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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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일어난 공주들의 난입으로 인해 실시간 감시의 마수로부터 벗어난 크루그와 릴은 인파에 떠밀리는 듯한 느낌으로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광장으로 향했다. 릴은 자신이 이렇게 사람들 앞에 요정 상태의 모습을 마구 드러내도 좋은 건가 싶었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기껏해야 조금 특이한 펫 정도로 밖에는 보지 않는 느낌이다.
인파 속에 파묻히다보니 신기해하는 시선의 숫자도 많이 줄어들었다. 대신 그만큼 가까이서 그녀를 볼 수 있게 된 몇몇 사람들, 특히 아이들 중에는 릴을 만져 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경우마저 있을 정도였다.
[까꿍!] “꺄하하하하!”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각지에서 벌어지는 신년 행사에 참석할 수 없는 이들 중에는 아예 엘리시온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예전 같으면야 이런 식으로 가족이 게임 안에서 연말을 보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호버 보드의 판매로부터 시작된 혁명적인 몇몇 변화는 가상현실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을 단순히 좀 더 생동감 넘치는 게임에서 현실을 대신할 수 있는 무언가로 바꾸어 가는 중이었고, 지금 보여지는 모습들은 그런 식으로 변화되는 인식의 단상인 셈이다.
하버 브리지나 타임 스퀘어 같은 명소를 임의로 가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고,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는 것보다 이 안에서 북적이는 인파의 분위기 같은 것을 느껴보는 편이 백배 천배 현실감 넘치는 거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서로 다른 곳에 흩어져 있는 가족들이 단순히 목소리나 영상만으로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서 체온을 느끼는 것도 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가상현실이라는 멋진 수단을 고작 게임으로 국한시키고 있는 것 자체가 낭비 아닐까.
그나마 아직 인식이 완전히 바뀌지 않아서 이 정도지, 내년에는 아예 이 안에서 신년 행사를 지켜보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생각될 지도 모른다.
[와… 음식점이 많아요.] “그러네.”형진이었다면 자연스럽게 노점으로 릴을 이끌어서 이것저것 맛보며 조금 더 친밀해질 수 있는 기회로 삼았겠지만 크루그는 그런 발상 자체를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굳이 군것질을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도 한 가지 이유고, 평소에 그런 식의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이라든가 이런 식으로 누군가와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차라리 릴이 이것저것 해보고 싶다고 하면야 크루그도 그냥 모른 척 그녀의 의견에 따랐지만, 그녀 역시 무턱대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막 요구하고 그러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이래저래 헛바퀴 도는 듯한 모습만 보여질 뿐이다.
“…”
[…]
모처럼 연말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 나왔는데, 이리저리 휩쓸려 움직이기만 하고 뭔가를 하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을 형진이나 카트린이 보았다면 다시금 가슴을 두드리며 콜라를 물처럼 들이켰을 것이다. 보다 못해서 뭔가 둘 사이에 화학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촉매제라도 투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 둘은 공주들을 데리고 흥겹게 이 시간을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래서 크루그와 릴은 모처럼의 좋은 시간을 그냥 인파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걸어 다니기만 하고 있었다.
물론 릴은 그것만으로도 재미있다는 듯이 방긋방긋 웃고 있었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그녀의 성격이 좋아서 그런 것이고, 일반적으로 판단했을 때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이 만남을 데이트라고 평가한다면 명백한 낙제점에 가깝다.
[어? 저게 뭐에요?] “글쎄?”그렇게 사람들에게 휩쓸리며 데이트라고 하기도 뭐하고 그냥 산보 나온 것이라고 하기도 뭐한 이상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둘은 문득 하늘에 이런 저런 숫자들이 떠오른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세계 각지의 시간을 알리는 숫자들이었다. 가장 먼저 새해를 맞이하는 키리바시부터 시작해서 뉴질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한국, 홍콩 등 신년 행사가 벌어지는 각각의 지역들의 시간도 순차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여러 개의 숫자들이 순차적으로 보여지다가, 그 중에 가장 적은 숫자를 표시한 것이 가장 앞으로 나서며 다시 공지가 나타났다.
-지구에서 가장 신년이 빠른 곳, 키리바시가 드디어 신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인터페이스를 통해 키리바시를 선택하시면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년 행사를 이곳, 엘리시온 안에서 직접 구경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럼 카운트 다운을 시작하겠습니다. 10! 9! 8! 7! 6! 5…
“4!”
“3!”
“2!”
“1!”
“와아아아!”
“축하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람들은 환호하며 옆에 있는 함께 온 사람들과 포옹을 하기도 하고, 조금 대담한 커플들은 그 자리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아이들은 손에 들고 있던 간이형 폭죽을 터트리기도 했고, 호버 보드를 탄 사람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에어쇼 같은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 “…”그렇게 흥겹게 신년을 즐기는 사람들 속에서 릴과 크루그만이 어쩐지 붕 떠버린 모습으로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그들은 주위의 다른 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환호하지도 않았고, 포옹이나 키스 같은 건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행복한 새해 되세요.] “응, 너도.”그렇게 한 마디씩을 나눈 게 고작이다. 만약 형진이나 카트린이 봤다면 그 답답한 모습에 가슴을 마구 두드려댔겠지만, 불행히도 지금 이들은 그런 식으로 지켜보는 사람조차 없는 상태였다.
주위가 모두 들떠 있는 가운데, 다시 인파에 휩쓸리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 틈엔가 다른 시계가 다시 0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잠시 뒤,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스카이 타워에서 불꽃놀이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인터페이스를 통해 해당 지역의 신년 행사를 관람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다시금 공지가 나오자, 이렇게 사람들에게 휩쓸리기만 하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졌던 크루그가 릴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저거, 볼까?”
[불꽃놀이요?]
“응.”
[네! 보고 싶어요!]
안 권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사실 싫다고 했으면 이만 돌아가자고 할 생각이기도 했다. 만약 그랬다면, 모처럼 단 둘이서 보내는 첫 번째 시간은 무척이나 무미건조하게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인터페이스를 통해 오클랜드 스카이타워의 실황을 선택하자, 그들이 있는 장소는 한 순간에 지금까지 있던 곳과는 다른 장소로 바뀌었다. 휘황찬란한 도시 가운데 우뚝 솟은 거대한 탑과 신년 행사를 기대하며 모여든 인파들의 손에 들린 촛불과 휴대폰이 발아래에 펼쳐진 작은 우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죠?]갑자기 주위의 모습이 바뀌자 놀란 릴은 자신도 모르게 크루그의 어깨 뒤로 숨으며 그렇게 물었다.
“아까 공지로 나온 대로야. 지금 보이는 저 탑이 오클랜드의 스카이타워라는 곳이지. 정말로 그곳으로 간 건 아니고, 그곳의 광경을 보고 있는 것 뿐이야.”
[아…]
“이런 거 전에는 본적 없어?”
[움리드들은 딱히 신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지 않거든요.]
“신년 행사를 열지 않는다고?”
[저희들이 살던 곳은 아무래도 일반적인 행성이 아니다 보니…]
“아…”
사실 움리드들에게 신년 행사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링월드를 만들게 되면서, 일년을 주기로 한 역법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링월드 역시 천천히 태양 주위를 돌고 있었고, 이 때문에 공전 주기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행성에 머물 때의 역법과는 여러모로 다른 개념이었다.
무엇보다도, 움리드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살던 항성계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버렸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종족들보다 우월하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있어 행성에서 살 때나 의미가 있는 신년 행사 따위는 구시대의 유물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않았었다.
“그랬군. 그런 차이가 있었던 거군.”
크루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야에 표시되어 있는 다른 여러 곳의 시간들을 바라보았다.
하나의 행성에서조차 이렇게 저마다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다. 하물며 서로 다른 태양 아래, 서로 다른 행성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라면 지금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시간대 속에서 공존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일. 당장 그가 태어나고 자란 타나토스라는 세계만 놓고 보더라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뭐랄까. 새삼스럽게 형진이 이루어 놓은 일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진다. 고작해야 하나의 나라를 감당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간혹 잠까지 설치는 크루그에게 있어서 그건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었다.
[시작 됐어요!]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크루그는 문득 릴의 목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바라보니 커다란 탑으로부터 문자 그대로 불로 만들어진 꽃과 같은 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발아래에서는 사람들의 환호와 함께 클락션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호버 보드를 탄 사람들이 손전등을 든 채 하늘을 날며 허공에 무언가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와아…]릴은 홀린듯한 표정으로 어둠 속에 아로새겨지는 그 아름다운 빛의 향연에 빠져 들었다. 크루그도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은 감탄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시야 한 구석에서 반짝이는 알림 표시를 발견했다.
“이건…”
확인해 보니 그것은 앞서 공지에서 언급했던 선물이었다. 본래는 앞서의 카운트 다운 뒤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모습으로 증정하려 했지만, 깜짝 이벤트에 관한 소식을 들은 유저들의 게임 접속이 일순간 폭증하는 바람에 이런 식으로 우편이라는 수단을 통해 보내지게 된 것이다.
“릴.”
[네?]
“선물이란 게 왔는데, 확인해 봐.”
[아! 정말요?]
마치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모습에 취해있던 릴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선물 상자를 우편으로부터 수령했다.
[열어봐도 괜찮은 건가요?] “물론.”[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런 식의 선물을 받아 본 기억이 별로 없어서일까. 릴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선물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크루그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어버린다.
-축하합니다! ‘엘레강스 란제리+가터벨트+스타킹 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메시지와 함께 뭔가 아주 어른스러운 속옷 세트가 확 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참… 뭐라고 해야 하나. 엘레강스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게임 안에서 이런 걸 팔아먹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정말 성인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지는 그런 속옷 세트다. 온라인 게임에서 속옷을 팔아먹는 것이 이제는 흔한 일이 되어 버리긴 했어도 그런 걸 직접 사 입어 볼 일이 없는 크루그나, 오늘 처음으로 엘리시온이라는 곳에 들어와 본 릴에게 있어서는 이런 것이 선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실로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잠시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드러난 선물의 모습을 보고 굳어 있던 크루그는 이내 이를 부득 갈고는 누군가를 향해 외쳤다.
“이… 망할 변태가!”
물론 형진으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정말로 손을 썼다면 몰라도, 그는 지금 아이들을 데리고 각지의 신년 행사를 찾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벌어진 이 사태는, 이른바 랜덤이라는 이름의 신이 벌여 놓은 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의외의 결과를 이루어내고 말았다. 지금까지 크루그와 같이 다니면서도 두근거림이라는 것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릴에게, 지금 눈앞에서 누군가에게 불 같이 화를 내고 있는 소년이 자신과는 다른 성별의 존재임을 불현듯 인식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론 크루그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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