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03
1103화
일기당천(一騎當千).
불과 몇 년 전의 나는, 저 네 글자에 담긴 뜻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헐값으로 산 중고 장비로 무장하고, 최하급 포션조차 넉넉히 살 수 없었으며, 게이트(Gate)라 불리는 아공간 속 어둡고 습한 동굴과 그곳에서 마주치는 수십여 마리의 소형 몬스터만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많은 것이 뒤바뀌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이.
퍼걱!
본능처럼 휘두른 녹슨 철검이 측면에서 다가오던 적의 정수리를 파고든다. 두개골이 갈라지고 선홍빛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투툭.
뺨을 통해 전해지는 끈적하고 뜨거운 감촉.
예전이었다면 그 섬뜩한 감촉에 한 번, 그리고 곧이어 콧속을 파고드는 역한 냄새에 또 한 번 소스라쳤을 것이다.
하지만 난생처음 맡아 보는 끔찍한 피비린내를 참지 못하고 한바탕 속을 게워 냈던 초짜 헌터는, 이제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푹!
정면에서 달려드는 적의 목울대에 검신을 쑤셔 박고, 그대로 비틀며 뽑아낸다. 쩍 벌어진 살갗 사이로 핏물이 쏟아졌다.
크륵.
피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부르르 떨리는 몸뚱어리.
그러나 이미 오랜 세뇌와 잠력단이 주는 힘에 취한 광신도들에게 있어, 동료의 처참한 죽음은 순교(殉敎)이자 내 빈틈을 노릴 또 다른 기회일 뿐이다.
쉬쉬쉭!
사방에서 핏빛 검기가 빗발친다. 마치 하나의 그물처럼 뒤얽힌 그 촘촘하고도 파괴적인 기운이 내 전신을 뒤덮는다.
아니, 분명 저들의 눈에는 그리 보였을 것이다.
팟.
한 걸음.
단 한 걸음 만에 적들과 나 사이의 공간이 지워진다.
회전하는 신형과 함께 손에 들린 철검이 완벽하면서도 치명적인 궤적을 그려 냈다.
슈확!
일순간, 세상이 멈춘 듯했다.
물러서기는커녕, 되려 자신들의 중심으로 파고든 내 존재를 인식한 적들의 눈동자가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콰아아앙!
이미 놈들의 손끝을 떠난 검기의 폭발음과 함께, 수십여 개의 목이 폭죽처럼 솟아올랐다.
서걱, 푸화아악!
붉다.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시야가. 온 세상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모든 감각과 신체기관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쉭.
비스듬히 내리그은 검의 궤적에 걸려든 모든 것이 갈라진다.
서서히 높아져만 가는 시체의 산 위를 가로지르는 내 발걸음을 따라, 찐득한 핏물과 그보다도 짙은 비명이 흘러넘쳤다.
퍼걱! 푸푸푹!
막힘없이 베고, 찌르고, 찍었다.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때로는 도끼, 때로는 검, 혹은 특이한 형태를 지닌 철퇴나 낫과 같은 기병(奇兵)이더라도 그 본질은 결국 살생을 위한 무기였으니까.
콰드드득!
피와 살점이 뒤섞인 폭풍이 휘몰아쳤다.
서녕의 병기고 깊숙한 곳에 처박혀 붉게 녹이 슬어 가던 무기들은 내 손아귀에 잡힌 그 순간 장인의 피땀이 스며든 명기(名器)로 변모했고, 검기에 의해 부러질지언정 기어코 그 본분을 다했다.
주인의 뜻에 따라, 적들의 목숨을 앗아 가는 것으로.
……!
……!!
전후좌우를 둘러싼 적들의, 머리 위 성벽에서 쏟아지는 아군의 고함이 사방을 울린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나는 정확히 분간할 수 없었다.
극도로 날 선 감각을 통해 모든 소리를 받아들여야 할 귓가는 먹먹했고, 두 눈으로 보는 세상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면서도 선명했다.
지금껏 쓰러트린 적들의 숫자도, 부러진 무기의 개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심득(心得).
지금의 나는 또 다른 깨달음을 향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물론, 나 자신조차 잊어버리는 무아(無我)의 안개에 휩싸인 채 생과 사가 오가는 전장을 누비고 있었다.
‘더, 조금만 더.’
나는 홀린 듯이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어느샌가부터,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꿈결처럼 몽롱하게 느껴진다.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감각이 전류처럼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미 과거에도 느껴보았던 감각.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무아지경의 감각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와라.’
마음속에서만 울려퍼진 그 나직한 속삭임을 들은 듯, 적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든다.
천상천하 만마앙복. 저주와도 같은 그 여덟 글자의 교언(敎言)을 읊고, 고함을 토해 내고, 온 힘을 다해 손에 쥔 병장기를 흩뿌리면서.
동시에 그들 모두가, 한 줌의 고혼(孤魂)이 되었다.
서걱, 서걱, 서걱.
옛 신화 속에 등장하는 선지자가 이러했을까.
거침없이 나아가는 발걸음을 따라 모든 것이 갈라진다.
내 앞에 놓인 것은 결코 바다가 아니었지만, 적들이 뿜어낸 핏물은 파도처럼 휘몰아쳤고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홍해(紅海)였다.
그리고 좌우로 흘러넘치는 이 붉은 파도 끝에는, 나를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줄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할 수 있다. 분명히.’
점차 흐릿해져만 가는 이성 위로 본능이 덧씌워진다.
뒤에서 휘둘려진 적의 칼날을 보지도 않고 피해 내고, 측면과 정면에서 달려드는 다섯 명의 적들을 일수에 베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나는 불현듯 찾아온 이 꿈결 같은 감각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이 꿈은 오직 나만의 것이었고, 어느 때보다 달콤한 단잠이었다.
설령 꿈에서 깨어난다 할지라도, 이 이야기의 끝을 볼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는 깨달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든다면, 언제라도 지금과 같은 단잠에 빠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잠시 망각하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꿈을 꾸는 이가 있다면, 그 꿈을 깨우는 자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쉬이이잉!
주위의 모든 소음을 그저 머나먼 메아리처럼 받아들이던 귓가로 전해지는 한 줄기의 파공성.
그것에 담긴 맹렬함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그 거대한 힘이 나를 강제로 꿈에서 끄집어내어 현실로 내던졌다.
허공 어디에선가 불현듯 터져 나온, 채 끝맺어지지 못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피하……!”
바로 그 순간.
화악.
내 정신과 몸을 지배하고 있던 무아의 안개가 삽시간에 흩어졌다.
아니,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서 내달려온 핏빛 섬광이, 그 눈부신 찰나의 번뜩임이 시야를 찐득하게 물들였다.
“……!”
나도 모르게 두 눈이 부릅떠진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 적색 경종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미 늦었다고. 이건 피할 수 없다고.
그만큼 나를 향해 쏘아진 섬광은 소름이 끼치도록 빨랐고, 단잠에서 깨어나 현실로 곧장 내동댕이쳐진 내 움직임은 그 속도를 온전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보다 반 박자 앞서 위험을 경고한, 어쩌면 줄곧 내 안위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누군가와는 다르게.
슈확!
느려진 세상 속,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한 사람의 신형이 내 망막에 비친다.
어느덧 내 코앞까지 다가온 섬광을 가로막는 새하얀 검신과, 꽃잎처럼 흩날리는 자줏빛의 검강(劍罡)도 함께.
‘청풍(靑風).’
정지되어 있던 사고 속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 순간.
콰아아아앙!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충격파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 * *
쿨럭.
사방을 뒤덮은 희뿌연 먼지구름 속, 메마른 기침을 토해 낸 진태경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아직, 살아 있는 건가?’
문득 뇌리에 떠오른 의문.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곧장 되돌아왔다.
바늘처럼 전신을 들쑤시는 크고 작은 통증과 오직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시스템 알림으로.
아니, 정확히는 경고음이라 부르는 것이 옳았다.
삐빅! 삐비빅!
쉴 새 없이 귓가를 파고드는 경고음을 애써 무시하며, 진태경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투두둑.
몸뚱어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돌가루.
무겁고, 아팠다.
모든 감각이 최고조에 다다라있던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돌연 깨어나서일까.
육신은 물을 머금은 솜뭉치처럼 축 늘어져 있었으나, 앞서 줄기차게 울려 퍼진 경고음 세례와는 달리 큰 부상은 없는 듯했다.
물론 그럴 수 있던 것도, 마지막 순간 그를 대신해 섬광을 가로막은 한 사람의 도움 덕분이었지만.
“청 소협.”
지치고 갈라진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지만,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먼지구름 속에서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신음만 곳곳에서 울려 퍼질 뿐이었다.
“……청 소협?”
몇 번을 불렀음에도 되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문득 엄습해 오는 불길함.
크게 심호흡한 진태경은 어느새 너덜너덜해진 옷소매를 흩뿌렸다.
퍼엉!
압축된 공기가 폭발한다. 공력이 실린 바람이 자욱하던 먼지구름을 일부나마 몰아내자, 그 너머에 감추어져 있던 광경이 비로소 실체를 드러냈다.
장정 다섯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공백을 훤히 드러낸 성벽과 사방에 널브러진 채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고 있는 아군의 모습을.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청풍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진태경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이미 무너진 성벽의 잔해과 먼지구름을 뚫고 돌격해오는 적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그들의 등 뒤에 남아 있는 자신의 애병을 향해.
우우웅.
중단전(中丹田)이 열린다. 나직한 공명음과 함께 지면 깊숙이 박혀 있던 한 자루의 창이 힘차게 솟구쳐 주인의 손아귀로 되돌아갔다.
그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모조리 관통하며.
콰드드득!
솟구치는 피 분수.
한껏 기세를 올리며 돌격하던 수십여 명의 적들이 썩은 통나무처럼 쓰러지고, 그 틈을 타 진형을 갖춘 아군이 온 힘을 다해 찰나의 공백을 메웠다.
차차창!
푸푹!
“크아악!”
“막아라! 단 한 놈도 들여보내선 안 된다!”
“쿨럭, 궁수! 궁수들은 어디 있나!”
삽시간에 번져 가는 극심한 혼란.
그리고 무너진 성벽을 둘러싼 난전(亂戰)이 시작된 그 순간에도, 진태경은 온 힘을 다해 적들을 베어 내며 한 사람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청 소협! 청풍!”
하지만 모든 감각을 끌어올려 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적과 아군이 토해 내는 비명과 고함만이 사방에서 난무할 뿐, 그 빌어먹게도 천진난만한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지고, 매 순간마다 숨이 막혀 올 정도로.
‘……설마.’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청풍은, 그 녀석은 이렇게 쉽게 쓰러질 놈이 아니니까.
마치 동화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어떻게든 살아남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놈이니까.
그런데 어째서일까.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더욱더 무겁고 짙어지는 것일까.
“이…… 개자식들아!”
분노에 가득 찬 고함과 함께, 진태경은 적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건 지금의 이 모든 사태를 만든 침략자들을 향한 분노인 동시에, 깨달음을 얻기 위한 일념에 사로잡혀 있던 멍청한 자신에 대한 자책이었다.
그리고 적들 사이를 누비며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그 눈부신 창날의 끝은, 느린 발걸음으로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한 사람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바로 그, 혈주(血主)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