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03
00803 184. 유람 =========================
카살 제르토나는 과거 대륙 중부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다. 그래서 당시 황족들이 기거하던 황궁을 비롯해, 제국의 대귀족들이 살던 저택 역시 존재한다.
동서제국으로 갈라져 대치하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통일 제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황궁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있지만, 대귀족들이 살던 저택은 이후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며 카살 제르토나의 긴 역사와 문화를 증명하는 건축물로 자리잡고 있었다.
아운 제국의 전권 대사가 헐레벌떡 달려 나가 구해온 별장도 그런 식의 유래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정확히는 과거 이 도시에 살았던 대귀족이 아들 부부의 신혼을 위해 준비한 작은 별장이지만, 지금은 부유한 상인들의 휴식처겸 투자처로 남아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별장의 권리를 기록한 서류와 함께, 이곳에서 지내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신분을 증명한다는 아운 제국 대표부의 서류까지 함께 마련되어 즈라탈의 앞에 내밀어 졌다. 즈라탈이 뿜어내는 기세에 정신이 반쯤 나간 와중에도 이렇게 말하지도 않은 부분까지 철저하게 준비해서 대령하는 걸 보면, 역시 머나먼 땅에 전권 대사로 뽑혀 파견될 정도의 능력자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듯 하다.
“수고했다.”
즈라탈은 서류와 함께 별장의 위치를 기록한 약도등을 함께 챙기고는 그 말 한마디를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린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황제의 명령서를 전한 것 뿐이기는 해도 어쩐지 별장을 강탈한 것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적당히 보상으로 줄 만한 것이 없을까 하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즈라탈은 손에 끼고 있던 반지 하나를 꺼내어 전권 대사에게 건넸다.
“이건…”
“불의 정이 담겨져 있는 반지다. 끼고 있으면 어지간한 불에는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고, 또한 원한다면 사람 하나 정도는 순식간에 한줌 재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지. 별 것 아니지만, 쓰기에 따라서는 큰 힘이 될 것이다. 훌륭한 일처리에 대한 간단한 성의 표시이니 받도록.”
“헉!”
전권 대사는 별 것 아니라는 듯한 그 말을 듣는 순간 헛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의 아티펙트라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남자가 누구이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물건을 선뜻 건넨단 말인가.
정말 받아도 되는 건가 싶어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즈라탈은 억지로 전권 대사의 손에 반지를 남겨 주고는 순간 허깨비처럼 훅 하고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
전권 대사 역시 마법 문명이 발달한 세계의 사람답게 간단한 마법 정도는 사용할 줄 알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아무런 기척 없이 사라지는 즈라탈의 모습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 틈엔가 즈라탈이 남겨준, 마치 그의 눈빛을 연상시키는 듯한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가 남아있었다.
적당히, 그냥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인사치레라면 또 모른다. 하지만 이건 그런 식으로 모른 척 받아들일 수 없는 물건이었다.
“어쩌지…”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던 전권 대사는 자신이 겪은 일을 황제께 아뢰는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아운 제국의 통신 체계라면 황제가 받아보는데 사흘은 족히 걸리겠지만, 그래도 명령서를 받아 그것을 수행했으니 경과에 대한 보고를 즉시 올릴 필요가 있었고, 반지에 대한 것도 문의를 해야만 한다.
자기 나름대로 보상을 한답시고 또다시 전권 대사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준 즈라탈은 콧노래를 부르며 형진과 유아가 머물고 있는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이미 즈라탈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있던 형진은 문을 두드리기가 무섭게 그를 안으로 들였다.
“별장은?”
“여기 있습니다.”
“…”
확인해 보니 몇 가지 서류와 약도가 곁들여져 있었다. 최근 개발된 문서 번역 모듈을 실행시키자 대충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수고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꽤 일을 잘 처리했군.”
“아닙니다. 신께서 명하신 일인데 어찌 어설프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훗.”
사실 즈라탈의 능력만 놓고 보면 이번 일을 그에게 맡긴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지명한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형진 자신이 아바타를 여럿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해도, 세계가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돌아봐야 하는 부분이 많아진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주시자도 단순한 무력 단체를 넘어선 역할의 확장이 필요하게 된다. 즈라탈을 시험한 것은 과연 그가 이런 역할을 맡는데 적합한 인물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이번 일을 하면서 느꼈겠지만, 네가 모든 것을 전부 다 할 필요는 없다. 각각의 일에 적당한 인재를 찾아 그것을 맡기고 조율하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일은 대부분 처리할 수 있으니까.”
즈라탈은 그 말을 듣고서야 형진이 자신이 어떻게 이번 일을 처리하는지 지켜보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사실 쓸데없는 기우일 수도 있었다. 비록 지금은 즈라탈이 주시자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한 전력이 있는 노스페라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스페라투로 군림하던 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고, 바뀐 처지 만큼이나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안든다고 가차없이 부하를 처단하는 식의 행위는 더이상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즈라탈은 그런 형진의 속뜻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신께서 전하고자 하신 뜻, 뼈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원하는 보상이 있다면 말하라. 들어주마.”
“…”
그 말을 듣는 순간, 즈라탈은 오매불망 형진의 눈에 들기 위해 불철주야 오늘도 뻘짓을 이어가고 있는 자신의 딸 힐리에타를 떠올렸다. 그녀의 마음이 일반적인 연정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고는 해도, 이번 기회에 딸의 소망을 들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뒤이어 침실에서 곤히 자고 있는 유아의 일을 떠올렸다. 이번에 형진이 앙그릴이라는 세계를 찾은 것 자체가 자신의 아내와 밀월을 즐기기 위함이다. 그런데 눈치도 없이 그런 자리에 자신의 딸을 밀어 붙였다가는 보상이 아니라 오히려 벌을 받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는 딸의 소망을 이루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초를 치는 일이나 다름 없다.
아니, 힐리에타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그런 식으로 정략적인 요구를 하는 것 자체가 형진에게 불쾌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잠시 고민하던 즈라탈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저… 당장은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나중으로 미루어도 되겠습니까.”
형진은 의외라는 듯이 대답했다.
“없다고? 의외지만,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원하는 대로 하도록.”
“감사합니다.”
유아가 낮잠에서 깨어난 것은 즈라탈이 돌아가고도 꽤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음… 제가 오랫동안 잠이 들어 있었나요?”
“조금.”
형진은 부스스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걸터앉은 유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고는 다시 말했다.
“씻고 나가서 저녁 먹자. 적당한 곳에 집을 하나 마련해 뒀으니까, 오늘 밤은 그곳에서 묵는 걸로 하고.”
“낮잠을 너무 많이 자서 잠이 올지 모르겠어요.”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얘긴데.”
“변태.”
“칭찬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으며 간단하게 몸가짐을 정돈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는 도심에는 가로등을 밝히기 위한 관리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로등이 밝혀지기 시작하자, 가게들은 등불을 하나씩 내걸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만든 대형 간판까지는 아니고, 길을 가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한 용도의 등불이다.
“저기 가 봐요.”
“그래.”
유아가 무언가 그럴 듯한 냄새를 맡았는지 형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가서 살펴보니, 선술집식의 밥집 비슷한 곳이었다.
“그거, 뭐에요?”
은은한 등불에 비춰진 유아의 모습에 식당 주인은 잠시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환상으로 외모를 적당히 감추고 영기 역시 억눌러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땅거미가 지면서 퍼져 나온 은은한 저녁노을과 막 지펴지기 시작한 모닥불이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레크르… 입니다.”
유아가 가리켜 보인 것은 숯불 위에 놓여진 석쇠 위에서 지글거리며 익고 있는 기이한 생명체였다.
전체적인 느낌은 조개를 닮았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껍질 안에 다리로 보이는 촉수들이 나 있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암모나이트 같은 두족류인데 소라 형태가 아닌 조개 같은 형태의 껍질을 지니고 있는 듯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오징어나 낚지 같은 녀석이 조개껍질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 참 신기하다.
본래 이곳을 찾은 이유가 이런 새로운 식재료들을 찾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아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이인분.”
“알겠습니다.”
형진의 낮게 깔린 목소리를 듣고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식당 주인은 숯불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전의 추태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 얼굴을 붉힌 채로 서둘러 조리를 시작했다.
요리 방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상태 그대로 숯불에서 굽다가, 껍질이 벌어지면 익기 시작한 살과 내장을 먹기 좋게 잘라 껍질에 담고 양념과 함께 야채를 얹어서 마저 굽는 식이다. 레크르라는 놈의 크기 자체가 어른 손바닥을 둘을 합쳐 놓은 것 같은 넓이를 지니고 있어서 별거 아닌 요리 방법인데도 생각보다 훨씬 푸짐해 보인다.
완성된 요리를 맛보니 기이하게도 오징어나 조개 보다는 꽃게 같은 향취가 느껴진다. 오징어의 형태에 조개의 쫄깃함을 갖춘 꽃게 같은 맛의 생물이라니. 확실히 특이하다.
“맛있어요! 하나 더 주세요.”
“하나 더요?”
“네!”
“아,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먹는 모습만으로도 보는 사람의 식욕을 자극하는 먹방 여신 유아가 아니던가. 그녀의 먹는 모습을 홀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식당 주인은 허겁지겁 새로운 녀석을 숯불 위에 올렸고, 그렇게 풍겨 나오는 냄새와 함께 유아가 맛있게 먹는 모습까지 어우러지자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마저도 뭔가 싶은 표정으로 한두 명씩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아, 맛있다.”
“더 먹을래?”
“아뇨. 다른 것도 먹어봐야죠.”
곧 죽어도 그만 먹겠다는 소리는 않는다. 형진은 키득거리며 계산을 하고는 그렇게 유아와 함께 다시금 먹방 투어를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점심 때의 일로 은연중에 유아의 소문이 시장 거리에 돌고 있던 참이다. 개중에는 과장된 소문이겠지 싶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녀가 들렀던 식당들이 죄다 본래 매상의 두세 배를 찍게 되자 이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후아… 배불러요.”
“누가 보면 평소에 굶겼는 줄 알겠다.”
“훗. 그러는 당신도 나만큼 먹어댔으면서.”
“당신 외엔 내가 먹는 모습 따위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을걸.”
“못 됐어. 더 먹으라고 막 밀어줄 때는 언제고.”
그렇게 투닥거리며 즈라탈이 건넨 약도의 집을 찾아 나섰다.
“오, 이건 꽤 대단한데.”
“예쁘네요.”
이번 일에 관여한 이들이 워낙 굵직굵직한 인사들이라 쓸데없이 거창한 저택이 아닐까 싶은 걱정이 조금 있었는데, 막상 집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린다.
집 자체는 작고 아늑한 단층의 건물이었다. 하지만 언덕 하나를 통째로 정원으로 삼고 있는데다, 담장 주위에 높다란 나무를 둘러 심어서 번잡한 도시 한복판이 아닌 숲속의 작은 집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나있는 작은 오솔길을 통해 들어가서 집의 문을 열었다. 처음부터 단 둘만의 생활을 염두에 두고 지은 건물인지, 이곳의 건축 양식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널찍한 원룸 스타일의 실내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이건 정말 예상외인데.”
“그러게요.”
놀라운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용인을 쓰지 않고도 생활에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곳곳에 마법 물품이 배치되어 있었다. 따뜻한 온수가 콸콸 쏟아지는 욕실부터 시작해서, 장작이 필요없는 마법 화로가 배치된 주방까지. 사용된 기술이 마법이란 것만 제외하면 현대식으로 건축된 펜션이 아닐까 싶은 느낌마저 받을 정도다.
“뭔가 좀 아쉽네.”
“당신도 그래요? 저도 그런데.”
모처럼 단 둘만의 생활이니, 이전에 둘이서 그리칸의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같은 일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편리해서 나쁠 건 없는 일이겠지만.
“잠시만.”
어쨌든 집 안팎을 간단하게 둘러보고 별다르게 문제 될 것이 없음을 확인한 형진은 휴대용 위성 발사기를 꺼내 별장 주변에 띄워 놓고, 다시 정원에 보호와 균형, 그리고 황혼과 망각의 성물을 배치해서 그의 허락 없이 침입자가 숨어들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여왕님. 오늘밤은 소인이 불타는 밤을 선사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보.”
유아는 눈을 살짝 흘기면서도 발그레하니 얼굴을 붉힌 채 자신을 번쩍 안아 올리는 형진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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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