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38
00838 193. 시험 =========================
규설은 물론이고 힐리에타마저도 깜짝 놀라버렸다.
“비, 비서요?”
“네.”
“저희가요?”
“네.”
“…”
이건 또 무슨 일일까. 규설은 물론이고 힐리에타마저도 혼란에 빠져 버렸다. 다른 사람이 말을 꺼냈다면 차라리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지금 그들의 눈앞에 앉아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형진의 반려 가운데 한 명이다.
물론 단순히 형진의 일을 돕는 것 정도라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진은 이미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있고, 지금까지 비서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은 그의 반려 가운데서도 그런 일에 적합한 소양을 가지고 있는 요안나와 제랄딘이었다. 반려만이 비서가 되라는 법은 없지만, 지금까지 비서 역할을 했던 것은 모두 반려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업무상의 관계라고는 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남편과 붙어 지내는 것을 달갑게 여길 이가 있을까. 환수라서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것은 간단하게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혹시 이건 시험이 아닐까 하는 식의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혹시 자신들의 모습으로부터 낌새를 알아채고 먼저 선수를 친다든가 하는 식으로.
규설과 힐리에타는 긴장했다. 특히 규설의 경우엔 더욱 그랬다. 상대의 힘이 월등히 강한 상태라 내심을 읽을 수 없으니 더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기… 저희들은 비서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미엘은 바짝 얼어붙은 둘의 모습을 즐기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두 분에게 기존에 요안나님이나 제랄딘님이 맡았던 일들을 그대로 떠넘길 수는 없는 일이죠. 당연히 필요한 지식을 갖추고 업무에 익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요. 일단은 수습 기간을 가져야 하겠죠.”
“…”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미엘의 모습에, 이제 규설과 힐리에타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권유하는 거라고 생각하자니 뭔가 이상하고, 그렇다고 일종의 시험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자연스럽고.
“밤의 신께서 살피는 세계가 넓어지면서 두 분의 업무량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버렸죠. 더구나 이번에는 각자 도맡아서 전담할 일까지 생겨버렸어요.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에요. 두 분은 아직 젊지만, 저희들 같은 존재가 아닌 인간이라서 너무 늦기 전에 아이를 가질 필요가 있어요. 아시겠지만, 인간 여성은 아이를 가지게 되면 상당한 기간 동안 안정을 취해야만 해요. 도저히 지금처럼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되는 거죠. 아직 소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정작 닥치고 나서 준비하려면 훨씬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차차 준비해 나갈 필요가 있는 거죠.”
사실 요안나의 경우엔 신격의 파편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가 되어 버린 상태이다. 물론 파편 자체는 형진에게 넘겨 버렸지만, 그로 인한 변화 자체가 무효화되지는 않은 것이다. 게다가 제랄딘은 공포와 죽음의 아바타이다. 둘 다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라고나 할까.
미엘이 만약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굳이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제랄딘의 언니이며 어머니이고 스승이기도 한 미묘한 관계. 한동안은 아이들 때문에라도 제랄딘을 챙길 여유가 없었지만, 그래서라도 더더욱 앞으로 신경을 쓸 생각이었다.
규설과 힐리에타는 물론 이런 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들을 불러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이 떠보는 식의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규설과 힐리에타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혼자만이라면 차라리 주저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은 형진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길 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역시 좀 마음에 걸리는 일이다. 다른 반려들의 밑에서 일을 배우는 식이어서는 급격하게 관계를 진전시킬 수도 없을 것 같고, 이래저래 신경 쓸 것도 많고 눈치도 보일 테니까. 그러나 그녀들 옆에는 자신과 같은 것을 노리는 경쟁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자신이 미엘의 제안을 사양한 상태로 눈앞의 경쟁자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나중에 가서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이런 식의 접근이 아니더라도, 내가 과연 형진이라는 남자의 눈에 들 기회를 얻을 수는 있을까.
생각은 복잡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주어진 결론은 하나 뿐이다.
“어때요. 의향이 있나요?”
바로 그때, 마치 쐐기를 박듯이 미엘로부터 다시금 질문이 던져지자, 규설과 힐리에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하겠어요.”
“해보겠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하엘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이 둘은 자신들이 완전히 미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요즘 들어 더더욱 영악해지고 있는 다희 같은 아이들의 모습은 어쩌면 형진이 아닌 미엘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그녀는 떠올리고 있었다.
“흔쾌히 허락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아직 한 고비가 더 남아 있어요.”
“무슨…”
“두 분에게 일을 가르칠 요안나님과 제랄딘님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일단 제가 주선은 했지만, 두 분이 거절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아…”
“하지만 걱정은 말아요. 제가 미리 잘 얘기를 해둘 테니까요. 새로운 수습 비서의 필요성을 그분들에게 이해시키는 건 저에게 맡겨주셔도 됩니다. 얘기가 되면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테니, 두 분께서는 일단 돌아가셔서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규설과 힐리에타가 그렇게 대답하고 물러나자, 하엘은 다시 물었다.
“단순히 일을 돕기 위해서라면 저런 애들보다는 그에게 관심 없는 이들이 좋지 않겠어? 아니면 남자라든가.”
그것은 일견 타당한 얘기였지만, 미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앞으로도 더 많은 일을 해야 해. 그런 분의 비서라면 외부로부터의 간섭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지. 적어도 비서의 입장에 서 있는 자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여지는 최대한 없도록 만드는 편이 좋아.”
“차라리 그런 거라면… 우리들이 분신으로 돕는 방법도…”
다시 이의를 제기하는 하엘의 모습에 미엘은 빙긋 웃었다.
“그렇게 그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기는 것이 싫어?”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난 그런 거 신경 안 쓴다니까.”
“후후후.”
“쳇. 맨날 놀리기만 하고.”
“미안. 미안.”
어쨌든 미엘은 바로 요안나와 제랄딘을 불러 수습 비서를 들이는 것이 어떻겠냐는 얘기를 꺼냈다.
“아, 아이요?”
제랄딘은 차라리 올게 왔구나 하는 표정이었지만, 요안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기별이 오려면 벌써 왔어야 한다. 형진과 처음 맺어진 이후로 그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던가. 물론 그렇게 따지자면 미엘이 보기엔 제랄딘이나 요안나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두 분이 아이를 아직 가지지 못하는 건, 너무 바쁘게 일에 매달려서인지도 몰라요. 너무 늦으면 그것도 곤란한 일이니까, 지금부터라도 차분하게 준비를 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그건…”
사실 아이를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는 생각까지는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왕성에 와서 공주들과 함께 노는 형진의 모습이라든가, 달이 녀석이 싸질러 놓은 푸짐한 무언가를 기쁜 모습으로 처리하는 형진의 모습 같은 걸 보게 되면 조금은 우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를 저렇게나 좋아하는 그에게, 자신의 피를 이은 아이를 안겨줄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미안할 때도 있다.
“저에게도… 가능할까요.”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요안나가 입을 열자 미엘이 씩 웃는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 왕성에는 희망과 생명님은 물론이고 그분의 사제들도 아주 많잖아요. 모르긴 해도 아이를 갖는 일에 있어서 그분들보다 전문가는 없을 텐데요.”
“그거야 그렇지만.”
둘의 대화를 보면서 제랄딘은 살짝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미엘의 공세는 요안나에게 집중적으로 가해지고 있었지만, 이것은 어찌 보면 자신에 대한 압박일 가능성이 더 컸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돌봐왔던 미엘이기에, 더 늦기 전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리라.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다 밝힐걸 그랬어.
제랄딘은 속으로 그런 생각마저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현재의 관계가 어그러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여전히 발목을 잡는다. 형진이나 유아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는다.
제랄딘에게 있어, 미엘은 단순한 언니 이상의 존재이다. 그 어릴 적부터의 모든 기억이 사실은 거짓된 관계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래서 미엘이 그녀로부터 등을 돌린다면 제랄딘은, 그리고 공포와 죽음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공포와 죽음은 사실 마음이 너무나 여린 여신이다.
제랄딘이 그렇게 내색하지 않은 채 속으로 생각을 곱씹고 있는 사이, 미엘은 요안나를 철저히 공략하여 그녀에게서 항복 선언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럼, 허락하신거죠?”
“네…”
끈질긴 미엘의 설득에 요안나는 완전히 넉다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물렁했었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패배다. 아니, 형진이라든가 아이라든가 하는 식의 문제가 걸린 일이라서 물렁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단순히 수습 비서를 받아들이는 문제만이라면 이렇게까지 단숨에 함락되어 버리지는 않았으리라.
“그럼, 다음은…”
요안나의 항복을 받아낸 미엘은 제랄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항복. 언니의 뜻에 따를게.”
하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제랄딘은 두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항복 의사를 밝혔다.
“너무 싱거운데.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가씨.”
“관둬. 언니. 요안나님처럼 호되게 당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흐음.”
미엘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따지고 드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수습 비서를 들인다는 목적 자체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뭔가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공연히 그것을 파고들어서 문제를 만들었다가 기껏 밀어붙인 일이 흐지부지 되기라도 하면 곤란한 일이다.
그렇게 요안나와 제랄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내는 일이 끝나자, 이제 새로운 수습 비서를 받아들이는 일은 마지막으로 형진에게로 전해졌다.
“수습 비서? 그 둘을?”
“네.”
“…”
형진은 미엘에게서 얘기를 전해듣고는 이게 또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내색은 않고 있었지만, 그 둘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정도는 형진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더 여자를 늘려봐야 득 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 모른 척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다른 누구도 아니고 미엘에게 이런 제안을 받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마치 바람 피우다가 들킨 것 같은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남자가 낫지 않겠어?”
규설이나 힐리에타가 그랬던 것처럼 혹시 시험해 보는 것이 아닌가 싶어 그렇게 묻자, 미엘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헤에. 일을 배우려면 한동안 요안나님이나 제랄딘님이랑 붙어다녀야 할 텐데, 시커먼 남자들이 그 둘의 옆에 달라붙어 있어도 괜찮아요?”
“그건 안 돼!”
딱히 의처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보고만 있어도 입이 헤벌죽 벌어지는 예쁜 마누라들이 다른 남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꼴을 보고 싶은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설령 그녀들에게 생각이 없어도, 남자 놈들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사실 그의 마누라들은 너무 예쁘다. 혼자 냅두는 것이 불안할 정도로. 이러다 정말로 의처증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거봐요. 어차피 남자는 안 되잖아요. 그럴 바에야, 이미 추종자로서 검증된 그 두분이 제격이죠. 내 말이 틀린가요?”
“…”
“설마 새로운 비서라고 해서 무조건 건드려도 된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
형진은 말문이 막혀버렸고, 결국 규설과 힐리에타는 새로운 수습 비서로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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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