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04
1104화
철벅. 철벅.
피와 빗물. 그리고 무수한 시체로 뒤덮인 지면을 가로지르는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도 무겁게 울려 퍼진다.
수만.
아니, 적아를 통틀어 물경 십만을 넘어서는 이 거대한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우우웅.
나아가는 발걸음을 따라 공간을 잠식해나가는 기운.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에서 쉼 없이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와 화살은 보이지 않는 기막(氣幕)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고, 앞서 무너진 서쪽 성벽을 향해 돌격해 가던 암천의 교도들은 좌우로 갈라져 부복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여덟 글자의 교언을 읊조리며.
“천상천하.”
“만마앙복.”
그것은 경의였다.
이 세상의 진정한 지배자이자 자신들의 신에게 바치는, 더불어 그런 그가 친히 은총을 내린 단 여섯 명의 사도(使徒)에게만 허락된 경의.
그리고 몇 사람의 작은 뇌까림으로부터 시작된 교언은, 곧 거대한 울림이 되어 전장을 집어삼켰다.
……!
……!!
하나의 파문이 물살로 변하고, 이내 파도가 되어 사방으로 휘몰아친다.
거센 빗소리도, 먹구름 사이에서 번뜩이는 천둥도, 심지어는 허공을 뒤덮으며 쏟아져 내리는 화살조차도 그들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교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이다! 쳐라!”
“발시! 일제 발시하라!”
서걱! 푸푸푹!
칼날의 번뜩임과 함께 곳곳에서 솟구치는 목.
뿐인가.
몸뚱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팔과 다리가 흙탕물 속에 처박히고, 섬광처럼 날아든 화살들이 등과 허리에 박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지가 날아가도, 등을 관통한 화살촉이 가슴을 통해 삐져나와도 그들은 꿋꿋이 교언을 이어 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드리워지는 그 순간까지도.
“천상천하, 쿨럭. 만마앙복…….”
털썩.
핏물을 쏟아내면서도 기어코 교언을 읊고 나서야 죽음을 맞이하는 교도의 모습에, 앞서 그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은 곤륜파의 도사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워, 원시천존이시여.”
도저히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광신(狂信)의 물결.
한데, 이처럼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광신도들이 곳곳에 가득하다.
아니, 이 광활한 전장을 새카맣게 물들인 적들 모두가 그러했다.
“이건…… 이건 도대체.”
누군가가 간신히 쥐어짜 낸 그 한 마디는 곧 모두의 심경이었고,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극한의 두려움과 경악이 묻어 있었다.
철퍽. 투두둑.
불현듯 힘이 풀린 손아귀에서 미끄러진 병장기들이 진흙탕에 처박힌다.
일순간 자신도 모르게 전의를 상실해 버린 몇몇 무림인들과 관군들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멍하니 적들을 바라보았다.
두려웠다. 몸서리가 쳐질 만큼 무서웠다.
거대하고도 흉포한 괴물들보다, 자신들과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한 저들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녔을 희로애락의 감정이 거세된 채, 맹목적으로 천주만을 따르는 저 미친 광신도들이.
그리고 그 중심이자 선두에, 핏빛 기운을 일렁이며 걸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병신 같은 것들.”
나직한 조소(嘲笑)와 함께 드러나는 새하얀 이빨.
그와 동시에, 혈주가 부드럽게 내뻗은 손끝을 따라 지면을 뒹굴던 무수한 병장기들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새로운 주인의 명령과 함께 쏘아졌다.
어느새 얼어붙어 버린 적들을 향해.
“네놈들은, 살아 있을 가치도 없다.”
그 순간.
파파파팟!
수백여 개에 달하는 병장기들이 단숨에 공간을 갈랐다.
무너진 성벽의 잔해를 휩쓸며 들이치는 강철의 파도.
그 아득한 섬광을 마주한 이들에게 더 이상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눈을 감을 시간도, 생애 마지막 숨결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다만 그저, 커다랗게 뜨인 눈으로 들이닥치는 죽음을 바라볼 뿐이었다.
불현듯 자신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의 열풍(熱風)을 느끼며.
고오옹.
공간이 일그러진다.
끔찍하리만치 거대한 열기가, 검푸른 색의 광염(光焰)이 모두의 시야를 물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화륵, 콰아아아!
강철의 파도와 불의 벽이 만났다.
서로를 향해 맞닿고, 부딪혔다.
그 안에 간직한 미증유의 힘을, 아득한 섬광과 울림을 온 사방에 토해내며.
쿠구구구궁……!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화산(火山)이 긴 잠에서 깨어나 포효한다면 이런 소리가 났을까.
아니면 태곳적 거인이 온 힘을 다해 숨을 토해내면 지금과 같은 폭풍이 휘몰아쳤을까.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반경 수십여 장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뜨겁게 달구고 밀어내는 그 강렬한 빛과 충격파 속, 철탑처럼 우뚝 선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래, 오직 너만큼은 살아있을 가치가 있지.”
나직이 뇌까린 혈주가 수도(手刀)를 내리긋자, 서쪽 성벽을 휘감은 먼지구름이 단숨에 갈라지며 그 안에 감춰있던 것을 드러낸다.
전신이 피와 빗물로 흠뻑 젖어있는, 그럼에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그를 향해 새하얀 은백색의 창을 겨누고 있는 청년을.
“그렇기에, 더더욱 네놈을 살려둘 수 없게 되었지만.”
혈주가 찬탄 섞인 음성으로 청년을 응시했다.
“열화신룡(烈火神龍) 진태경.”
그리고 그 순간, 굳게 다물어져 있던 진태경의 입술이 열렸다.
“기습숭배는 고맙긴 한데…….”
푸푹.
어느새인가 몸 곳곳에 박혀 있는, 불의 벽을 관통하며 날아든 날붙이의 파편을 망설임 없이 뽑아낸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니 새끼는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 그게 네가 뒈져야 하는 이유야.”
담담한 음성과는 달리 화염이 줄기줄기 쏟아지는 두 눈동자.
하지만 그런 진태경을 보며 혈주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가능하리라 생각하느냐? 그것도 지금과 같은 상태로?”
혈주의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당장 드러난 진태경의 몰골은 그 자체로 혈인(血人)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이는 지금껏 베어 넘긴 적들의 숫자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 역시 조금의 피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진태경 또한 분명 지치고 부상 입은 몸이었다.
지금 이 순간, 흡사 태산과도 같은 그의 등 뒤로 하나둘씩 몸을 일으키고 있는 다른 이들과 같이.
하지만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보다 앞서 이미 충분히 두려워했기에.
몸과 마음을 짓눌렀던 그 부정적인 모든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에.
하여, 서서히 다가오는 혈주를 보면서도 희미하게나마 미소지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너, 그거 알고 있냐?”
“그게 무슨.”
“네 잘난 친구들도, 전부 나한테 그 지랄 떨다가 뒈졌다는 거.”
“……!”
“그거 다 사망 플래그야, 인마. 아, 이건 어차피 말해 줘도 못 알아듣나?”
뜻 모를 소리와 함께 소리 내어 웃는 진태경의 모습에, 혈주의 입가에 맺혀 있던 비웃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얼간이들과는 다르겠지. 네놈을 어설프게 살려 줄 마음 따위는 이미 진즉 지워 버렸으니까.”
스아아아.
보보(步步)마다 올올히 피어오르는 핏빛 기운.
붉게 번뜩이는 혈주의 두 눈동자에는, 오직 진태경만이 또렷이 비쳤다.
“넌, 오늘 죽는다. 틀림없이.”
“천주가 들으면 기분 나빠 하겠네. 그래도 말 잘 듣는 개새끼라고 나름 이뻐하면서 키웠을 텐데.”
“그분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다. 오직 충심에서 비롯된 오늘의 이 선택을.”
“그래? 그냥 네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고?”
“뭐?”
일순간 걸음을 멈춘 혈주의 귓가로, 진태경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해 못 할 것 같으니까, 걸리면 엿 될 것 같으니까 일단 저지르고 보려는 거잖아. 혹시 몰라서 대술사까지 멀리 치워 버리면서.”
“……!”
“왜 토끼 눈을 하고 바라보냐. 토 나오게 생겨 먹은 새끼가. 누가 보면 꼭 꿀잠 자다가 귀싸대기라도 맞은 줄 알겠네. 이미 꿈속에서 대충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나?”
으득.
혈주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진태경의 도발적인 언사 때문이 아니라,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이 송곳이 되어 폐부를 들쑤셨기 때문이었다.
“너도 충분히 알고 있잖아. 네 주인이, 그 빌어먹을 천주가 뭘 가장 원하고 있는지.”
반박해야 했다.
자신이 신처럼 떠받드는 주인을 거침없이 모욕하고 그 저의를 의심하는 저 새파란 놈의 주둥이를. 지금 당장이라도 찢어 버리고 요사스러운 세 치 혀를 뽑아야 했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열화신룡 진태경.
놈의 잔망스러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모든 말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혈주 자신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니까.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심지어는 그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까지 이어져 온 모든 상황은 단 한 가지의 뼈아픈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네 주인이 무엇보다 원하는 건, 천하가 아니야. 너처럼 쓰다 버리는 사냥개들의 목숨 따위는 더더욱 아니고.”
귓속을 깊숙이 파고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뇌리를 뒤흔드는 저 목소리에 담긴 진실을.
“바로 나다. 오직, 나뿐이라고.”
“……!”
“그러니까, 어디 한번 죽여 봐. 이런 식으로라도 네 손을 빌려서 천주를 엿 먹일 수 있다면 난 뭐든 상관없으니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서서히 붉게 달아오르던 혈주의 두 눈동자가, 새하얗던 동공이 완전한 핏빛에 뒤덮인 것은.
그리고 반경 십여 장에 걸쳐 널브러져 있던 무수한 시체들이 울컥 핏물을 토해 낸 것은.
솨아아아악.
빗물과 섞여 있던 그것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한 사람의 발치로 모여들었다.
그와 동시에 어느덧 다시 나아가기 시작한 발걸음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고 뭉쳐지기를 반복하던 핏물이 종아리를 타고 전신을 감싸 안았다.
아니.
그대로 흡수되었다.
아주 오랜 과거부터, 본래 한 몸이었던 것처럼.
스아아아.
몸속 깊은 곳에서 끝없이 솟아오르는 강인한 생명력과 힘을 느끼며, 혈주(血主)는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유언, 잘 들었다.”
그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진태경이 입맛을 다시며 대꾸했다.
“그, 혹시. 조금 더 해도 될까?”
그 얼토당토 없는 물음에, 혈주는 대답했다.
거대한 핏빛 섬광으로.
쉬이이이익!
일순간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