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37
00837 193. 시험 =========================
대부분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미엘은 이미 일반적인 환수의 기준을 넘어선 존재가 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형진과 관계를 이어오면서 받아들인 정기의 양은 실로 막대한 수준. 본래 정기를 기반으로 하는 생명체인 환수에게 있어 이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미엘의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가 항상 아이들을 돌보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형진조차도 아이들과 마주할 때는 존재감을 최대한 억눌러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는 마당에, 어머니인 미엘이 기세를 퍼뜨려 아이들을 억누를 필요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따지고 보면 형진이 신격을 잃은 수호신들의 관리를 그녀에게 맡긴 것도 이런 이유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익숙하다는 것도 물론 고려 대상이지만, 제 아무리 신격을 잃어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한들 신은 신이다. 그런 신들을 필요에 따라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 미엘은 이미 어지간한 잡신도 가볍게 여기지 못할 정도의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힐리에타는 그렇다 쳐도, 규설은 형진의 제자로서 왕성에 머물면서 미엘의 모습을 자주 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조차도 미엘이 이 정도의 힘을 감추고 있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히 강한 존재일 거라는 예측은 하고 있었으되 그 예측의 한도를 몇 배, 몇십 몇백 배 초월한 정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차원이 다르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그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추종자들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 더구나 그들 중에는 미엘이나 하엘이 형진의 반려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마저 섞여 있었다. 기껏해야 자신들의 상급자이거나 뭐 그런 식의 존재가 아닐까 하는 정도. 겉으로 보기엔 별로 기세도 드러나지 않고, 그저 귀여운 환수 소녀 같은 느낌이라 조금 얕잡아 보는 이들마저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시선에는 경악을 넘어 경외의 감정마저 드러나고 있었다. 형진이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며 그들에게 신으로서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던 것처럼, 미엘 역시 이 순간 시험을 위해 모여든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인식시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텐데요.”
조용한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힐리에타와 규설은 어쩔 줄을 몰랐다. 목소리는 차분해도 오히려 그래서 드러내놓고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섭다.
“그것이… 사소한 말다툼으로 인해…”
규설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미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되물었다.
“사소한 말다툼 때문에 이 소란이 일어났다는 말씀이신가요?”
“…”
규설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물론 변명을 할만한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일일이 다 설명하자면 결국 자신이 형진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설명해야만 한다.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에게도 쉽게 말하기 어려운 내용인데, 하물며 그 대상이 형진의 반려 가운데서도 무려 일곱이나 되는 아이를 낳은 미엘이어서야.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린 규설의 모습에, 미엘의 시선은 이제 힐리에타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하지만 힐리에타 역시 입을 다물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형진에 대한 감정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서로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규설도 힐리에타도 그렇게 입을 다물어 버리자 미엘은 이 사안이 앞서 말한 것처럼 사소한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따라오세요.”
결국 미엘은 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하엘을 데리고 별도의 공간으로 둘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풀이 죽어버린 둘에게 간단한 다과를 대접했다.
미엘은 형진처럼 사람의 마음을 단숨에 녹여낼 정도의 차를 끓여낼 수는 없지만, 따뜻한 차 한 잔이 분위기를 풀어 가는데 충분히 효과적이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그렇게 차 한 잔씩을 나누고 나서야, 미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면, 굳이 캐묻거나 하지는 않겠어요.”
“감사… 합니다.”
“하지만 이번 장비 시험은 밤의 신께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번에 시험되는 것이 임무에 나선 여러분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장비임을 잊지 마셔야 해요. 그런 곳에서 소란을 피워서야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미엘에게 사과하는 규설과 힐리에타의 얼굴에 씁쓸한 분위기가 감돈다. 혹시나 형진과 마주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장비 시험에 참가했지만, 엉뚱한 이와 신경전을 벌이다 그의 처에게 훈계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분위기를 알아챈 것인지, 미엘은 차를 한 잔씩 더 따라준 다음 둘을 다시 시험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옆에서 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하엘이 물었다.
“언니. 왜 그냥 돌려보내는 거야?”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하엘의 목소리에는 살짝 짜증이 섞여있었다.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면?”
오히려 반문하는 미엘에게 하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둘이 왜 싸웠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
하엘도 이미 예전의 철딱서니 없었던 그 하엘이 아니다. 형진에게 예속되고 다시 다섯이나 되는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그녀도 조금은 주위의 일을 살펴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평소에는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미엘에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이 전부지만, 그렇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잘 보이는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규설이 형진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도 그런 일 가운데 하나다.
“글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
차분한 미엘의 말에 하엘은 입을 다물었다. 정말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기서는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이 좋다는 의미임을 알아들은 탓이다.
사실 왕성에 새로운 메이드가 들어오면 가족들은 그들이 형진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곤 한다. 물론 메이드가 되었다고 반드시 형진의 반려가 된다는 건 아니지만, 형진의 반려들 가운데 메이드를 거치지 않은 건 고작해야 여신들 정도 뿐인 것도 분명한 사실. 하엘이 규설을 바로 알아보고 내심을 짐작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런 하엘을 바라보며 미엘은 빙긋 웃었다.
“하엘도 많이 변했네.”
“뭐가?”
“이제는 질투라는 것도 할 줄 알고.”
“무, 무,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느닷없는 미엘의 말에 하엘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스스로 그런 자신의 행동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정곡을 찔려 버렸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미엘의 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왜? 그가 더 이상 새로운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난 그러니까… 딱히 그런 걸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우후후…”
변명하는 하엘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이 미엘은 작게 웃더니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언니…”
마치 아기를 대하는 것 같은 스킨십. 하엘은 미엘에게 안기자 울컥하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인간 상태의 몸집만 놓고 보면 미엘 쪽이 오히려 더 작은 편. 하지만 하엘은 꼼짝도 못한 채 미엘의 품에 안겨 가만히 토닥이는 그녀의 손길을 느낄 뿐이다.
“내가 그를 만나 변하고, 또한 네가 그를 만나 변했던 것처럼… 환수들은 앞으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될 거야. 멀리 볼 것도 없이, 당장 우리들의 아이들 역시 다른 환수들과는 다른 과정을 거치며 커가는 중이니까.”
“…”
“방금 전의 그 둘도 결국은 그런 변화의 일부분인 셈이지.”
하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는…. 정말 괜찮아?”
“…”
미엘의 입가에 살짝 쓴웃음이 번진다. 어찌 그녀라고 해서 질투가 생기지 않겠는가.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두 여성이 형진의 눈에 들고 싶어서 바둥대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본래 미엘에게는 그런 감정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지만, 오랫동안 살을 부대끼며 살다보니 그녀도 변했다. 변한 건 하엘만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
하엘은 입을 다물었다. 따지고 보면 형진에게 자신을 안도록 만들고 아이를 낳게 한 것도 결국은 미엘이었다. 하엘로서는 그런 미엘의 심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도 미엘이 했던 일들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알았어. 그게 언니의 뜻이라면.”
“고마워.”
둘은 잠시 더 그렇게 서로를 가만히 보듬어 안고 있다가, 다시 시험장으로 향했다.
미엘과 하엘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추종자들은 물론이고 장비 시험을 주관하고 있던 신들조차도 그녀들을 가볍게 보지 못했다. 미엘이 굳이 힘을 드러내 보인 건 따지고 보면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규설과 힐리에타는 운 나쁘게 시범타로 찍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엘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풀이 죽은 모습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둘의 모습을 보고는 빙긋 웃어 버렸다. 자신에게 혼난 것은 둘째 치고 형진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 어지간히 실망스러웠던 모양이다.
다행히 장비 시험은 이후로 별 문제 없이 이어졌다. 규설에게서 파악된 개선점, 이를테면 본신과 인간형태의 변환 사이에 갑주가 신속하게 그것에 대응하지 못하는 점 같은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다시 그것을 고치기 위해 일에 매달려야 하는 신들은 언제 또 이걸 다 고치나 싶은 표정이 되었다. 미엘은 일단 지급되었던 장비를 다시 회수하는 일을 마치자, 신들을 잘 다독여 거짓된 천국으로 되돌려 보내고는 다시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늘 있었던 장비 시험에 성실히 참여해 주신 것에 대한 보상으로 추종자 여러분께는 소정의 공헌도와 더불어 밤의 신께서 특별히 신경 써서 마련하신 별도의 보상이 추가될 예정입니다.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많을 테니, 그때도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까지 마치자, 추종자들은 각자가 속한 세계로 향했다.
규설과 힐리에타 역시 그건 마찬가지. 하지만 발걸음을 돌리려는 그녀들에게 문득 메시지 하나가 전해졌다.
규설과 힐리에타는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바라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미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미엘은 자신들을 향해 방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슨…”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요. 혹시 뭔가 급한 일이라도?”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문제없겠네요. 따라오세요.”
“…”
규설과 힐리에타는 끽 소리도 못한 채 미엘과 하엘의 뒤를 따랐다. 이미 앞서 드러내 보인 존재감과, 이후에 있었던 대화로 인해 정신적으로 완전히 제압을 당해 버린 것이다.
미엘은 그들을 왕성에 있는 자신의 거처로 데리고 갔다. 하엘은 어쩐지 뒤따라온 규설과 힐리에타의 모습을 보며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고생하셨어요. 많이 피곤하시죠? 되도록 짧게 얘기하도록 할게요. 일단 앉으세요.”
“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싶어 규설과 힐리에타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자신도 모르게 각을 잡은 채 미엘 앞에 앉았다. 어쩐지 사단장들 모임에 불려나온 이등병 같은 모습이다.
미엘은 그런 둘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즈음 밤의 신께서는 상당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십니다. 이번 장비 시험에 참석하지 못하신 것도 따지고 보면 그래서지요. 물론 이런 식으로 저희들이 돕고는 있지만, 그래도 손이 많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규설과 힐리에타는 적어도 미엘이 아까의 일 때문에 질책을 하려고 부른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저는 주시자 중에서 몇몇 분을 뽑아서 그분의 일을 직접적으로 돕는 역할을 맡기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미엘은 방긋 웃으며 말을 마쳤다.
“두 분. 혹시 비서 해보실 생각 없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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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밥먹고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