓고 보면 티끌조차도 되지 못하는 아주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앞서 자신들에게 권한이 없다는 점을 토로했던 창백한 얼굴의 소년이 물었다.
“그렇다면, 신께서는 그런 하찮은 저희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형진은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반항적인 면이 도드라지기는 하지만, 차분하고 순종적인 라만과 대비되는 그런 특성이 또한 좋은 조화를 이룰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네 이름은?”
“페투스입니다. 고리냑의 페투스. 그것이 저의 이름입니다.”
“고리냑의 페투스. 좋은 이름이군.”
형진은 잔잔하게 웃으며 그의 질문에 답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은 간단하다. 너희들이, 너희가 속한 나라가, 그리고 그 나라들이 속한 이 앙그릴이라는 세계가 위대해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위대해진 앙그릴이, 이렇게 드넓은 우주에 그 위대함을 전파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너희들의 위대함을 통해 나의 의지가 이 우주 전체에 가득하기를 원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지구에서 각국 정상들에게 했던 말과 비슷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구에서와는 달리 앙그릴에서는 아직 생명의 존엄함 같은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그것은 어찌 보면 세계 대전과 같은 거대한 전란을 경험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굳이 형진은 그런 사상을 전파하려 들지 않았다.
물론 생명의 존엄함은 언제고 확립되어야 할만한 생각이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앙그릴에 사는 자들의 몫이다. 사상이란 문화와 함께 발전하는 것. 앙그릴에는 앙그릴 나름대로의 표현 방법이 있을 것이고, 그것의 성립은 가급적이면 인위적이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쪽이 좋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다소 돌려 말하기는 하였으되, 그들은 형진의 원대한 야망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저 하루 하루 무기력하게 삶을 이어가는 것이 고작이었던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거대한 세계관으로의 확장과 더불어, 그 모든 것을 이루어 가는데 자신들이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치 흠뻑 취해 버린 것처럼 경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희들이… 아니, 저희들에게…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한껏 반항적인 눈빛을 반짝이던 페투스조차도 이것만큼은 감당할 수 없었는지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본래는 저희들이 과연 위대해질 수 있겠느냐고 물으려다가 급히 고쳐 말하긴 했지만, 형진은 어렵지 않게 그 속뜻을 읽었다.
“신물의 주인으로 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아…”
그제서야 참석자들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반지를 끼는 일 자체가 두려움을 자아내는 일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자신들을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위치로 끌어올려줄 증거물이 되었다.
형진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나는 우선 내 말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한 가지 일을 해보일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손을 내저어 보이자 다시 앙그릴의 모습이 참석자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앙그릴에는 두 개의 달이 있다.”
물론 달이라고는 해도 지구의 달처럼 크지 않다. 오히려 화성에 속한 포보스와 데이모스 같은 느낌의 작은 위성일 뿐이다. 사실 우주 전체로 놓고 보면 달은 지구의 크기에 비해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 위성이다.
“나는 이 두 개의 달을 나의 영역으로 삼을 것이다.”
형진이 손가락을 튕기자, 두 개의 달에 바다가 생기고 나무가 자라나며 아름다운 궁전이 만들어지는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나를 위한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너희들을 위한 것.”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참석자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너희들이 속한 나라를 대표해 나에게 그들의 뜻을 전하고, 또한 나의 의지를 그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권력이 될 것인지에 대해, 설마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없겠지?”
“…”
그러자 다시 페투스가 물었다.
“그렇다면, 이 회합장은 그때가 되기 전까지 임시로 사용하는 장소가 되는 겁니까.”
“이해가 빠르군. 그 말대로다.”
형진은 두 개의 달 가운데 큰 쪽을 가리켜 보이며 다시 말했다.
“진짜 회합장은 바로 이곳이 되는 거지.”
어떻게 보면 인질이나 유배 같은 일로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한정된 공간일지라도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그러한 점에 생각이 미치자, 지금까지 조개마냥 입을 다물고 있던 참석자들로부터 질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혹시 원하는 이와 함께 머무는 것도 가능합니까.”
“물론.”
“식량 같은 건 어떻게 되는 거죠? 설마 스스로 밭을 경작한다든가 해야 하는 건가요.”
“원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기본적으로 제공될 것이다. 물론 너희들이 신물의 주인으로서의 자격을 잃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은 자유롭게 행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너희들의 자유다. 다만 직무를 수행하는데 문제가 없어야 하겠지.”
참석자들의 눈빛은 이제 반짝반짝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처음 봤을 때 검게 죽어 있었던 눈빛은 어느 틈엔가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형진은 그런 그들의 눈을 찬찬히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너희들이 먼저 수행해야 할 과제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참석자들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신물의 주인으로서의 자격을 증명하는 과정임을 이해했다.
“일전의 순방을 겪고 나서, 각국에서 부양선의 개발을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순간 참석자들은 흠칫했다. 어떻게 보면 부양선의 개발은 그 자체로 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쉬쉬하며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형진은 이미 그것에 대한 내용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형진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자 그들 앞에 다리미판처럼 생긴 판때기 하나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분석하라. 기간은 한 달. 물론 너희들의 힘만으로 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너희들이 속한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그것에 담겨진 비밀을 풀어라. 그것이 내가 내주는 첫 번째 과제다.”
그가 참석자들에게 건넨 것은, 다름아닌 지구에서 시판중인 비행형 퍼스널 모빌리티였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해피 추석 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