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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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이제야 겨우 잠들었네.”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뭘.”
아이들은 문자 그대로 신년 행사 투어를 하다가 홍콩 빅토리아 하버의 불꽃놀이를 보면서 잠이 들었다. 예상보다 아이들이 불꽃놀이를 훨씬 더 좋아한 탓에 자칫하면 매일 밤 왕성에서 불꽃놀이를 하겠다고 약속해 버릴 뻔 했다.
“그럼 쉬어.”
“네. 오빠도요. 후아암.”
잠이 든 아이들을 침실로 데려다 눕히는 일이 끝나고 살짝 피곤한 표정의 카트린을 데려다 주고 나오던 형진은, 문득 어디선가 찌릿하고 전해지는 살기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음? 크루그?”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서 못 본 데이트 장면을 마저 확인하면서 예능 프로그램 프로듀서가 된 기분으로 편집을 해볼까 하던 중이라 형진은 더욱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혹시 훔쳐보고 있었던 걸 들킨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드디어 크루그의 입이 열렸다.
“무슨 생각이야?”
“뭐가?”
“시치미 떼지 마. 몰라서 물어?”
“그러니까 뭐가?”
“…”
천연덕스럽게 되묻는 형진의 표정에 크루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제서야 크루그는 제대로 증거도 찾지 않은 채 무작정 그를 추궁하기 시작한 자신의 서투름을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렇다고 이제 다시 증거를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속옷 세트 말이야.”
“속옷 세트?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좀 알아듣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봐.”
“…”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진상을 추궁하던 입장에서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하기야 말빨로 우주를 꿀꺽하다시피 한 형진이다. 예전에야 어떨지 몰라도 이제 와서 크루그가 형진을 말로 이기기는 아무래도 힘들 수밖에 없는 노릇.
크루그는 혀를 차면서도, 결국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흠… 그러니까, 엘리시온에서 선물 상자를 줬는데 까보니까 릴에게 속옷 세트가 나왔다. 이건가?”
“맞아.”
“그래서 넌 대뜸 내가 장난질을 친 거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달려온 거고?”
“일단은.”
형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끙… 너란 녀석한테 있어서 나란 놈은 얼마나 변태인거냐.”
“지난 시간동안의 행적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보는데.”
“그거야… 그렇지만.”
계속 지켜봤어도 그런 장난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혼자서 보고 있었다면 몰라도 카트린이랑 같이 보고 있는 와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뭐가?”
“속옷 세트 나온 뒤에 어떻게 되었냐고. 설마 갑자기 어색해져서 데이트고 뭐고 팽개치고 그냥 달려온 건 아니겠지?”
“…”
크루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데이트라는 말의 의미가 묘하게 전해진 탓이다.
원래 데이트라는 영어 단어 자체는 연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만남이나 만나기 위한 약속 등을 가진다. 형진은 본래 타나토스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알지 못한다. 처음에는 집행자로서 공포와 죽음의 권능에 의지해 의사소통이 진행되었고, 지금은 신이 되어 온전히 자신의 의지 그대로를 상대에게 전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결국 그가 어떤 언어의 어떤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상대에게는 그 정확한 의미와 미묘한 뉘앙스 또한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다는 의미다. 사실 이 정도로 명확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도 그가 강력한 힘을 갖추고 두 우주를 지배하는 신이 되면서 부터의 일이다. 이전까지는 상대의 언어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의 경우엔 의미를 이해시키려면 따로 설명이 필요했었다.
“그런 사이 아니야.”
크루그는 그렇게 부정했지만, 그 정도 가지고 순순히 물러날 형진이 아니다.
“연말연시에 다른 사람 몰래 남녀 한 쌍이 은밀한 시간을 보낸다면 누가 봐도 그건 조금은 특별한 사이가 아닐까.”
“그건…”
사실 아까까지만 해도 형진은 카트린에게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행위가 별로 효과가 없을 거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속옷 세트가 나온 일 때문에 크루그는 이제 릴을 완벽하게 이성으로 인식해 버린 상황. 아직 활활 타오르기에는 부족하지만, 최소한의 불씨는 이미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결국 형진이 이런 식으로 말을 이어가는 것은, 그런 불씨를 스스로 명확하게 인식시켜 불꽃으로 만들기 위한 부채질인 셈이다.
“뭔가 오해를 하나 본데, 나는 그저…”
“그저?”
“…”
크루그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냥 릴이 가보고 싶다고 해서 간 거라는 말이 입 안을 맴돌았지만 그대로 꿀꺽 삼켜 버렸다. 스스로 그 대답에 다시 왜라는 질문을 던지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음을 깨달아 버린 탓이다.
“아무튼… 아니면 됐어.”
“응? 아니, 잠깐…”
크루그가 그렇게 대답을 회피하고 몸을 돌려 어디론가 가버리자, 형진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시 말을 걸려다가 멈추어 섰다. 그리고 이내 크루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형진은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 봐라.”
잠시 모니터링을 못한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형진은 얼른 작업실로 들어가 자신이 없는 동안의 녹화 내용을 확인했다.
“흐음…”
하지만 사실 그 뒤의 내용이라고 해봐야 별 것 없었다. 문자 그대로 속옷 세트가 나오자 어쩐지 어색해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버벅대다가 불꽃놀이가 끝나자 그냥 돌아와 버린 것이다. 그리고 형진이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카트린을 배웅하는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나타나서 질문을 던진 것이 끝.
“이거 참. 이걸 풋풋하다고 해야 할지, 쑥맥이라고 해야 할지.”
뭔가 더 재미있는 상황이 없나 하고 영상을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그게 전부였다. 적당히 끌리는 여자가 있으면 일단 들이대고 보는 자신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에 어쩐지 이질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너무 서둘렀나.”
혹시 사고라도 쳤나 해서 조금 부채질을 해봤는데, 그게 너무 섯부른 일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직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풋내기들은 공연히 주위에서 부채질하면 지레 겁먹고 물러서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풋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깨지는 경우가 많은 것도 결국 이 때문이 아닌가.
물론 반드시 크루그와 릴을 맺어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기왕 피어난 불꽃이 제대로 피어나지도 못하고 꺼지도록 만드는 건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다. 특히나 그런 사태가 되도록 만든 원인이 자신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고 대놓고 끼어들 수도 없는 일이고. 일단은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건가.”
당장 릴이 크루그의 거처를 살피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이번 일로 인해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바로 변화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서로를 이성으로 인식함으로서 생긴 어색한 분위기는 누가 옆에서 나선대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만약 그런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 릴이든 크루그든 담당을 바꿔 달라는 식의 말이 나와 버리면 말짱 꽝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런 식의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뭘 그렇게 유심히 보고 있어요?”
“어?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
시간이 되어도 오질 않는 것이 이상했는지 직접 찾아왔던 미엘은 무언가를 보고 있던 형진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 영상을 꺼버리는 모습을 보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흐응. 뭔가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있었나 보군요? 막상 아내는 방치해 두고서.”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니거든?”
“괜찮아요. 어차피 당신 변태짓이야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
“하지만 아이들이 보지 않게 조심해요. 최소한 그런 걸 볼 거면 문을 걸어 잠그라는 얘기에요.”
“아니라니까!”
미엘의 사소한 오해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날의 일은 그렇게 조용히 묻혔다. 릴은 서로를 대하기가 어색해져서 맡은 일을 때려친다거나 하는 식의 일을 하지 않았고, 크루그 역시 릴이 먼저 언급하지 않는 이상 그 일을 먼저 끄집어낸다거나 하지는 않았던 탓이다. 다만, 단 둘이 되었을 때 그나마 몇 마디 안 되던 말이라도 나누었던 것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그렇게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나날을 보내고 있자니, 마침내 왕성에서 신년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 되었다.
두 우주를 다스리는 신인만큼, 거창하게 벌이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우주 규모의 거창함을 선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형진이 이런 잔치를 벌이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아이들이 꼬까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 뿐이라, 잔치는 예상 외로 조촐하게 진행이 되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 너희들도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려무나. 하하하.”
안 그래도 귀여움이 하늘을 찌르는 아이들이 예쁜 한복을 입고 줄을 지어 자신에게 새배를 하는 모습에 형진은 입이 귀밑까지 쭉 찢어져 있었다. 달이 녀석만 아직 유아의 품에 안긴 채였지만, 마찬가지로 귀여운 한복을 챙겨 입은 모습이 꽤 늠름해 보여서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특히 눈에 띌 정도로 배가 불러오는 하마란은 뭔지 모를 결의를 다지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어쩐지 오귀스트의 표정이 핼쓱해진 것을 보니, 모르긴 해도 자신들 역시 야구팀 내지는 축구팀을 만들겠노라 다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빠, 저희들도 새배할게요.”
“하하. 그럴래? 나야 좋지.”
처음에는 아이들만 하는 걸로 끝낼까 했지만, 어느 틈엔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카트린과 크루그도 새배를 하는 걸로 결정이 되었다.
카트린은 하얀 화선지에 화조도를 그려 넣은 듯한 느낌의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화려한 꼬까옷과는 달리 기품 있고 단아한 느낌이라 이제는 정말 소녀가 아니라 아가씨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크루그의 경우에는 그보다는 조금 단조로운 느낌이었지만, 깔끔한 느낌의 마고자를 겉에 걸친 모습이 제법 의젓해 보였다. 처음 입어보는 복식이라 어색함이 표정 곳곳에 배어나오고 있었지만, 역시나 이제는 제법 청년 느낌이 풍겨지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영락없이 아이들이었는데, 아주 잠깐 동안 훌쩍 커버렸구나. 어느새 어른이 다 되어 버렸어.”
어쩐지 감회 넘치는 표정으로 형진이 그렇게 말하자. 카트린은 살짝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새배돈 안주시면 미워할 거에요.”
“하하, 그럴 리가 있나.”
아이들은 반짝이는 은화가 담긴 주머니를, 카트린과 크루그에게는 묵직한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주었다. 사실 왕성에서는 돈을 쓸 일이 없는 터라 그냥 상징적인 의미에 가깝지만, 그냥 동전 몇 개만 달랑 집어넣고 만 것은 아니다.
“빠아! 이건 뭐에요?”
“글쎄. 뭘까. 한 번 풀어보렴.”
돈 주머니 안에는 작은 상자가 함께 들어있었다. 이를테면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의 설날 버전이라고 해야 하나. 아이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얼른 그것을 열어보았다.
“이건… 장식품인가요?”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옥을 정성들여 깎고 매듭을 지어 만든 예쁘장한 노리개였다. 형진은 아이들에게 다가가 꼬까옷에 노리개를 달아주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렇게 달고 다니는 거란다. 간단하게 몇 가지 물품을 넣을 수도 있고, 더위나 추위 같은 것으로부터 보호를 해주는 기능도 포함되어 있지. 엘리시온에서 얻을 수 있는 어지간한 악세사리보다는 훨씬 나을 걸.”
“와아! 빠아 최고!”
“감사합니다!”
“하하하, 뭘 그 정도 가지고.”
고맙다면서 품에 안기며 볼에 뽀뽀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형진은 다시금 입이 헤벌죽 벌어지고 말았다. 크루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참 언제봐도 한결 같은 딸바보다 하면서.
그렇게 조금은 떠들썩했던 잔치가 끝나고 돌아온 크루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일하고 있다가 그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얼른 입을 다무는 릴의 모습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방안에 감도는 침묵이란 것이 이렇게 무거운 것이었던가. 분명히 한 공간에 있는데 말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두꺼운 벽이 보이지 않는 형상을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아서 어쩐지 기분이 별로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크루그는 문득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주머니 속에 넣어둔 노리개를 발견했다.
아이들이나 카트린은 어떨지 몰라도, 사실 크루그는 인던 플레이를 자주하다보니 이런 저런 잡다한 아이템이 꽤 많았다. 물론 이 노리개라는 것은 형진이 직접 아이들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물품이니 그런 아이템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겠지만, 그래도 이제와서 굳이 이걸 가지고 다닐 이유도 없다고나 할까.
크루그는 잠시 노리개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다가 방을 나가서 릴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이건?] “가져. 난 필요 없으니까.”[네?]
릴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크루그가 손을 거둬들이지 않자 마지못한 듯한 모습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노리개 자체는 릴의 몸집보다도 훨씬 컸지만, 그것을 받아들자 그녀의 사이즈에 맞게 변화하며 작아진다.
[감사… 합니다.] “신경 쓰지마.”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던 크루그는 순간 무언가를 보고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가 입은 메이드복 아래 슬쩍 드러난 스타킹이 어쩐지 눈에 익다는 것을 알아차린 탓이다.
순간 크루그는 이전에 얼핏 보았던 속옷 세트를 떠올리고는 그것을 입은 릴의 모습을 상상해 버리고 말았다.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청소년에게 있어서, 그건 너무나도 자극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그녀가 선물 받은 속옷을 입고.jpg
(후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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