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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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충류 모습의 종족인 보닉 출신의 추종자였던 카스툴을 끌어들일 때에 비하면, 무려 대성전의 최고 장로이자 스스로 빛의 신을 강림시켰던 존재인 네아의 교화는 어쩐지 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이 되고 말았다. 상대의 경계심을 허물고, 마음을 풀어놓기 위해 베풀었던 요리 한 방에 그대로 넘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설령 그럴 마음이 있더라도 너무 가벼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보통은 조금 튕긴다든가 하는 식으로 시간을 좀 끄는 것이 보통이건만, 네아는 그런 식의 일조차 시간 낭비라는 듯이 단숨에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밝혀버렸다. 뭐랄까. 이제껏 형진이 만나본 이들과는 사고방식도 행동방식도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다고 해야 하나.
“넌 이제까지 내가 만나봤던 이들과 많은 부분이 다르군.”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형진이 만나본 인물들 가운데 가장 독실한 신앙인이라면 역시 유아를 꼽을 수 있다.
유아는 어려서부터 신의 뜻을 받드는 것을 가장 커다란 목표로 삼고 자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아의 경우엔 상당부분 형진에게서 영향을 받은 면이 많은 것도 사실. 결국 이 정도로 오직 신이나 종교에 헌신하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존재는 어쩌면 처음 만나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실제로 신이라는 존재와 소통하고 피부로 느끼는 관계에 있는 자들과, 관념적으로만 섬길 수밖에 없는 이들의 차이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따지고 보면, 희망과 생명 역시 사실상 신도와 추종자들을 방치해 둔 상태였다. 결국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기 어려울수록 광신도는 만들어지기 쉬운 건지도 모르겠다고 형진은 생각했다.
“이걸 살펴보도록.”
형진은 품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들었다.
“이건…”
“계약서다. 너와 내가 비록 신과 추종자라는 관계로 묶이게 되었지만, 나는 그것이 반드시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지배의 관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계약서는 너와 내가 신과 추종자로서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기 위한 것이다.”
“책임과… 의무.”
“그래. 일단 확인해 보도록.”
네아는 형진이 건네주는 서류를 받아들면서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거침없이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에게 자신이 어떤 식으로 봉사할 수 있는 지를 스스로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
그런데 다른 세계에서 온 눈앞의 신은 스스로 책임과 의무를 논하면서 이것이 서로에게 해당되는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개념은 이제껏 빛의 신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서 감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다.
계약서에는 근무시간을 비롯해, 어떤 식으로 신에게 봉사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또한 신의 뜻을 받들고 수행함에 있어서 만에 하나 다치거나 손해를 입는 경우가 생겼을 때의 보상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신을 위한 무조건적인 희생이 당연시되던 지난 삶과는 뭔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보상으로 받은 공헌도는 필요하다면 현세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재화로 바꾸는 것도 가능해. 물론 인벤토리라든가 스킬 같은 것을 습득해서 여러 가지 임무에 대응할 수 있도록 스스로의 능력을 키우는 것도 가능하지. 노력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자신의 격을 높여갈 수 있다는 얘기야.”
찻잔을 기울이며 느긋하게 설명을 이어가는 형진의 모습에 네아는 문득 앞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씀은… 혹시 저도 신이 될 수 있다는 뜻인가요?”
“흠… 신이 되는 건 단순히 능력이 출중하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야. 설령 자격을 갖추었더라도 다른 신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렇게 인정을 받았어도 스스로 신격을 깨달아야만 해. 가능은 하지만,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지. 물론 이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긴 하겠지만.”
“그렇군요.”
형진이 네아를 두고 이제껏 만나본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느꼈던 것처럼, 네아 역시 지금 눈앞의 사내가 자신이 알던 신과는 다르다고 다시 한 번 느끼고 만다. 단순히 수직적으로 연결되어 무조건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과 의무를 가지는 쌍무 관계를 전제로 관계를 맺고, 다시 노력하면 자신과 같은 신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적어도 그녀가 속해있던 우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래 자빠질 만한 일이건만, 형진은 아예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버렸다.
“만약 네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나는 너를 전폭적으로 지원할 생각이 있다.”
“네? 그게 무슨…”
“신 말이다. 되고 싶은가?”
“…”
이것은 실로 파격적인 대우이다. 아직 자신의 가족들조차 모두 반신으로 올려놓지 않은 상태이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네아는 그런 사정까지는 아직 다 알지 못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순간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 그건…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네아는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그렇게 말을 더듬었지만, 형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게다가 너에 대한 단순한 호의에서 하는 제안도 아니다. 나는 네가 속한 우주가 빛의 신이라는 유일신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나와 내 아내들이 등장함으로 인해 그 유일성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다른 우주로부터 온 자들. 본래 이 우주에 속한 자들에게는 이물질에 불과할 수도 있어. 그렇지 않은가.”
“그건…”
이물질이라니. 너무나도 적나라한 표현에 네아는 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 정도까지 다르다면 앞으로 그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네가 필요한 것이다. 너는 본래부터 이 우주에 속한 자이고, 또한 빛의 신에 버금가는 명성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빛의 신을 그 몸 안에 강림시키기도 했고, 어찌 보면 빛의 신을 신앙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신과 동일시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위치라 할 수 있지.”
“그,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너야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신앙이라는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물론 너처럼 깊고 탄탄하며 또한 순수한 신앙을 지니고 있는 이들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일반적인 신도들에게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신보다 그들의 상징이나 성물, 그리고 그것을 대표하는 자들이 신과 동일되는 경우가 세상에는 의외로 꽤 많거든.”
지구의 여러 종교들만 보더라도 초기에는 우상이니 뭐니 하는 걸 배척하던 종교들이 이른바 신상이나 성물, 그 외의 여러 상징들을 내놓는 이유도 결국은 그래서다. 일반 민중들에게는 시시콜콜한 교리보다, 때로는 죽은 성자의 유물이나 손가락뼈가 더 가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형진이 다른 신과 계약을 맺는 즉시 우선 성물부터 신전에 들여놓는 것도 결국 마찬가지 이유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넌 빛의 신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파괴력을 지닌 한 자루의 비수와도 같은 존재인 셈이지. 네가 신으로 올라서는 순간, 내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보다도 더 강력한 위력으로 빛의 신이 지닌 유일성은 타격을 받을 테니까. 아니, 사실상 유일성이라는 말 자체가 소멸되어도 이상하지 않게 되어 버릴 거야.”
“…”
네아는 어느새 자신의 옷자락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전율이 극에 달해 전신으로부터 진땀이 배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흔히 전쟁이란 강력한 무기나 병력의 우위를 갖추는 것이 승리를 일궈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지.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전쟁이라는 과정을 버텨낼 수 있는 체력이야. 동네 패싸움도 아니고, 너무나 광대해서 그 끝을 알수도 없을 정도인 우주를 놓고 벌이는 전쟁이라면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만약 그 전쟁이 신들 사이에 벌어지는 것이라면, 신이 발휘하는 기적이나 권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신앙이 그 척도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야. 나는 너라는 비수를 써서 빛의 신이 지닌 유일성을 깨뜨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절대적인 신앙을 부숴버릴 거야. 빛의 신이 더 이상 유일신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하나로 마음을 모으지 못하게 된다면, 이 전쟁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끝이 날 수도 있겠지.”
네아는 깨달았다.
밤의 신이라 불리는 눈앞의 존재는, 단순히 자신을 꼬드기는 수단으로 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그녀를 사로잡은 시점에서, 이미 그는 자신을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인지 파악하고 있었고, 그러한 결과를 내기 위해 상황을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친밀하고 생활감 넘치는 그의 모습에 잠시나마 풀어져 있던 그녀의 마음은 그가 풀어놓은 모든 것들에 경도되어 일말의 공포마저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전의 그 음식을 통해 매료되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운명은 처음부터 거미줄에 묶인 가련한 한 마리의 나비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이미 그렇게 정한 이상, 자신에게는 도망칠 길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는 사실을 네아는 뼈가 저려오는 듯한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강요가 아니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너와 나의 관계는 책임과 의무로 정해진 것이기에, 나는 너에게 신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가 나의 뜻에 따라 준다면, 이 전쟁은 훨씬 빠르고 간단하게 종결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네…”
“좋아. 말이 길어지긴 했지만, 일단은 계약을 마무리 짓는 것이 우선이겠지. 살펴보고 달리 의문 가는 점이 있다면 말하도록.”
“알겠습니다.”
네아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형진이 내민 근로 계약서를 읽었다. 물론 그녀로서는 그곳에 적힌 내용의 반에 반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연차니 월차니 상여금이니 하는 식의 단어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말들이다. 처음 계약서를 받았을 때라면 몰라도, 눈앞의 존재가 단순히 요리도 좀 잘 하는 신 정도의 존재가 아님을 뼈가 저리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깨닫게 된 지금의 시점에서는 함부로 무언가를 묻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굳이 비교를 한다면, 아직 이등병 계급장도 달지 못한 훈련병이 참모총장과 독대한 자리에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책임이니 의무니 백날 떠들어 봐야, 그런 상황에서 말 한 마디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결국 네아는 너무 긴장해서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자기가 뭘 쓰는지조차 모르는 채 서명을 마쳐야만 했다.
“좋아. 나중에라도 계약 상에 뭔가 문제가 있다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좋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저기 굴러다니는 녀석들에게 말하도록 해. 나는 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몸조리 잘 하고.”
형진이 어딘가로 모습을 감추자, 네아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휠체어에 늘어지듯 기대앉았다. 어쩐지 전신의 힘이 쭉 빠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랄까. 이대로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어려울 것 같은 기분이다.
“수고하셨어요.”
형진이 집무실로 돌아오자, 아란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당연한 일이죠. 전 지금 당신의 비서인걸요.”
아란은 의자로 다가가 형진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아이들 때문인가요?”
“뭐가?”
“그녀에게 신이 되라고 부추긴 것 말이에요.”
“크흠.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시치미 떼긴.”
얼핏 생각하기엔 뜬금없는 말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유아의 경우엔 희망과 생명의 추천에 따라 반신으로 올라서는 일이 비교적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많은 가족들이 있고, 장래에 그들 역시 유아와 마찬가지로 반신의 자리로 올려놓을 생각이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의 세계를 통치하는 역할을 맡은 형진이라도, 자신의 친족을 그런 식으로 신의 자리에 마구 올려놓게 되면 여러모로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다. 때문에 형진은 네아라는 선례를 만드는 식으로 다른 이들에게도 반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족들도 끼워 넣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커흠.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로 해줘.”
결국 형진이 항복을 선언하고 그렇게 부탁하자, 아란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맨입으로요?”
형진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아니지.”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는 진하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물론 아란은 기쁜 마음으로 그의 입술을 맞이했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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