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44
00844 195. 영웅의 시대 =========================
처음에 몇몇 신들이 새로 지급된 갑주, 통칭 의지의 성채라고 불리는 물건을 착용하고 선행을 했을 때만 해도,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거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인터넷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신앙까지는 아니어도 그들을 칭송하는 이들이 생겨나자 잡신들은 이것이 아직 지명도가 없는 자신들에게 커다란 기회가 되리란 걸 알아차리고 일제히 영웅의 길로 뛰어들었다.
사실 재해 등의 현장에서 이들은 매우 강력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지구의 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이른바 천재지변이라 불리는 재해에 있어서는 여전히 무력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비와 낭만이 신격의 확장을 이루었다면 이런 것도 일정 부분은 조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풍이나 지진, 화산 폭발 같은 재해는 따지고 보면 일정 지역에 밀집된 에너지가 한계치를 넘어서며 폭발하는 현상이나 다름없으니, 신격의 확장을 이루어 이런 에너지의 흐름을 제어할 수 있게 되면 완전히 억제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신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이는 역시 보호와 균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균형의 힘은 자연적이지 않은 균형의 붕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한계가 있다. 재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의 입장에서나 해당되는 얘기. 지구와 같은 천체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또한 행성 전체의 에너지 균형을 이루는데 필요한 요소다. 관점에 따라서는 그런 흐름을 일부러 조절하는 행위 자체가 균형을 저해하는 행위일 수도 있다.
신이 만물을 공평하게 다스린다면,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먼저 세상에서 지워버려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세계의 신들이라면 몰라도, 엘리시온에서 탄생한 신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뭐라 해도, 그들이 발휘하는 이른바 권능이라고 불리는 힘의 원천이 바로 인간과 같은 지성체의 신앙으로부터 비롯되니 어쩔 수 없다고나 할까.
비록 미치고 타락하기는 하였으되, 파괴와 재생이 추구했던 것은 이런 모순된 상황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도 지나서 생각하니 그런 것 뿐이고, 실제로 놈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형진을 비롯해서 놈과 관련된 이들의 기억에는 그저 미치고 타락한 악신으로만 남았을 뿐이다.
현재 형진에 의해 세상으로 끌어내진 신들은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차츰 자신들만의 힘을 세상에 구현할 기반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것은 신앙을 제외한 공헌도만으로 국한된 것이긴 했지만. 문제는 그런 식으로 힘이 쌓여 가면 결국 표출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태풍이나 지진, 화산 폭발과 같은 섭리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식의, 자연의 섭리일 뿐이라도 인간에게는 재해로밖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번처럼 어딘가에 그렇게 쌓여진 것들을 표출할 기회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중장비는 아직인가!”
“도로가 붕괴하는 바람에 도착이 지연되고 있다고 합니다!”
“젠장!”
갑작스런 폭우,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발생한 산사태가 그 아래 존재하던 마을을 덮쳤다. 급히 구조 인력이 파견되었지만, 중장비 없이 사람의 힘만으로는 곧바로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자고 있다가 갑자기 참변을 당한 사람들을 어떻게든 무사히 구조하기 위해 구조 인력들은 열심히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헤치고 있었으나 쏟아져 내린 수천톤의 토사 앞에서 그들의 힘은 너무나도 무력해 보였다.
곧바로 인근의 미라지 코어 지사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부양선을 통해 중장비를 실어 보내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부양선이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그곳에 당도한 이들이 있었다.
“인간들이여! 걱정하지 말라, 나 분배와 그물이 여기 도착했다!”
“소매와 단추 등장!”
“모래와 잡초에요. 반갑습니다!”
“밧줄과…”
갑자기 형형색색의 기묘한 코스튬을 입은 이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외치며 그렇게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한두 명쯤이라면 이름을 기억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저마다 떠들어대서야 알아듣기도 어렵다.
하지만 잡신들은 사람들이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거나 말거나 급히 자신들의 권능을 사용해 매몰된 사람들을 찾아서 구해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도저히 지금 상황과 맞지 않는 신격을 지닌 이들 역히 자신들이 입고 있는 의지의 성채가 지닌 힘을 빌어 바위를 들어내고 땅을 파헤치는 일을 시작했다.
갑자기 하늘 위에서 날아서 내려온 잡신들이 그렇게 작업을 시작하자, 구조 대원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 이쪽입니다. 이쪽을 파헤쳐 주십시오! 본래 주택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이쪽에도 집이 있습니다!”
“이 정도쯤이야! 맡겨 주세요!”
이 장소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나 모래와 잡초였다. 그녀의 힘은 이런 식으로 붕괴되어 밀려들어온 토사를 효과적으로 치워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분배와 그물 역시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물로 훑어 내듯 주위를 살펴 매몰된 이들을 보다 쉽게 찾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잡신들의 도움으로 인해 산사태로 매몰된 십여 가구의 주민 이십여명 가운데 대부분이 무사히 구조되었다. 잡신들은 지니고 있던 포션등으로 부상자들의 치료를 돕고는 미라지 코어의 부양선이 도착하자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재난이란 건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설령 일어나더라도 때마침 비번이거나 휴가 등으로 쉬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모습을 드러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형진이나 허세와 망상이 이런 식의 일을 묵인해 주고 있다고는 해도, 당장 맡겨진 일을 농땡이 치고 영웅 놀이를 하는 것까지 방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런 식의 구조 현장에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란 얘기다.
때문에 그런 운이 따르지 않은 보통의 신들이라면 좀 더 소소한 일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아차. 늦어 버렸나.”
오늘이 첫 출근인 사회 초년생 A씨는 긴장으로 인해 밤잠을 설치다가 늦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헐레벌떡 집을 나왔지만, 회사까지 가는 버스는 이미 출발해 버린 상태. 이대로라면 첫 출근부터 지각 확정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부담이 되더라도 호버 보드 같은 거라도 사둘 걸. 그런 후회까지 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등 뒤에서 묵직한 음성이 전해져 온다.
“인간. 혹시 지각을 걱정하고 있나?”
“네?”
이게 뭔 소린가 하고 돌아보던 A씨는 등 뒤에 마치 거대한 산처럼 버티고 있는 한 인물을 보고는 그대로 흠칫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알록달록한 무지개빛의,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찰싹 달라붙는 코스튬을 입은 거구의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런 등장이라 놀라 그대로 굳어버린 A씨에게 그 정체불명의 남자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회사는 어디에 있지?”
풍채도 그렇고, 기이한 옷차림으로부터 전해지는 압박감도 그렇고, 그런 걸 제외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사람을 압도하는 기이한 존재감도 그렇고. 순식간에 심신이 장악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A씨는 자신도 모르게 그 질문에 순순히 답을 하고 말았다.
“안드라시 쪽에…”
대답하고 난 뒤에야 왜 내가 이런 걸 생전 처음보는 기괴한 인물에게 말해 주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안드라시 거리. 멋진 곳이지. 나는 그곳을 아주 좋아한다네.”
“그러… 십니까.”
“그리 멀지 않은 곳이군. 내가 데려다 주도록 하지.”
“네?”
이게 뭔 소린가 싶었지만, 다음 순간 A씨는 어느 틈엔가 괴한에게 인형 뽑기하듯 번쩍 들어올려지더니 그대로 옆구리에 끼워진 채로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흐어어어억!”
아니, 이건 단순히 하늘을 난다고 표현하는 것조차 어폐가 있었다. 거한은 마치 날아가는 듯한 느낌으로 크게 도약했을 뿐이니까.
순식간에 지면이 멀어졌다가 다가온다. 너무나 놀란 A씨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다시금 묵직하게 전해지는 낮은 목소리에 눈을 떴다.
“도착했네. 안드라시 거리.”
“…”
거한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놓아 주었지만, A씨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놀란 것은 A씨 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하늘 위에서 떨어져 내린 기괴한 무지개빛 코스튬 차림의 거한을 보고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대로 생각이 멈춰버리는 듯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럼, 난 이만.”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다시 하늘로 뛰어올라 사라지는 거한의 모습을 A씨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코스튬이 무지개빛인 것을 뒤늦게 떠올리고는 발그레하니 얼굴을 붉혔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무지개는 성소수자를 의미하곤 한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나오신 거에요?”
“네. 휴가가 오늘까지라.”
“그러시군요. 저도 도울게요.”
“감사합니다!”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이미 추종자까지 포함된 어엿한 교단을 이끄는 여신이었지만, 역시나 이번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행동은 다른 신들의 영웅 놀이와는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전혀 거창하지 않은, 이를테면 아침 일찍 거리 청소를 한다든가 하는 식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 역시 의지의 성채를 착용한 상태지만, 다른 잡신들과는 다르게 수수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얼굴을 가린 것을 제외하면 그냥 평범한 시골 아가씨라고 해도 좋을 듯한 그런 차림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나타나서 거리를 청소하고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을 사람들은 처음에 의아하게 여겼다. 개중에는 요새 세상을 떠들썩 하게 하는 영웅들 가운데 하나인가 싶은 생각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뭔가 대단한 일을 하기 보다는 남들이 지나치기 쉬운 소소하고 작은 일들에 솔선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냥 옷차림만 그런 식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선행을 하고는 싶은데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린 것 뿐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식에 변화가 생기는 일이 생겨났다.
끼이이익! 쾅!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부터 거리 청소를 나왔던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갑자기 어디선가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끼고는 화들짝 놀랐다.
“사고다!”
“구급차! 구급차를!”
“젠장! 문이 안 열려!”
급히 달려가 보니 차량 두 대로부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아침이 되어서야 퇴근하던 사람의 차량이 중앙선을 넘으면서 마주 오던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아침부터 느닷없이 날벼락을 맞아버린 반대편 차량에는 통학을 위해 차를 몰고 나왔던 주부와 초등학생 아이가 타고 있었는데, 둘 모두 충돌시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지만 차체가 심하게 일그러져서 밖으로 빼내기가 곤란했다.
“불부터 꺼!”
“소화기! 소화기를 가져와!”
근처를 지나던 시민들이 급히 사고 차량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려 했지만, 차체가 심하게 일그러진 탓에 쉽지 않았다.
바로 그때, 물벼룩과 클로렐라가 나섰다.
“물러서세요!”
단숨에 다가선 그녀는 우그러진 차문을 움켜 잡더니 그대로 괴력을 발휘해 차문을 떼어냈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정말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헉!”
“여, 영웅이었어!”
“맙소사!”
그저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을 가린 것 뿐이라고 생각했던, 연약하고 가냘퍼 보이던 그녀가 장정들이 달라붙어도 꿈쩍 않던 문을 뜯어내고 정신을 잃은 모자를 구해내 포션을 먹이는 모습에 사람들은 얼이 빠지고 말았다.
응급처치를 마치고 다친 모자에게 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자, 그제서야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괜찮을 거에요.”
“가,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급히 소방차와 구급차가 도착하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청소를 시작했다.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거리의 사람들은 이후로 그녀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