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66
-10965
크루그는 여전히 신경이 예민한 상태였다. 약혼에 대한 얘기를 릴에게 전하고 나서 사흘 동안, 그야말로 머리카락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는 동생인 카트린이 그녀를 데리고 어딘가를 왕래하는 모양인데, 무슨 꿍꿍이냐고 물어봐도 그냥 씨익 웃으며 기대하라는 말 밖에 하지를 않으니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다.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그에게 수련을 받고 있는 왕족 나부랭이들뿐이다. 몇몇 특이한 취향의 왕녀들은 그런 크루그의 모습이 너무 좋다며 하트를 남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역시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아니냐며 몸을 사리고 있는 중이다. 물론 오늘이 그의 약혼식이 있는 날임을 알았다면 그들의 반응도 달라졌겠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왕성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가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었다.
“자, 도련님. 이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
누군가 하고 돌아보니 제랄딘이다. 원래는 그와 혼담이 오갔던 사이지만, 이제는 명백하게 형수가 되어버린 상태. 물론 애초에 스스로가 형진에게 떠넘긴 탓에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필 이럴 때 제랄딘과 마주하는 것은 역시 뭔가 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그만둬요.”
“뭘요?”
“그 말투부터 시작해서, 도련님이라는 호칭도 그렇고.”
“풉.”
“…”
진지하게 말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웃음이다. 아아, 그렇구나. 어째서 이런 시점에 제랄딘이 자신을 찾아온 건가 했더니, 그 빌어먹을 변태 형이 일부러 보낸 거구나.
“혹시라도 저와 예전에 뭔가 일이라도 있지 않았나 하고 새신부가 오해할까봐 걱정되세요?”
사흘 전, 형진과 카트린처럼 눈이 반달로 휘어진 채 그렇게 말하는 제랄딘의 모습에 크루그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 말았다.
“휴… 관두죠. 이 옷을 입으면 되는 건가요.”
“네. 그럼 늦지 않게 나오세요.”
제랄딘은 킥킥거리며 그대로 방을 빠져 나갔고, 크루그는 한숨을 푹푹 몰아쉬며 그녀가 가져온 정장을 차려 입었다.
정장이라고는 해도 엘 파르드의 그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라야바르트나 지구의 그것과도 다르다. 어쩐지 형진의 취향이 잔뜩 들어간 느낌의, 이전에 입었던 한복과 비슷한 분위기다. 엘 파르드의 차기 국왕으로 내정되어 있다고는 해도, 그곳에 별로 좋은 기억이 없는 그로서는 차라리 이것이 낫다 싶은 느낌이긴 하다.
물론 다른 외부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는 거창한 행사였다면 어쩔 수 없이 엘 파르드의 전통 의상을 입어야 했겠지만, 어차피 오늘은 왕성의 식구들 외에 안면이 있는 몇몇 신 정도가 참석하는 것뿐이니 이런 옷을 입는다고 해서 문제될 이유도 없다.
“…”
아직 완전히 성장한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격식을 갖춘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니 뭔가 좀 어색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렇게 옷을 차려입고 서니 그제서야 비로소 오늘 자신이 약혼한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잠시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뭔가 빠진 것이 없나 하고 살피던 크루그는, 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자 방을 정돈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 드디어 나왔군.”
“축하해요! 삼촌!”
“축하합니다!”
그가 정원으로 나오자 테이블 주위에 모여서 뭔가 수다를 떨고 있던 식구들이 일제히 그에게 축하를 건넸다. 귀여운 조카들이 바구니를 손에 든 채 주위를 날아다니며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자, 평소에 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크루그도 조금 얼굴이 상기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좋냐.”
“시끄러.”
“에이, 좋으면 좋다 그러면 되지. 뭘 까칠하게 그러실까. 우리 동생님은.”
“…”
키득거리면서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는 이 작자가 우주 전체를 살피는 주신이라니. 도대체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 것인지.
크루그는 작게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막상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은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릴은?”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놀려도 반응을 하지 않아서 조금 시무룩해졌던 형진은 크루그의 그같은 말에 득달같이 반응했다.
“벌써부터 자기 신부 챙기는 것 좀 보소. 이 녀석 이러다가 공처가 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릴은?”
“쳇.”
좀 더 색다른 반응을 보여 달라고 투정 부리듯이 말을 건네던 형진이 혀를 차며 물러나자, 옆에서 그런 형제의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고 있던 유아가 대신 말을 건넨다.
“데리러 갔으니 금방 올 거에요. 아마 그녀의 모습을 보면 놀랄 거에요.”
“…”
또 무슨 꿍꿍이인 건지. 유아의 말에 동조하듯 주위에 모인 이들의 시선에 기대가 가득 어린다. 몇몇은 형진과 마찬가지로 눈이 반달로 휘어지기도 한다.
“축하한다.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하면 좋겠군.”
하지만 다른 이들은 무시해도 지금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는 이 건장한 남자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뭐라해도 그는 신, 그 중에서도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기로 유명한 신뢰와 헌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뢰와 헌신님.”
크루그는 방금 전까지의 불퉁스런 모습이 아닌 정중한 태도로 그에게 답례를 했다. 아무리 주위의 시선이 짜증스러워도, 이 남신에게 다른 이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건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신뢰와 헌신은 조금 짜증스런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요 며칠, 약혼식 때문에 그는 마음에 둔 누군가와 시간을 거의 보내지 못했다. 신들에게 있어서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긴 하지만, 그는 고작 사흘 동안 꽃과 바람의 모습과 향기를 접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이미 금단 증상마저 보이고 있는 중이다.
신뢰와 헌신을 시작으로, 다른 신들도 하나씩 다가와서 크루그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간단한 축복을 선사했다. 물론 강력한 권능이 서린 그런 것은 아니고, 그저 좋은 말을 건네는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축복의 내용보다는, 이런 식으로 신들에게 직접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그렇게 손님들을 맞이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득 작은 나팔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정원 한 켠에 공간을 연결하는 경계가 활성화된다.
“오, 드디어 오나 보군. 얘들아, 부탁한다.”
“네! 맡겨 주세요!”
깔깔거리며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던 조카들이 형진의 말과 함께 날아올라 경계 주위로 모여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침내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나자, 바구니에 담겨져 있던 색종이들을 허공에 뿌리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합니다!”
“어서오세요!”
아이들의 환대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얀 면사포를 머리에 쓴 소녀였다. 그녀의 뒤에는 꽃과 바람, 그리고 카트린이 따르고 있었다.
“…”
면사포에 가려져 있기는 했지만 살짝 드러난 얼굴 윤곽이라든가 그 아래에서 꽃봉오리처럼 반짝이는 붉은 입술, 그리고 드레스 위로 드러난 하얀 어깨와 부드러운 쇄골이 이루는 곡선은 보는 이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몰라도, 크루그는 이 순간 확실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고생했다.”
“별말씀을요. 솔직히 저야 고생이랄 것도 없었어요. 워낙 언니가 예쁘기도 했고.”
뒤따라온 카트린이 형진에게 다가가 그렇게 속닥거리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크루그는 이미 그런 식으로 주위에서 주고받는 얘기 따위는 들리지도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온통 자신에게로 천천히 다가서는 소녀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가슴은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사실 요정 모습이었을 때의 릴은 귀엽기는 했어도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그런 마력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냥 옆에 없으면 뭔가 허전하고, 주위의 모든 것에 감동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드는 정도랄까. 적어도 지금까지 릴의 모습을 보고 이런 식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은 받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니, 혹시 있었더라도 지금 같은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코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느껴지는 그 향기라니.
얼핏 꽃향기 같지만, 또한 그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단순히 향기라고 표현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무언가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그런 식으로 판단을 내리고 정의를 내리는 것조차 옳지 않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겪어 본 적이 없는, 그런 무언가다.
살짝 드러난 입술에 홀리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기에 취한 채 멍하니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한다.
“왕자님?”
그리고 마침내, 소녀의 붉은 입술로부터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제서야 크루그는 기나긴 꿈에서 깨어났다.
“응? 부, 불렀어?”
“…”
허둥대는 크루그의 모습에 소녀는 가만히 그를 올려보다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역시… 이상한가요?”
사실 지금 베일 아래 드러난 그녀의 붉은 입술은 본래의 색깔이 아니다. 남자의 마음을 가장 예리하게 파고들 수 있도록, 꽃과 바람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 놓은 색이라고나 할까. 가장 아름다운 꽃의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모으고 모은 결과물이라고 하면 될 듯 하다.
“녀석, 완전히 넋이 나갔네.”
“후후후후후. 하지만 감탄하는 건 아직 일러요.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했거든요!”
“오오. 그거 기대되는데.”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 뒤에서 형진과 카트린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듣고 짜증을 냈겠지만, 지금 이 순간 크루그의 귀에는 그런 소음 따위는 들리지도 않고 있었다.
“자, 베일을 걷어 주세요.”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꽃과 바람이 그렇게 말을 건네자, 크루그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제가… 요?”
“당연하죠. 그녀의 약혼자는 바로 당신이니까요.”
“…”
꿀꺽. 크루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침 삼키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수도 있는 건가 싶은 느낌. 게다가 지금 그의 귀에는 스스로의 심장이 만들어내는 고동소리가 마치 북소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자신을 향해 들어 올려진다. 어서,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 천을 걷어내 달라고 부탁하듯이.
크루그는 머뭇거리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조심스럽게 위로 들어 올렸다.
“아…”
“어쩜.”
순간 주위에서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물질 하나 없는,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 위로 살짝 상기된 아름다운 소녀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크루그였다. 눈을 살짝 감은 채 조금 겁먹은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직시하는 순간, 그는 마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거… 사기 아니야?”
“아니에요. 사실 샘이 날 정도로 피부가 너무 투명하고 예뻐서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긴 했는데, 역시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에 약간 힘을 주는 정도로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어요. 물론 언니가 원한다면 어떤 분위기든 만들어낼 수 있었을 테지만요. 뭐라고 해야 하나…”
카트린이 적당한 표현을 찾느라 잠시 머뭇거리자 옆으로 다가온 꽃과 바람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종이와도 같아요. 그곳에 무엇을 그려 넣느냐에 따라 예쁜 꽃이 될 수도 있고, 거친 바람이 될 수도 있죠. 움리드들이 그녀를 신성한 존재로 여겼던 것이 어쩐지 절로 이해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물론 주위에서 그런 식의 얘기를 나누거나 말거나, 크루그는 자신을 향한 소녀의 얼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크루그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있자, 마침내 감겨져 있던 릴의 눈이 떠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쿵!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크루그는 심장이 주저앉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투명하게 빛나는, 살짝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릴은 조금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크루그의 그런 모습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역시… 이상한가요?”
그 순간 크루그가 움직였다.
“어머나!”
“꺄앗! 어쩜 좋아!”
주위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을 들으며, 릴은 자신의 입술에 닿아오는 감촉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그녀는 이내 손을 뻗어 자신에게 입을 맞추고 있는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키스.
어설프고 서투르지만, 그것은 어떤 언약보다도 더 강력하게 서로의 몸과 마음을 연결시킨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둘에게는 그랬다.
========== 작품 후기 ==========
우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