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90
-10890
주민들에게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은, 어둠이 완전히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을 뒤덮어 버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기르고 있는 작물이나 가축들에게는 영향이 가지 않도록 조치가 취해졌다는 점이다.
“번거롭긴 하지만, 이렇게 하면 만에 하나라도 빛의 신이 이곳에 개입할 가능성은 일단 최소화할 수 있겠지.”
기존의 것과는 다르게, 하늘 위에서 지상을 밝히고 있는 것은 일종의 인공 태양이라 할 수 있었다. 허세와 망상의 힘으로 구현된 환상과 반지와 거울의 권능을 결합해 만들어낸 그것은 이를테면 형진이 속한 우주에 존재하는 항성의 빛을 끌어와 비추는 등대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본래 이것은 스틱스처럼 거대한 항성간 우주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기술이다. 항성간 우주선이란 것은 일반적으로 초광속 항해를 통해 각 항성 사이를 움직이는 우주선이지만, 때로는 주위에 인접한 항성이 없는 공백 지역에 머무르게 될 수도 있다. 지금 이 행성에 모습을 드러낸 인공 태양은 그런 상황에서도 낮과 밤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의 일종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어서 개발해 놓고도 실제로 스틱스에서 사용되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기술이 전혀 쓸모가 없어져서 사장되었느냐면 그건 아니다. 대신 항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탓에 일조량이 부족한 외행성의 테라포밍 용도로 방향을 틀어 계속해서 개발이 이루어지는 중이었고, 지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인공 태양은 그런 연구의 결과로 만들어진 시험작인 셈이었다.
“온실효과 같은 것이 일어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군.”
“만에 하나라도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을 쓰겠습니다.”
인공 태양의 설치를 위해 스틱스에 방문한 반지와 거울은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형진의 힘이 훨씬 더 강해진 것을 느끼고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반지와 거울 역시 처음 엘리시온을 나설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갖춘 상태였지만, 지금의 형진 앞에서는 그야말로 내리 쬐는 한여름의 태양빛 아래 선 반딧불 같은 느낌이나 다름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개척 교단이라도 찾아 나설 걸 그랬다.
그의 친구였던 우산과 구유가 여신인 뱀과 깃털을 아내로 맞이해 개척 교단으로 나선지도 제법 오래 되었다. 처음에는 꽤 고생했던 모양이지만, 이제는 제법 기틀이 잡혀서 떵떵 거리고 있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는 한번 들르라고 초대도 왔었지만, 신혼부부가 알콩달콩 살아가는 곳에 홀몸으로 찾아가는 것도 뭔가 뻘쭘한 일이라 사양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지금 반지와 거울은 차라리 초대에 응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죄다 바니걸 복장을 한 비서들과 함께 노닥거리고 있는 형진의 모습을 보느니, 초대에 응했다면 깨소금 쏟아지는 신혼부부를 훼방 놓는 재미라도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 해도 바니걸 복장의 비서들에게 자꾸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그도 피 끓는 총각 신이니까.
이럴 때 솔로는 더욱 괴롭다.
형진은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 채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고했다. 모처럼인데 잠시 쉬었다 가는 건 어떤가. 허세와 망상님에게는 내가 말해 두도록 할테니.”
하지만 반지와 거울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굳이 그러실 것까지는. 급히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그래? 정 그렇다면야 상관 없지만.”
은근한 말투와는 다르게 번쩍이는 시선이 날아들자, 반지와 거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얼른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살펴가도록.”
반지와 거울이 허둥지둥 도망치듯 눈앞에서 물러나자, 차를 따르던 아란이 특유의 눈웃음을 지은 채 형진에게 말했다.
“심술쟁이.”
“내가? 왜?”
“일부러 떠본 거잖아요. 당연히 거절할 걸 알면서.”
“당연하지. 감히 내 마누라의 예쁜 엉덩이를 훔쳐보고 있는 걸 그럼 가만히 두고 봐?”
그러면서 형진은 손을 뻗어 아란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꺄앗! 다, 다들 보잖아요.”
“그게 뭐 어때서. 내 마누라 엉덩이 내가 만지겠다는데.”
“아유 참. 변태…”
물론 그렇다고 몸을 빼거나 하진 않는다.
아란과 형진이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자, 한쪽에서 뭔가를 정리하던 미아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와 선다. 규설과 힐리에타는 자신들도 동참해야 하나 싶었지만, 여신들이 뻔히 보고 있는 와중에 그런 노골적인 제스쳐를 보이는 것도 뭔가 난감한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리페는 왜 아직까지도 안 보여?”
당연하다는 듯이 미아의 엉덩이로도 손을 뻗는 형진의 모습을 모른 척 하며 아란이 답했다.
“그게… 아무래도 아직 고민중인가 봐요.”
“뭘?”
“이 옷, 입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풉. 하여튼 쓸데없는 데서 고집이라니까.”
과연 누가 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건가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논쟁의 여지가 있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형진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리페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뱀과 깃털 얘기를 꺼낸 건 저 아래 있는 종족들의 신이 그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가요?”
아무래도 그 얘기를 계속 해나가는 건 스스로도 난감했던 모양인지 아란이 그렇게 말을 돌렸고, 형진은 모르는 척 그녀의 의도에 따랐다. 물론 그 와중에도 손은 멈추지 않고 있었지만.
“겸사겸사. 물론 정확한 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애초에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 종족들은 일종의 노동자 계급이라 할 수 있었다. 열두 종족 같이 성세를 이루고 있는 종족들은 굳이 이렇게 기반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균열이라는 위험한 곳 근처의 행성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빛의 성전 쪽에는 열두 종족 중에서 파견된 이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이번에 형진에게 편입된 행성들의 전체 주민수에 비하면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의 외모를 보고 뱀과 깃털을 떠올리긴 했는데, 역시 정확한 건 확인해 봐야 알 일이겠지.”
“그렇군요.”
사실 이곳의 소수 종족은 뱀보다는 도마뱀이나 악어 쪽이 더 비슷한 느낌이긴 하다. 찾아보면 그런 쪽의 수호신도 있지 않을까 싶긴 한데, 일일이 찾아서 데리고 오는 것도 일이라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른 뱀과 깃털을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연락을 받은 뱀과 깃털은 곧바로 스틱스로 찾아왔다.
“밤의 신을 뵙습니다.”
“빨리 왔군. 그래, 카르모네의 일은 순조롭게 잘 진행 중이고?”
카르모네는 우산과 구유, 뱀과 깃털의 두 신이 자리잡은 세계로서 형진이 지어준 이름이기도 하다.
“살펴 주신 덕분에 큰 문제는 생기지 않고 있습니다.”
“다행이야.”
새색시라 그런지 다소곳한 모습마저 보이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녀는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는 중이다. 형진의 호색함은 이미 신들에게 정평이 나있는 상태. 설마 자신에게까지 손을 뻗겠나 싶은 생각이 들긴 해도,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으니 역시나 조금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실은 말이지.”
하지만 형진은 그런 우려와는 달리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네? 그런 일이… 가능한 건가요?”
“나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긴 하지만, 이미 두 번이나 선례가 있으니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
그렇게 대답한 뒤 형진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되든 안 되든, 밑져야 본전 아니겠나. 비록 소수 종족이라고는 해도, 한 종족의 신이 된다는 건 상당한 이점이 있는 일이지. 이미 개척 교단을 꾸려가고 있으니, 굳이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물론입니다.”
처음부터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열두 종족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이들 종족의 수 역시 상당한 숫자이니, 당장의 쪼들리는 살림에 큰 도움이 될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만나보도록 하지요.”
형진은 바로 파충류 모습의 소수 종족을 데려다가 여신과 만남의 자리를 갖도록 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납치하듯 끌려온 주민은 뱀과 깃털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쉽군.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야.”
“죄송합니다.”
“아니, 미안해 할 것까지는 없고.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헛된 기대를 갖도록 만든 것에 대한 보상으로 형진은 저리에 공헌도를 대출해 주기로 하고 뱀과 깃털을 돌려보냈다. 아직 교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신이라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은 신에게 공짜로 막 퍼주고 그럴 형진이 아니다. 어차피 빨대를 꼽고 있는 상황이니, 어찌 보면 이중 과세로 볼 수도 있는 일이지만 뱀과 깃털은 그나마도 급한 불을 끌 수 있다는 생각에 감지덕지 하며 자신의 교단이 있는 카르모네로 돌아갔다.
“이거 난감 하네. 그렇다고 엘리시온의 신들을 죄다 불러 올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자 어느 틈엔가 형진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미아가 물었다. 리페가 자리를 비운 틈에 냉큼 본래의 자리를 되찾아 버린 것이다.
“급한 일은 아니지 않아요?”
“수가 적으니까?”
“네.”
언제부터 이곳만 따져도 백만 이상이고, 다른 곳에 흩어져 있는 수를 생각하면 수천만 이상도 될 정도의 종족을 적다고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보호와 균형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졸부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졸부 남편에 졸부 아내라니.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당장 눈앞에 놓여져 있는 것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문제는 앞으로도 우리들은 무려 마흔 개가 넘는 종족들과 마주해야 해. 물론 이것도 누에들과 접촉이 있었던 종족만을 따진 것이니 실제로는 더 많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때마다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면, 미리미리 대책을 세워 놓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하. 그런 거군요.”
역시 우리 남편은 대단해라는 느낌으로 여전히 바니걸 슈트를 입은 채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아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특정 부위마저 뿌듯해지는 느낌이다.
“그럼…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그때, 조용히 한쪽에서 일하고 있던 규설이 마치 선생님께 질문하는 학생처럼 손을 들고 말을 꺼냈다.
“좋은 의견이 생각났나? 어디 말해 보도록.”
형진이 허락하자 규설은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고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엘리시온에 속한 여러 신들을 새로운 종족과 마주할 때마다 불러 모으는 것은 매우 번거롭고 또한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자칫 그것이 관례로 정착되면,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진 자의 좋은 목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과연. 타당한 말이다. 솔직히 나로서도 걱정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이 기회에 이곳에 새로운 신전을 짓는 것이 어떨까요.”
“신전?”
순간 형진은 머리 속에 반짝 하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과연! 그런 생각이로군. 훌륭해. 아주 좋은 의견이다.”
“과찬이십니다.”
그러자 아란이 물었다.
“신전에 각 신들의 성물을 비치하실 생각이신 건가요?”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굳이 신들과 직접 대면할 필요는 처음부터 없는 일이었어. 꽃과 바람이나, 여기 미아의 일 때문에 나도 모르게 고정 관념에 사로잡혔던 모양이야.”
원래 대부분의 좋은 아이디어라는 것은 말로 표현되는 순간에야 왜 그걸 진작 깨닫지 못했나 싶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덕분에 번거로운 일 하나를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원하는 바가 있다면 말해 보도록.”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형진이 그렇게 말하자, 힐리에타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규설이 뭘 원하고 있는지는 뻔히 다 알고 있는 사실.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규설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 표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말할 걸.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울상을 짓고 있자니, 규설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럼 외람되오나…”
그리고는 슬며시 돌아서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 저도… 만져 주세요.”
형진의 눈앞에 드러난 그것은 뽀얀 규설의 엉덩이였고, 그걸 보는 순간 힐리에타는 자신도 모르게 책상에 얼굴을 처박으며 마음 속으로 외쳤다.
‘바보냐!’
…라고.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