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02
00802 184. 유람 =========================
성공하겠다고 대답한 뒤 물러나긴 했지만, 막상 방에서 빠져 나오고 보니 그저 막막할 뿐이다.
누군가를 때려잡는 일이라면 몰라도 느닷없이 별장을 구해 오라니. 애초에 즈라탈은 전투라면 몰라도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구한다든지 찾는다든지 하는 식의 역할을 맡는 것 자체를 해본 일이 없는 인물이다. 연필 깎으려고 청룡언월도를 꺼내든 격이라고나 할까.
그냥 다짜고짜 누군가를 찾아가 빼앗아 오기라도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 식의 일처리는 형진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 정도는 아무리 머리가 근육으로 똘똘 뭉친 즈라탈이라 해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이에게 구원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힐리에타. 있니?”
다행스럽게도 주시자끼리는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메신저가 제대로 작동한다. 형진은 신이 되면서 자신이 집행자로 활동할 때 불편함을 느꼈던 부분을 개선하는데 노력했고, 이런 메신저의 통신 범위 확대도 그런 부분 가운데 하나다. 물론 어디서나 다 되는 건 아니고, 이미 형진의 영향력 하에 들어와 있는 상태라 인공위성이 궤도 상에 설치된 세계에 한정된다.
“아빠?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갑자기.”
“그게 말이지…”
다행히 딸에게 연락이 닿자 즈라탈은 자신의 상황을 전했다. 하지만 힐리에타라고 해서 딱히 좋은 방법이 있을 리 없다. 그녀가 즈라탈보다는 낫다고 해도 결국은 도토리 키재기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차이가 이번에는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거기, 어디에요?”
“여기? 그, 글쎄.”
“불려가서 일을 맡았더라도 어딘지는 확인했어야죠.”
“미안.”
“어휴… 잠깐만요. 음… 정보창을 뒤져보면 어떤 세계인지 나와 있을지도 몰라요. 확인해 보세요.”
“알았어.”
즈라탈은 잠시 버벅대며 정보창을 확인해 본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있는 곳이 앙그릴이라는 세계의 중앙부에 위치한 카살 제르토나라는 도시임을 확인했다.
“앙그릴… 거기 예전에 가본 곳 아니에요?”
“그랬지.”
그제야 카트린과 크루그를 호위하기 위해 부양선을 타고 돌아다닌 기억을 떠올린다. 최근에는 감히 신의 뜻을 거스른 자들을 범하기 위해 임무를 수행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어도 별로 도움이 될만한 건 떠오르지 않는다. 부양선을 타고 다녔을 때는 물론이고, 임무를 수행하러 왔을 때도 필요한 목표만 챙겨서 후딱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잠시 머리를 맡대고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부녀는 문득 한 인물을 떠올렸다.
“맞다. 호위 임무 하러 갔을 때, 무슨 제국의 황제라는 녀석도 함께 아니었나요?”
“그랬지. 생각난다. 비리비리한 애송이 녀석.”
라만이 들었다면 너무 박한 평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노스페라투 입장에서 보면 지위를 제외하고는 자기 힘으로 숟가락은 들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연약해 보이는 애송이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 녀석이라면 이런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음… 그런가. 그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잠시만요. 물어볼게요.”
형진은 신경도 쓰지 않는 분위기지만, 힐리에타는 아직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목표가 너무나 강력해서 실제로는 얼굴 한번 마주치기도 대화를 나누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노력 가운데 하나는 바로 형진의 주변인과 친분을 두텁게 하는 것이었다. 본인이 아니면 그 주변부터 공략해 들어가는 것은 어떤 세계 어떤 인물에게도 통하는 만고불변의 공략법이 아니던가.
카트린은 힐리에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식의 목표에 가장 확실하게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형진의 여동생이니 경쟁자가 될 리도 없고, 만에 하나 일이 잘 되었을 경우에는 시누이가 될 인물이니 미리 친해진다고 해서 손해 볼 일도 없다. 더구나 순방 당시 카트린을 호위하기 위해 차출된 주시자들 가운데 여성은 손에 꼽을 정도라서, 남자라면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도 커다란 장점이었다.
“저… 황녀님. 계세요?”
“음? 힐리에타 언니? 무슨 일이세요?”
“실은 황녀님께 여쭈어 볼 것이 있어서…”
“그래요? 잠시만요. 하던 일이 있어서.”
“네. 물론이죠. 기다리겠습니다.”
“저기… 황녀라는 호칭은 그만 둬 주실래요? 전에도 카트린으로 불러달라고 부탁드렸던 것 같은데.”
“아, 죄송합니다.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깎듯한 힐리에타의 말에 카트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밀가루가 묻은 손을 씻은 뒤 모양을 뜬 쿠키들을 오븐에 집어넣었다.
“됐어요. 무슨 일이세요?”
“실은…”
힐리에타는 가급적 카트린이 이해하기 쉽도록 조심스럽게 자신들이 맡은 새로운 임무에 대해 설명했다. 영리한 카트린은 대략의 사정을 이해하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문제였군요. 오빠도 참. 알았어요. 그런 일이라면 라만이 도움이 될 거에요. 연결시켜 드릴까요?”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죠. 잠시만요.”
결국 형진이 즈라탈에게 내린 임무는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라만에게로 전해지게 되었다.
“별장… 말입니까? 카살 제르토나에?”
“네. 가능할까요?”
“자, 잠시만요.”
그렇지 않아도 느닷없이 형진이 돈 달라는 임무를 내리는 바람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라만이다. 즈라탈로부터 힐리에타와 카트린으로 이어지는 릴레이식 통화로 상황을 전해 듣고 다른 누구도 아닌 형진이 직접 부인과 함께 앙그릴을 찾은 것을 파악하자 그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거 참… 기왕이면 저희 제국으로 오시는 편이 나았을 텐데. 잠시만요.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자신의 나라라면 별장이 아니라 황실의 궁이라도 비워주었겠지만 형진이 있는 곳은 아운 제국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는 중립 지대다. 그렇지 않아도 동서 제국의 이권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소라 세계를 아우르는 패자라고 칭해지는 아운 제국이라도 쉽게 움직이기 어려운 그런 곳이라고나 할까.
“공교롭군요. 하필 그곳이라니.”
라만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대신들 역시 난처한 기색이 역력하다.
“방법이 있겠나?”
그러자 재무대신이 바로 답했다.
“별장을 구하는 것 정도라면 파견된 전권 대사에게 지시를 내리면 바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희들의 통신 체계로는 명령이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지라…”
“그거라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도 같군.”
라만은 재무대신의 말을 전했고, 그 얘기를 들은 즈라탈은 흔쾌히 명령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냥 서류를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 정도라면 문제없지.”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명령서를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아운 제국 황제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명령서가 작성되었고, 그것은 임무 시스템을 통해 즈라탈에게 전해졌다. 양방향 퀘스트 시스템은 집행자 때부터 있었던 것이고, 거짓된 천국을 통해 체계화 되어 주시자에게도 적용되어 있었다.
“이게…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거였군.”
“몰랐어요?”
“나야 뭐… 그냥 신께서 내리신 임무만 수행하는 쪽이었으니까.”
어쨌든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카살 제르토나에 주재하는 아운 제국의 전권 대사에게 전할 황제의 명령서는 물론이고, 전권 대사가 머물고 있는 대표부의 위치까지 덤으로 얻었으니 이 일은 이미 완수된 것이나 다름없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저도요.”
즈라탈과 힐리에타의 말에 카트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라만은 그들이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강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양치 않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대화가 끝나자, 즈라탈은 황제의 인장으로 봉인된 명령서를 들고 대표부를 향해 이동했다.
“후아암…”
아운 제국의 전권 대사가 머물고 있는 대표부는 고풍스러운 이층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적당히 따뜻한 햇살 아래 경비를 서고 있던 보초들은 노곤함을 느끼며 몰려드는 졸음을 쫓고 있다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한 인물을 보고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누, 누구?”
위압감 넘치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용암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빛나는 붉은 눈동자로 자신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그 모습에, 보초들은 방금 전까지의 노곤함 따위는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오금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어야만 했다.
“아운 제국의 전권 대사가 머물고 있는 장소가 이곳인가?”
“그, 그렇습니다만.”
즈라탈은 손에 들고 있던 명령서를 불쑥 그들에게 내밀어 보였다. 아무리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도, 보초들은 그것을 봉인하기 위한 밀랍 위에 찍혀진 문장을 보고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의 직인!”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람을 불러오도록 하겠… 아니,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고맙군.”
기다리라는 말에 즈라탈이 눈을 부라리자, 보초는 기겁을 하고는 얼른 그를 대표부 건물 안으로 맞이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아운 제국의 전권 대사에게 이 일을 알렸다.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카살 제르토나에 주재 중인 아운 제국의 전권 대사인…”
전권 대사는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외모와 위압감을 지닌 이 인물에게 자신의 소개를 하고자 했으나, 즈라탈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손에 쥐고 있던 명령서를 불쑥 내밀었다.
“읽어라.”
“화, 황제 폐하의 명령서를 받듭니다.”
마법적인 방법으로 확인해보니 황제의 직인이 틀림없다.
세계 최대의 무역항이라고까지 손꼽히는 카살 제르토나의 전권 대사로 뽑힐 정도면 정부 내에서도 외교로 상당히 잔뼈가 굵은 인물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이런 식으로 황제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를 직접 받아드는 일은 처음이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라면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을 터.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이 명령서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이 아운 제국의 명운이 걸린 중대한 사안이라는 뜻이라는 얘기가 된다.
과거, 아운 제국의 황제가 새장 안에 갇힌 어린 종마 정도의 역할에만 머물고 있었을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부양선을 타고 세계를 순방한 이후, 제국의 어린 황제가 갖는 위상은 절대 권력에 가까워졌고 실질적으로 내정과 외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나이가 어린 탓에 식견이나 경험이 부족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를 생각하면 누구도 이 어린 황제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황제가 직접 명령서를 내렸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카살 제르토나가 가지고 있는 입지를 떠올리자, 전권 대사는 절로 등에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혹시 이곳에서 전쟁이라도 일으킬 생각이신가. 황제가 느닷없이 그런 일을 추진할 리는 없으니, 밤의 신이라는 존재가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느닷없이 전쟁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명분을 만드는 일을 자신에게 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어느 쪽이 되었든, 이것은 대륙을 넘어 세계의 명운을 가를 만한 중대한 일임에 틀림 없다!
그렇게 순식간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수많은 생각들로 인해 혼란을 일으킨 상태로, 전권 대사는 조심스럽게 봉인을 해제하고는 황제의 명령서를 읽기 시작했다.
“…”
하지만 한껏 긴장된 마음으로 읽어 내린 그 명령서의 내용은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별장이라니. 가급적 품위와 격식이 충분하게 갖추어졌으면서도 너무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은, 부부가 안락한 시간을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곳으로 물색해보라는 말이 매우 엄중한 느낌의 문체로 적혀 있었다.
“가능하겠는가?”
잠시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신이 혹시 뭔가 빠뜨린 것은 없는지 명령서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던 전권 대사는 즈라탈의 위압감 넘치는 시선과 목소리에 정신이 화들짝 돌아왔다.
“네? 아… 무, 물론입니다. 기한은 언제까지…”
“당장.”
“네?”
“지금 당장!”
당장 별장을 내놓지 않으면 네놈의 목을 뽑아버리겠다는 식의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런 모습과 말투에 전권 대사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지리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지금 당장 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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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그럼 전 식사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