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48
00848 196. 추대 =========================
“…”
형진은 입술을 깨문 채 코앞에서 눈을 감은 채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포트니아 테론을 바라보았다.
자칫하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생각하는 것조차 끔찍한 방법으로 뒤통수를 맞을 뻔 했다는 사실에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있었다.
방심? 모르겠다. 엘리시온의 운영권을 넘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포트니아 테론이 보여준 일련의 행동은 그가 지니고 있던 의심을 떨쳐내기에 충분한 것들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의심이란 것은 끝이 없게 마련이다. 그가 무조건 다른 이들을 의심하고 자신의 틀 안에 가두는 일만을 반복했다면 과연 지금처럼 모든 신들의 자발적인 추대로 주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이번 일을 공론화시키고 자신들의 일처럼 추진해서 마침내 결과에 이르도록 만들어준 자신의 반려들을 받아들이는 일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실수는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실수로부터 무엇을 배우느냐 역시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형진의 약점일 수도 있었다. 그는 너무 빠른 시간 동안 너무나 빠르게 성장한 탓에 실수를 하고 그것을 통해 배우는 과정이 상대적으로 너무 적었다. 실수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운이 좋았던 것도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눈에는 이제까지 그녀가 인간 상태일 때는 찾을 수 없었던 약점이 명확하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혹시나 이것 역시도 무언가를 노린 함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눈앞에 선연하게 드러나는 약점을 보면서까지 그런 의심을 이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도록 내몬 것일까.
아직 그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바라는 대로 처결을 해버린다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형진은 천천히 자신의 신격을 개방했다. 그의 몸으로부터 뭉클거리는 밤의 힘이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주위를 집어삼킨다. 그의 감각이 닿는 모든 시간과 공간이, 이 순간 밤의 영역으로 선포되었다.
유아의 출산조차 지켜보지 못하게 만들었던 사색의 시간. 모두들 그 과정을 통해 그의 신격이 확장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실제로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형진은 그런 자신의 변화를 깨달아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격 그 자체의 변화라기보다는 그것을 위한 준비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이미 밤이라는 신격은 일반적인 신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어둠이라는 의미를 벗어나, 그 안에 우주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이미 밤이라는 신격에 그 정도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처음 밤의 신격을 깨달았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담아낼 수 있는 밤의 의미는 매우 한정적이다. 이것은 신격의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라는 존재 자체의 그릇이 아직 그 모든 의미를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거쳤던 사색의 시간은 바로 그것을 이루기 위한 준비였다. 그리고 그 준비가 마쳐져 깨어난 시점에서 그의 존재는 완만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신격의 확장을 이루는 것처럼 급격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과 더욱더 커다란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변화였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우주 전체로 뻗어나갈 때마다, 형진은 단순히 힘의 절대량만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성장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찌 보면 언데드의 힘을 정제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도 그런 완만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자연스런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진이 지금 포트니아 테론에게 드러내 보인 것은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
포트니아 테론은 눈을 떴다. 그가 자신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아 버린 것이다.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인지 능력으로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심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포트니아 테론은 작게 탄식하고 말았다.
“아아… 자네는… 이미 나에게서 근원을 얻을 필요조차 없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인가.”
형진이 포트니아 테론의 진면목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형진의 진면목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충격의 크기는 포트니아 테론 쪽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우주의 처음을 함께한 존재. 그 유구한 시간의 흐름은 감히 측량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다.
그에 반해 눈앞에 펼쳐진 심연 어딘가에 자리 잡은 이 신은 그녀의 관점으로는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존재일 뿐이다.
그런 존재가 어느 틈엔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크고 거대한 존재로 변화해 있었다.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지금의 이 상태만으로도 놀라운데, 그는 아직도 성장해 가고 있었다. 힘의 크기, 존재의 크기, 그리고 신격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도대체 어디가 끝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크게 성장해 가고 있었다.
당장 지니고 있는 힘의 절대량은 포트니아 테론 쪽이 더 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성장세를 생각한다면 바로 내일이라도 그는 자신 따위는 올려다 보지도 못할 정도의 존재로 거듭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그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 하하…”
포트니아 테론은 허탈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겠다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를 여전히 자신의 발아래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런 식의 인식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자신의 오만함을.
“묻겠습니다.”
심연 속 어딘가에서 형진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말하게. 아니… 말하십시오.”
그녀는 더 이상 형진에게 하대를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자신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 자리에 올라선 주신이었다.
신들의 정점. 자신마저 포함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의 정점.
“당신의 죄가 무엇입니까.”
“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과정이다. 이것은 또한 절차이다. 주신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신들의 우두머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을 대표하고, 그들을 대신해 사리를 판단하는 중대한 책임과 의무를 지닌 자리다. 아직 오르지 않았으면 모르되, 그 자리에 올라선 이상 형진에게는 정당한 절차를 따를 의무가 있었다. 지금의 문답은 바로 그것을 위한 절차이며 또한 과정이다.
“저는 자식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시온에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함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포트니아 테론은 문득 말문이 막혔다. 뭔가 더 있을 것도 같은데, 막상 그것을 털어놓고자 하니 제대로 떠오르지가 않는다. 마치, 지금 눈앞에 펼쳐진 심연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가 말을 이어가지 못하자, 형진은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말했다.
“당신의 가장 큰 죄는 그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럼…”
“당신의 가장 큰 죄는, 자신을 부정하려고 한 것에 있습니다.”
“…”
포트니아 테론은 문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형진은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보통의 존재가 아닙니다. 이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이기에, 당신은 스스로의 존재를 보다 소중하게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를 보고 배우는 법. 당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아이들 또한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 여길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형진의 말에 포트니아 테론은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이 형진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은 항상 모든 행동에 있어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 자신이 낳은 아이들은 물론이고, 다른 종족이나 다른 세상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이라면 그저 껌뻑 죽는 그런 팔불출이다.
지금 그가 언급한 죄라는 것도 결국 그런 기준에서 나온 말이다. 어미인 그녀가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살이나 다름없는 방법으로 생을 맞이한다면, 그것을 아이들이 알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니, 당장 자신의 운명을 맡기려 했던 형진조차 어찌 보면 그녀의 자식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자식에게 자신의 목숨을 취하라 강요하는 부모라니. 최악이다. 그야말로 더 이상 비교의 대상조차 없을 정도로 최악의 부모다.
“그렇군요… 그것이, 제가 저지른 가장 큰 죄였군요.”
포트니아 테론은 허탈한 기분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아니, 그렇게 하고자 했으나 문득 어딘가에서 강인하고 탄탄한 손이 그녀의 몸을 붙잡으며 부축했다.
“우선, 엘리시온에 마련되어진 함정을 없애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아플지도 모르겠군요.”
갑자기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인간으로 치면 심장이 위치하는 자리에 자리잡은 근원을 덥석 움켜 잡았다.
“크윽!”
눈을 감고 앞섶을 풀어 헤쳤을 때는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잠시 동안 다른 생각으로 인해 방심하고 있는 순간, 느닷없이 그의 손이 뻗어나와 근원을 움켜쥐어 버렸다.
포트니아 테론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또한 깨달았다.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녀는 바로 알아차려 버린 것이다.
“무, 무슨…”
엘리시온에 마련되어진 이런 저런 것들은 결국 그녀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기 위해서는 근원을 손에 넣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하지만 형진은 그런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을 버려두고 복잡하고 어려운 방법을 택했다. 그녀의 근원에 얽혀있는 그 모든 것들을 자기 입맛대로 뜯어고치는 일을 시작해 버린 것이다.
“아아…”
그의 의지가 마치 농락하듯 그녀의 근원을 제멋대로 휘저어 댄다. 포트니아 테론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상황과 그것으로 통해 느껴지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형진은 그렇게 한참이나 그녀의 근원을 농락하다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손을 떼었다.
“끝났습니다. 이제 엘리시온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나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
그것만이 아니다. 포트니아 테론은 형진이 손을 댄 것이 엘리시온과 관련된 무언가만이 아님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나에게… 뭘 한 겁니까.”
그녀의 물음에 형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별 것 아닙니다. 당신의 근원이 스스로 언데드의 힘을 정제하여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당신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게 무슨…”
“언데드의 힘은 본래 수많은 사념들의 집합체. 그 자체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정신이 모여 화석처럼 굳어진 것. 우주 전체로부터 모여든 매우 강대한 힘이지만, 신이 접하게 되면 그 막대한 사념에 의해 오염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타락의 진정한 의미. 그것은 또한 태초의 어머니라 불리는 당신 역시 다를 바가 없는 일이죠.”
“…”
포트니아 테론은 잠시 멍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한 것이다.
“아니, 나는… 내가 엘리시온에 그러한 것을 만든 것은…”
지금 형진은 그녀가 저지른 모든 죄가 바로 언데드의 힘에 잠식되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녀가 엘리시온에 그와 같은 안배를 해둔 것은 언데드의 힘을 받아들이기도 전의 일.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일의 선후 관계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당연한 것을 형진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순간 그것이 진실이라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 안에 깃든 의도, 어찌 포트니아 테론이 알아차리지 못하겠는가.
천천히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밤의 권능이 사라져 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형진은 노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원해서 태초의 어머니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는 저에게 주십시오. 원해서 주신의 자리에 올라선 제가, 당신이 떠안고 있던 모든 것을 물려받겠습니다. 그것이 주신으로서 포트니아 테론이라는 이름의 신에게 내리는 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알겠… 습니다.”
포트니아 테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