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36
00836 193. 시험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착용 시험을 시작합니다. 한분씩 안으로 들어가셔서 갑주를 지급 받으십시오. 인원이 많으니 질서 있게 시험에 응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잠시 기다리자 이름도 모를 신 하나가 다소 지친 표정으로 서류를 들고 나와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신인데, 어째서 고단한 일상에 지친 샐러리맨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지. 장비 시험에 응하기 위해 모여든 추종자들은 묘하게도 그 모습을 보며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밤의 신의 위엄을 더욱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곧바로 호명이 이루어지며 하나씩 안으로 들어가 장비를 받아 착용하기 시작했다.
“규설님? 산군이시라고요?”
“네.”
“지금 모습은 본래 모습이 아니시겠군요?”
“그렇습니다.”
규설이 안으로 들어가자 아무리 봐도 신이라기보다는 어디 한 일주일 정도는 집에도 못 들어가고 연구에만 매진하고 있는 대학원생 같은 모습의 여신이 그녀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신인 것은 분명한 일. 상대의 기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환수로서는 물론이거니와, 은연중에 상대의 심리를 거울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산군의 능력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걸 보면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규설은 다소 까칠해져 있던 기분을 급히 가다듬고 공손하게 상대의 말에 응대했다.
“아시겠지만, 갑주란 건 기본적으로 인간형의 신체에 맞도록 제작되는 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 갑주는 그런 식의 통념을 부수는 새로운 개념의 물건이지요. 따지고 보면 밤의 신께서 이번에 장비를 시험하는 일에 환수를 비롯해 다른 여러 종족들을 모두 불러들인 건 그런 이유입니다.”
규설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본신을 드러낸 상태에서도 장비의 착용이 계속 유지된다는 얘긴가요?”
“그렇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장비는 인간들 뿐만이 아니라 규설님 같은 환수들에게도 매우 유용한 물건이 되겠지요.”
“와…”
솔직히 말해서 규설은 지금 지친 표정의 여신이 말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일반적인 환수와는 달리 실체가 부정형에 가까운 산군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일단, 규설님이 착용하실 장비는 앞서 측정했던 인간 형태의 사이즈에 맞춰서 조정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건 개략적인 것이고, 나머지는 실제로 착용하면서 보다 세밀하게 조정을 거쳐야겠지요.”
“그럼… 입고서 뭔가를 다시 해야 하는 건가요?”
아까 사이즈를 잴 때의 모습을 떠올린 규설이 그렇게 묻자, 여신은 그녀가 무엇을 꺼리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아무리 장비 테스트이고, 상대가 같은 여성이라고는 해도 불특정 다수에게 벗은 몸을 보이는 건 역시 꺼림직한 일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환수들은 인간형일 때의 모습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어차피 본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도 인간과 섞여 살아가지 않는 환수들의 얘기고, 인간의 문화에 동화된 환수들의 경우는 본신이 아니더라도 벗은 몸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짙은 편이다. 따지고 보면 규설도 그런 쪽이라 할 수 있다.
“그건 아니에요. 정확히는 장비가 스스로 규설님의 몸에 적응을 하는 쪽이라고 해야겠죠.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나… 음, 그렇네요. 이 장비는 스스로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다고 하는 편이 맞겠어요.”
“장비가… 살아있다고요?”
“정확한 건 직접 착용해 보면 아시게 될 겁니다.”
처음에는 성심껏 설명해 주는 모습이었지만, 규설 이후로도 많은 수의 추종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는지 살짝 귀찮은 기색을 내비친다. 하기야 한두 명이 아닌데 그 모든 이들에게 일일이 설명을 다 해주는 것도 은근히 힘든 일이다. 말하는 것도 은근히 체력이 소모되는 노동이라고나 할까.
상대에게서 귀찮은 기색을 느끼자 규설은 서둘러 입을 닫고 요정이 건네주는 장비를 건네받았다.
흔히 갑주라고 하면 철판이라든가 가죽을 잇댄 형상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지금 규설에게 건네진 것은 갑옷이라기보다는 브로치 같은 장신구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원하는 부위에 착용하시면 됩니다. 마법적 처리를 했기 때문에 착용자가 임의로 해제하지 않는 이상 몸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 예…”
이 갑주는 이전에 형진이 베헤모스를 처치하고 습득했던 의지의 성채라는 이름의 방어구를 흉내낸 물건이다.
앞서도 여신이 말했지만, 형진의 추종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반적인 인간과는 차별화되는 이종족들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방어구를 만들 필요가 있었고, 사용자의 신체에 맞게 활성화되어 착용되는 의지의 성채는 그런 용도에 꼭 어울리는 방어구였다.
처음 추종자들을 받아들일 때, 형진은 이 방어구를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나눠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린 적이 있다. 아란이 임무 중에 위험에 빠졌던 일 때문에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해졌었지만, 추종자들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이런 생각은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추종자들에게 방어구 좀 입히자고 숫자도 얼마 안 되고 자라는데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베헤모스의 씨를 말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던 것이 이번에 이름을 뭐라고 붙여야 할지도 난감한 커다란 애벌레의 사체를 습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 가죽을 임의로 실험실에서 배양해서 생산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또한 포션과 만나면 강력한 재생 능력을 가지는 점까지 확인하게 되자 의지의 성채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 방어구를 임의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규설은 손에 쥐어진 브로치 형태의 장비를 잠시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일단 시계처럼 손목에 그것을 부착했다. 괜히 가슴에 부착했다가 나중에 탈이라도 나면 곤란하다는 생각에서다.
여신의 말대로 브로치는 그녀의 의지에 따라 손목에 착 하고 감기는 느낌으로 달라붙더니, 이내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어? 이게…”
놀란 표정을 짓는 규설에게 여신이 피곤한 목소리로 다시 설명했다.
“주시자들의 임무는 비밀스러운 것이 많으니 일부러 장비를 착용한 것을 노출시킬 필요는 없겠죠. 이 은폐기능은 허세와 망상님, 그리고 공포와 죽음님께서 직접 권능을 부여하여 완성한 것입니다. 어지간한 신급의 존재가 아닌 이상 장비의 착용 유무조차 파악할 수 없는 거죠.”
“아…”
“이제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을 해봐야 합니다. 착용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눈앞에 나타나는 인터페이스에 연동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지정된 음성이나 행동으로 방어 기능의 발동이 가능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의지만으로 인테페이스의 메뉴를 실행해서 발동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우선은 세 가지 모두 시험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발동 커맨드를 등록해 주세요.”
“커맨드라면…”
“음성이나 행동이요.”
“아, 예…”
아무래도 상대가 신이다 보니 이래저래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산군이라면 자신의 세계에서는 잘 나가는 걸 넘어 신으로까지 추앙받던 환수인데, 어쩌다 신세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간단하게 발동 커맨드를 등록하고 시험을 해보았다. 그러자 규설의 모습은 마치 바이크를 즐기는 라이더 같은 모습으로 순식간에 변화한다.
몇 차례에 걸쳐 발동과 해제를 반복하는 일이 문제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자, 여신은 다른 것을 주문했다.
“이번엔 본신 상태에서의 발동을 시험해 보겠습니다.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 주세요.”
“네.”
하나 하나 일일이 이런 식으로 시험을 거쳐야 한다면 신들로서도 피곤한 일이겠지. 규설은 어쩐지 지쳐 보이는 기색이 역력한 여신이 좀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이야 밤의 신을 모시기로 마음먹고 추종자가 되었으니 그렇다 쳐도, 이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추종을 받는 것이 당연한 신이 아닌가.
규설은 일단 발동을 해제하고는 본신을 드러냈다.
“…”
검은 안개와 같은 거대한 무언가. 그리고 그 안에서 붉게 빛나는 눈동자. 산군의 본래 모습이 드러나자 지친 기색이 역력하던 여신의 눈에도 놀라움과 흥미의 감정이 새겨졌다.
여신이 잠시 아무 말도 못한 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규설은 어쩐지 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여신님?”
“아, 예. 이런 식으로 직접 환수의 본신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죄송합니다.”
“아뇨. 별 말씀을.”
“그럼 본신 상태에서의 발동을 시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규설은 곧바로 발동을 실행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본래부터 그녀의 부정형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몸은 검은 안개에 감싸인 상태이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그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떤가요. 제대로 착용이 된 건가요? 저로선 확인할 수가 없어서.”
“아마도. 이 상태에서 뭔가를 착용한 건 처음이라 좀 거북한 느낌이 있긴 하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인간형으로 모습을 되돌려 주세요.”
“네.”
규설은 여신의 말에 따라 바로 인간형으로 모습을 되돌렸다. 그러자 부정형이었던 무언가가 인간형으로 변한 그녀의 몸에 천천히 뒤덮이며 앞서 보여주었던 라이더 복장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음… 본신에서 바로 인간형이 되었을 때는 갑주가 그것에 알맞은 변화를 보이는데 시간이 걸리는 군요.”
여신은 혀를 차며 서류에 뭔가를 기록했다. 기록하는 모양새가 어쩐지 기운이 하나도 없다. 시험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벌써부터 새로운 문제점을 확인한 탓이다. 문제가 생기면 생길수록, 여신은 더 많은 시간동안 허세와 망상의 인성질을 견디며 야근을 해야만 한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도 차라리 당연한 일이다.
규설은 일차적인 시험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다가, 마침 다른 방에서 시험을 마치고 나온 힐리에타와 딱 마주쳤다.
“흐응…”
“…”
마치 일부러 드러내 보이듯 갑주를 착용한 상태 그대로 밖으로 나온 힐리에타가, 여전히 하얀 털가운을 착용한 상태의 규설을 향해 작게 콧소리를 냈다.
딱히 말로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규설은 갑주를 착용한 상태의 힐리에타와 그녀의 콧소리를 듣자 살짝 짜증이 났다. 뭐라고 형용해야 좋을지 모를, 어쩐지 머리카락이 하나 하나 올올이 곤두서는 듯한 그런 짜증스러움이다.
“그건 무슨 의미지?”
“뭐가?”
“방금 그 소리. 무슨 의미냐고.”
“글쎄. 무슨 의미일까.”
빙긋 웃으며 자신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씨익 웃는 힐리에타의 모습에 규설은 갑자기 욱하고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규설이 기세를 확 불러일으키자, 힐리에타 역시 지지 않고 기세를 일으켰다.
“왜 갑자기 이러실까. 내가 뭘 어쨌다고.”
뜬금없이 두 여자가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자, 다른 추종자들은 슬금슬금 주위로 물러났다. 아까부터 뭔가 심상치 않더니,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다.
“전부터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 그 뿐이야.”
“정말 그럴까? 이제 와서?”
“하긴, 이제 와서 그런 얘기는 필요없는 건지도 모르지.”
“논리가 엉망이긴 하지만, 그 말 만큼은 나도 동감이야.”
그야말로 누군가 불씨만 하나 중간에 던져 넣으면 바로 폭발해 버릴 듯한 분위기.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둘이 싸우려 드는 걸 보면 과연 형진이 뭐라고 할지 걱정스럽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그녀들의 대치는 곧바로 모습을 드러낸 한 인물에 의해 종식되었다.
“헉!”
규설과 힐리에타는 갑자기 훅 하고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세상에 이게 뭐야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강렬한 기세에 화들짝 놀라버렸다.
어찌나 그 기세가 강렬했는지, 순간 둘은 혹시 형진이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떠올리며 황급히 기운을 거둬들였을 정도다.
하지만 막상 그녀들의 눈에 들어온 인물은 형진이 아니었다.
풍성한 아홉개의 검은 꼬리를 마치 공작의 꼬리깃처럼 확 펼친 채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그 인물의 모습은, 그들이 알고 있는 형진의 외모와는 전혀 달랐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귀여운 소녀 같은 이미지. 하지만 그녀가 뿜어내고 있는 기세는 시험을 위해 이곳에 모여 있는 신들마저도 찔끔할 정도로 강렬했다.
바로 그녀, 미엘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기세만으로도 이미 질려버린 두 여성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죠?”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