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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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여행을 가지 않을래?”
그렇지 않아도 청혼을 거절한 것 때문에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꽃과 바람은 신뢰와 헌신이 머뭇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지만, 언제요?”
“당신이 괜찮은 시간을 말해줘. 내가 맞출테니.”
신뢰와 헌신도 계약의 수호를 맡게 되면서 이래저래 할 일이 많긴 했다. 타나토스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세계로 교단을 넓혀가는 일 때문이다.
나중이야 어찌되더라도 각 세계에서 활동할 교단의 큰 틀은 신이 직접 손을 대야만 한다. 자칫 될 대로 되라 하고 방치해 두었다가는 신의 힘이라는 강대한 권력을 등에 업고 타락한 자들이 출현할 수 있다. 신이 방치한 교단이 얼마나 흉악한 집단이 될 수 있는지는 수많은 역사를 통해 이미 증명된 일이다.
특히 교단 성립 초창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가는,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교단은 물론이고 신뢰와 헌신이라는 이름에도 큰 오명이 생길 수 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처음에는 여러모로 신경을 쓸 일이 많다.
“음… 한 일주일 정도 뒤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알겠소. 그때에 맞춰서 준비를 해두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되돌아서려던 신뢰와 헌신이지만, 꽃과 바람이 손을 뻗어 그를 멈춰 세웠다.
“미안해요.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라는 거, 알죠?”
“알아. 그러니 미안해 할 것 없…”
괜찮다고 말하려던 신뢰와 헌신은 문득 눈을 살짝 감은 채 입을 맞춰오는 그녀의 모습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짙은 키스는 아니다. 그냥 살짝 입술을 마주했다 뗀 정도. 하지만 순간 확 하고 밀려드는 그녀의 향기에 신뢰와 헌신은 잠시 정신이 몽롱해지고 말았다.
“그럼 나중에 봐요.”
자신도 조금 부끄러운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꽃을 피우는 일을 하러 사뿐사뿐 물가로 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신뢰와 헌신은 홀린 듯한 표정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제와서 싫다고 한들 미련을 버릴 수야 있겠는가. 그러나 용기를 내서 한 청혼을 거절하고 이런 태도를 보이면 어쩌라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쁜 걸 보면 중증은 중증인 모양이다.
애들이나 할 법한 입맞춤에 이렇게 넋이 나가버리다니. 신뢰와 헌신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쉬고는 그녀가 머무는 공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났다. 준비를 하다 보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자, 이제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일주일간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잊지 않는 이상, 너는 그녀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맙다. 친구.”
눈물마저 글썽이는 신뢰와 헌신의 모습에 형진은 씩 웃어 보이고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등 뒤로 붉은 석양이 비춰지면 딱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다.
형진과 굳은 악수를 한 신뢰와 헌신은 깊게 심호흡을 한 뒤 그녀가 머물고 있는 공간으로 향했다.
경계를 넘어 도착하고서 그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살짝 토라진 듯한 모습의 꽃과 바람이다.
“너무해요. 어떻게 일주일 동안 연락 한 번을 안 할 수가 있어요?”
신뢰와 헌신은 아차 싶었다. 특훈에 몰입한 나머지 그녀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 여행을 위해서 미리 일을 마쳐 둔다는 게 그만…”
급히 생각해 낸 변명치고는 꽤 괜찮았다. 꽃과 바람은 살짝 눈을 흘겼지만, 자신과의 여행 준비를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섰다.
“괜찮아요. 생각해 보니 내가 먼저 연락하는 방법도 있었네요.”
“그렇군.”
“하지만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는 중이라고 해도 가끔 연락은 해줘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 아닌가 해서 걱정했잖아요.”
“미안.”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그녀의 향기를 맡아 버리면 그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이래저래 그가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신뢰와 헌신의 그런 모습에 꽃과 바람은 킥킥거리며 웃더니, 이내 그의 옆으로 다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자, 가요. 날 어디로 데려다 줄 건가요?”
“그 전에 잠깐만.”
“네?”
꽃과 바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신뢰와 헌신은 순간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 치고 그냥 여기서 둘이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고 뭔가를 보고 하는 시간마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 그런 생각들을 접었다. 이번 여행은 단순히 눈앞의 아름다운 여신과 단둘이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잠깐 동안의 즐거움과 그녀와의 미래를 저울질해야만 한다면, 당연히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 맞다.
신뢰와 헌신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서 귀 뒤쪽으로 넘긴 다음, 머리핀 하나를 달아주었다.
“이건…”
단순히 생각하면 그냥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해 준 것처럼 보이지만, 꽃과 바람은 머리핀이 자신에게 닿는 순간 이것이 평범한 장신구가 아님을 바로 알아차렸다.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 그리고 난 질투가 많지. 당신의 아름다운 향기에 이끌려 쓸데없이 벌과 나비가 몰려드는 것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이건 다른 이들에게 당신의 인상을 조금이나마 약화시키기 위한 도구야.”
꽃과 바람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설명을 하는 신뢰와 헌신을 바라보며 살짝 눈을 흘겼다.
“내가 한눈이라도 팔까봐 겁이 난거에요?”
“그, 그게 아니라…”
“킥. 그렇게 당황할 것 까진 없어요. 나도 괜히 다른 불청객들 때문에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진 않으니까.”
신뢰와 헌신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그녀가 기분이 상하면 어떻게 하나 싶었던 것이다. 자칫 그의 독점욕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분위기가 가라앉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 준비는 다 된 거죠?”
“응. 갑시다.”
흔히 여행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커다란 트렁크나 캐리어는 그들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다. 정 필요한 것이 있다면 형진 같은 다른 신들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하거나 퀘스트를 내려서 추종자들에게 조달하게 하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마치 신혼여행을 떠나는 한쌍처럼 팔짱을 낀 둘은 곧바로 다시 공간을 넘었다.
“여긴…”
꽃과 바람은 자신이 금새 사람들이 북적이는 커다란 건물 안에 도착한 것을 깨닫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공항이야. 지구인들이 흔히 비행기라는 탈 것을 타고 다니는 곳이지.”
“아… 들어 본 적이 있어요. 그럼 이제부터 그 비행기라는 걸 타게 되는 건가요?”
“그건 아니고.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리니 그건 생략.”
“아쉽네요.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돌아갈 때 타고 갈 수 있도록 준비할게.”
“그러면 되겠네요. 기대할게요.”
사실 비행기라는 탈 것 자체가 조만간 사라질지도 모르는 운명이라,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는 탈 수 없게 될 가능성도 높았다. 물론 꽃과 바람은 비행기 그 자체보다는 신뢰와 헌신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운 모양이었지만.
폐쇄 회로 카메라의 사각지대에 절묘하게 모습을 드러냈지만, 갑자기 공간을 넘어 나타난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형진이 만들어낸 인식 저하의 장신구는 벌써부터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팔짱을 끼고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신혼부부처럼 공항을 빠져 나간 그들은 깃발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 가운데 하나에게 다가갔다.
“페이스 데보트입니다.”
“네? 엇? 어느 틈에?”
깃발을 들고 기다리던 여행사 직원은 갑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신뢰와 헌신의 장대한 체구에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되어 버렸다.
참고로 페이스 데보트라는 이름은 신뢰와 헌신을 영어로 적당히 바꾼 가명이다.
“갈까요?”
“그, 그러죠. 캐리어를 주십시오. 제가… 응? 없네요?”
“네. 뭔가 문제라도?”
“아니. 아닙니다. 아하하하…”
캐리어를 옮겨주고 팁을 요구하려던 현지 여행사 직원은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그래도 간단한 짐 하나 조차 들지 않고 이곳을 찾는 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탓이다.
“일단 버스를 타고 선착장까지 간 다음, 거기서 배를 타고 보라카이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약하신 숙소까지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가시죠.”
둘은 여행사의 로고가 찍힌 버스에 탔다. 역시나 신혼부부들이 많이 찾는 여행지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탑승자의 대부분이 그들처럼 짝을 이루고 있었다.
“신혼부부가 되어 보고 싶었던 거에요?”
“싫어?”
“아뇨. 저도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해보고 싶었어요.”
정말 모르겠다. 결혼은 싫다던 말을 들은게 어제 같은데 이제는 또 신혼부부가 되어보고 싶다니. 신뢰와 헌신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그녀의 향기를 맡고 나니 아무래도 좋은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역시, 그녀는 너무 치명적이다.
버스를 타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선착장에 도착했다. 다른 여행사 직원들은 캐리어를 옮겨주고 팁을 받았지만, 그들을 맡은 이는 그저 입맛만 쩍쩍 다시는 것을 보고 신뢰와 헌신은 넌지시 준비해둔 돈을 조금 건네주었다.
“헉! 가, 감사합니다.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아무래도 대충 집어준 지폐의 액면이 좀 컸었던 모양이다. 현지에서 쓸 용도로 형진에게 미리 돈을 얼마 정도 구해 놓기를 잘했다.
작은 배를 타고 보라카이에 도착하자, 그럴 듯한 차량 한 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 역시 미리 예약해둔 호텔에서 보내온 차량이다.
숙소에 도착해서 다시 팁을 주자 여행사 직원은 즐거운 여행되시라면서 인사를 구십 도로 하고는 사라진다. 아마도 세상 물정 모르는 졸부를 만나서 대박이 났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잡은 숙소는 이곳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곳이다. 전용 해안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각 객실이 서로 다른 건물로 분리되어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프라이버시가 침해 받을 일이 없는 그런 곳이다.
“와… 바다가 너무 멋져요.”
넓게 펼쳐진 푸른 수평선 따위 일하는 동안 수도 없이 봤던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이 꽃과 바다만 펼쳐진 곳과는 아무래도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음에 들어?”
“네. 준비하느라 고생하셨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크흠.”
“풋.”
대답해 놓고도 스스로 어쩐지 좀 느끼하다 싶었는지 가볍게 헛기침을 하는 신뢰와 헌신의 모습에 꽃과 바람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해변으로 나가보겠소? 내려가서 보면 더 멋지다던데.”
신뢰와 헌신이 그렇게 권했지만, 꽃과 바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전에 할 일이 있어요.”
“무슨?”
뭔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신뢰와 헌신을 바라보며 성큼 다가선 꽃과 바람은, 그의 목을 감싸 안더니 천천히 입을 맞춰왔다.
앞서 살짝 입술만 마주했던 가벼운 키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농염하기 이를데 없는 입맞춤에 신뢰와 헌신은 순간 혼이 달아나는 기분마저 느껴야만 했다.
잠시 동안 그의 입술을 정열적으로 탐닉하던 꽃과 바람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다시 말했다.
“일주일 동안… 외로웠어요.”
“…”
“안아주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신뢰와 헌신은 마치 방아쇠가 당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꽉 끌어 안았다.
========== 작품 후기 ==========
[Round 1], F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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