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96
00796 182. 회합 =========================
“이것은…”
그저 모양만으로는 용도를 알기 어려운 탓에 참석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라만.”
“네.”
하지만 뒤이어 형진에 의해 호명된 라만이 그것을 사용하는 시범을 보이자,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제서야 이 물건이 지닌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라만은 꽤나 능숙한 모습으로 호버 보드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다른 참석자들과는 달리 라만은 카트린을 따라서 거짓된 천국에 자주 드나들었고, 그곳의 유저라면 누구나 손쉽게 얻어서 자유롭게 다루는 호버 보드 역시 제법 많이 타보았다. 물론 현실에서였다면 아무리 신들의 손을 거쳐 안전이 보장된 물건이라 해도 그렇게 자유롭게 즐길 수 없었겠지만, 그를 구속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거짓된 천국 안에서라면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호버 보드는 부양선에 필요한 원천 기술의 대부분이 집약된 물건이다. 물론 탑승자를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 이를테면 보호의 권능이나 황혼의 결계 같은 건 분석 자체가 불가능한 부분이지만, 호버 보드를 허공으로 띄우고 가속시키며 그것을 조종하기 위한 부분은 모두 마법으로 구현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것을 분석해서 비밀을 밝혀낸다는 것은 자체적으로 부양선을 제작할 능력을 얻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얘기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무언가를 띄워서 날아다니도록 만드는 것 뿐이고, 실질적으로 호버 보드가 부양선이라는 이름의 탈것으로 재창조되기 위해서는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결국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단순히 이것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어떻게 자신들 만의 양식으로 녹여내어 구현하는가가 되는 셈이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과제의 의미를 저마다의 시각으로 이해한 참석자들은 형진이 물러가라는 의사를 밝히자 허둥대기 시작했다.
“저기…”
“뭔가 문제라도?”
“이곳에서 받은 물건이… 현실에서도 유효한 것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급히 돌아가려던 그들은 이 회합장이라는 공간이 현실이 아님을 뒤늦게 깨달았던 모양이다.
형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이라면, 오늘 밤에 너희들 각자에게 배송될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말에 참석자들은 모두 기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성과를 내보이겠습니다.”
바로 건네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밤에 각자에게 따로 배송된다는 점이 그들을 더욱 기쁘게 만들고 있었지만 형진은 모른 척 했다.
“알았으니 이만 가봐.”
“네!”
참석자들이 회합장에서 물러나자, 끝까지 남아 있던 라만이 조심스럽게 형진에게 묻는다.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형진은 빙긋 웃으며 어린 황제에게 물었다.
“뭘 말인가.”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저들은 특별한 지지 기반이 없는 자들입니다. 호버 보드를 건네받는다 해도, 저들의 주도하에 연구를 진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라만은 그렇게 말하고는 형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거야, 각자가 하기 나름이지.”
그리고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답하는 형진의 모습을 보자 작게 탄식한다.
“역시… 과제는 저들의 국가만이 아닌 저들 역시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군요.”
“글쎄. 나는 무슨 얘긴지 모르겠군.”
형진은 알듯말듯한 표정을 짓고는 라만에게도 손을 내저어 보였다. 물론 그가 시치미를 떼고 있다는 것 정도는 라만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더 궁금한 것이 없다면 이만 물러가도록.”
“네.”
라만이 물러가자 형진 역시 회합장에서 나왔다.
“끝났어요?”
“대충.”
그럴 의향이 있었다면 라만에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감히 카트린을 넘보는 괘씸한 놈이긴 해도 앙그릴에서 자신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자이고, 그렇다면 보다 확실하게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는 편이 나은 일이니까.
하지만 형진은 라만과 단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현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유아와의 시간이 더 중요했다.
“자, 가볼까.”
“네.”
임신하고 난 뒤 유아는 본의 아니게 왕성에 유폐되다시피 갇혀 있어야만 했다. 물론 왕성은 그 자체로 그곳을 아는 모든 이가 다시 한 번 와보고 싶어 할 정도의 장소였지만, 다른 이들과는 달리 언제나 그곳에서만 있어야 한다는 건 무척이나 갑갑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 형진은 유아를 데리고 드라이브를 할 생각이다. 그것도 잠깐 바람 좀 쐬고 마는 식의 그런 드라이브가 아니다. 이른바 대륙 횡단 도로라고 불리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루트 66이 오늘 그녀와 함께 달릴 길이다.
루트 66은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를 연결하는 도로다. 최초의 대륙 횡단 고속도로였다가 1985년에 폐쇄되었으나, 2003년에 복원되어 현재는 미대륙을 관통하는 관광지로 조성되어 있는 상황. 참고로 모 게임에 등장하는 66번 국도 맵이 바로 이 도로의 배경이다.
산뜻한 느낌의 하얀 드레스를 입고 밀집 모자를 쓴 유아는 이미 한 아이를 낳은 어머니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순수하고 청초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이상해요?”
“아니.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떠올라서.”
“…”
형진의 말에 유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당시 그녀는 스스로 사제임을 숨기기 위해 괄괄한 여자 모험가를 연기했었다. 물론 중간에 죄다 들통 나서 형진에게 코가 꿰이는 신세가 되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런 때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날 정도다.
가벼운 파공성과 함께 부양 자동차가 천천히 떠오른다.
“이 길에는 별명이 있어.”
“어떤…”
“엄마의 길. 생명력을 지닌 젖줄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리곤 하지.”
“그런가요.”
유아는 엄마의 길이라는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드라이브라는 것을 하자고 해서 왜 그러나 싶었는데, 굳이 자신을 이 길로 데려온 이유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된 모양이다.
사실 루트 66의 별명은 그것만이 아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중심도로라는 의미의 메인 스트릿, 피 끓는 정열이 담겨 있다고 해서 블러디 66, 길 자체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곳이라는 의미의 더 루트. 어떤 것이든 간에 이 길의 역사적 중요성을 드러내 보이는 말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형진은 끝없이 펼쳐진 길을 달리며 생각에 잠겼다.
라만의 말대로, 참석자들에게 호버 보드를 건넨 것은 그들이 속한 국가뿐만 아니라 참석자들 개개인에 대한 과제이기도 했다. 아무런 기반이 없는 이들이지만, 형진이 그들에게 맡기 반지와 호버 보드는 단순하게 치부되고 말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권력이나 다름없으며 또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반지는 형진 이외의 다른 자들에 대한 위협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기존에 그들을 옭아매고 있던 여러 가지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반지에 새겨진 권능은 단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일 뿐, 누군가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버 보드의 존재가 중요하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조금 길고 널찍한 판때기에 불과한 물건. 하지만 분석하고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그들이 속한 국가의 미래를 바꿔놓을 수도 있는 중대한 물건이다. 그것의 소유권은 그 자체로 강력한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본래의 그들이라면 자신에게 쥐어진 호버 보드의 소유권을 지키는 것조차도 불가능했을 터. 하지만 그 자체로는 타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는 반지가 주어짐으로 인해 그들은 이 권력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얻게 된다.
그들이 얻게 될 방패는 그것만이 아니다.
회합에 참석한 이들이 그렇게 뽑혀서 나오게 된 이유가 무엇이던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 자들 때문에 권력자들이 겁을 집어 먹은 탓이 아니던가. 이제는 그 이유 자체가 그들을 보호하는 장치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형진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희생양에서, 그의 뜻을 전하는 사자로서의 역할을 부여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주어진다 해도 혼자서 기존에 자신을 억압하고 짓누르던 권력과 맞서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반지가 그들을 보호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무언가까지 함께 지켜줄 수는 없다. 이런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명목상의 과제를 수행함과 동시에 각각의 국가에서 지금까지 버려지는 돌 취급당했던 처지를 벗어나 자신만의 입지를 세울 수 있을까. 이것이야 말로 형진이 참석자 전원에게 내린 진정한 과제인 셈이다.
단순히 기술을 전하고자하는 것 뿐이라면 그저 각국의 주요 개발자들을 불러 모아 허세와 망상 밑에서 굴리기만 해도 된다. 하지만 형진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겉보기에는 똑같은 길이라도 루트 66처럼 미국이라는 나라의 색채가 고스란히 남겨진 곳이 존재하는 것처럼, 앙그릴에 존재하는 각 나라들이 부양선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기술을 저마다의 색채로 표현하기를 형진은 바라고 있었다.
형진이 원하는 것은 획일적인 디자인의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성냥곽 같은 형태의 그런 도시가 아니다. 각각의 문화와 사상이 녹아있는, 그래서 들어선 순간 자신이 어떤 곳에 와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마을이다. 그런 식의 마을이 이 우주를 가득 채우기를 그는 바라고 있었다.
“저건 고장난 건가요?”
그렇게 상념에 잠긴 채 차를 몰고 있자니, 옆자리에 앉은 유아가 길가에 세워져 있는 녹슨 소방차의 모습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묻는다.
“맞아. 하지만 누군가가 버리고 간 건 아니야. 이곳을 지나는 이들이 보고 과거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도록 일부러 저런 형태로 보존 해둔 거지.”
“이곳 사람들은 뭔가를 보존해 두는 걸 좋아하나 봐요.”
“이 나라 자체가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더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것인지도 몰라.”
“그렇군요.”
형진은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고는 길가에 놓여진 여러 가지 조형물들을 유아와 함께 느긋하게 감상했다. 버팔로의 동상이라든가, 1860년대의 통나무집 형태로 재현된 감옥의 모습이라든가, 앞서의 녹슨 자동차처럼 이 길을 달렸던 여러 가지 형태의 자동차, 그리고 당시 이곳을 지나던 이들이 쉬어가던 건물 같은 것을 돌아보며 그들은 계속해서 달렸다.
“이런 탈것이 많이 보급되지 않은 건가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걸까. 유아는 그렇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보았다.
“아직은. 하지만 조만간 대중에게도 보급이 될 거야.”
점심이 되자 둘은 산타페 근처에서 커다란 핫도그를 사서 나눠 먹었다. 빵도 크고 속에 들어찬 양념된 고기의 양도 엄청나다. 맛은 어쩐지 장조림 같은 느낌. 조금 느끼한 맛이라 형진이 타바스코를 뿌려대자 유아가 얼굴을 찌푸리며 그의 어깨를 때렸다.
“어쩐지 라야에서의 일이 떠오르네요.”
“노점상?”
“맞아요.”
유아는 그렇게 말하며 문득 입맛을 다셨다. 자신도 모르게 그때 먹었던 가락국수의 맛이 떠올라 버린 것이다.
“해줄까?”
형진의 말에 유아는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요?”
“물론,”
대답과 동시에 의자를 뒤로 젖히자 그 안에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겉으로 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비밀스러운 공간이다.
“이런 것도 가능한 건가요?”
“놀랍지?”
형진은 차를 사람들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에 멈춰 세우고는 다른 이들이 알아차릴 수 없도록 숨겼다. 그리고는 차량 뒤쪽에 만들어진 공간으로 넘어가 요리를 시작했다.
“으으음…”
시원하게 우려낸 육수의 냄새가 은은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유아는 주방 앞쪽의 탁자에 자리를 잡은 채 그렇게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형진은 그런 유아의 모습에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막 만들어서 따끈한 가락국수를 내놓았다.
“자, 드시지요. 아가씨.”
“잘 먹겠습니다!”
라야에서 음식을 만들 때와 비교해 보면 형진의 솜씨는 이미 한 단계 더 올라선 상태.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유아는 오랜만에 그의 눈앞에서 꽃밭을 거니는 듯한 리액션을 보여주었다. 어쩐지 그리칸에서 둘만의 생활을 막 시작할 때의 일이 떠올라서 형진도 크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형진이 그렇게 유아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앙그릴에서는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가 던진 불씨가 비로소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즐거운 추석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