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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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아이들과 거짓된 천국에서 놀다 돌아온 형진은 뜻밖의 손님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 일이야? 말도 없이.”
뭔가 멍한 표정으로 정원 한 켠에 앉아 있던 신뢰와 헌신은 형진을 보자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보였다.
“미안. 달리 조언을 구할 만한 상대가 너 밖에 생각이 나질 않아서.”
“조언?”
표정도 그렇고, 몸에서 뭉게뭉게 풍겨 나오는 암울한 분위기도 그렇고, 평소와는 아무래도 다른 모습이라 형진은 일단 그를 자신의 작업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앉아. 마실 것 좀 줄까?”
“술 있나?”
“술?”
뜬금없이 술을 찾는 신뢰와 헌신의 모습에 형진은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네가 술을 마셨었나?”
“그냥… 오늘은 어쩐지 마시고 싶다. 없으면 말고.”
“물론 있기야 하지. 잠시만 기다려봐.”
형진은 곧바로 인벤토리에 보관중인 명주 가운데 몇몇을 꺼내놓고, 아이들의 도핑용으로 만들어 두었던 요리 몇 가지를 안주로 내놓았다.
“자, 받아.”
“고맙다.”
신뢰와 헌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형진은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워주다가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올라왔다 싶을 즈음 자초지종을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신뢰와 헌신은 서글픈 표정으로 잠시 잔에 담긴 술을 바라보더니, 느릿한 목소리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모르겠어. 분명히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밤도 같이 보냈었어. 열렬하게 호응했다거나 한 건 아니어도, 분위기만큼은 정말 좋았다고 생각하거든.”
“…”
둘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나. 게다가 그 단초가 된 것이 크루그와 릴의 약혼식이었다니.
형진은 말없이 신뢰와 헌신의 푸념을 들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맺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꽃과 바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조금 의외이기도 하고, 신뢰와 헌신이 이렇게 그녀에게 목을 매는 상황도 역시 의외라면 의외다.
사람이든 신이든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봐서는 모르는 건가.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뭘?”
“내 주위에 너만큼 여자를 잘 알고 잘 다루는 이가 없어서 하는 말이야. 만약 너라면, 그녀를 어떻게 네 품 안으로 끌어들이겠어?”
이건가.
거절을 당하기는 했어도, 여전히 신뢰와 헌신은 결혼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내 생각으로는 꽃과 바람의 생각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뭐?”
신뢰와 헌신은 놀란 표정으로 형진을 바라보았다. 손으로 꼽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여자들을 거느린 주제에 이게 무슨 소린가.
“그녀의 말대로, 나는 너희들과는 아무래도 경우가 달라. 신과 인간은 기본적으로 가족에 대한 관념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넌 여신도 셋이나 아내로 삼았잖아.”
“그거야… 그녀들 역시 일반적인 신들과는 경우가 다르기 때문이고. 일일이 그 내용을 다 설명해주긴 곤란하지만.”
확실히 형진이 아내로 삼은 세 여신은 일반적인 신들과는 상황이나 기타 여러 가지 면에서 일반적인 신들과는 경우가 다른 쪽에 속한다.
공포와 죽음의 경우엔, 인간으로서의 경험이 다른 어떤 신보다도 많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부터 시작해서, 여러 계층의 삶을 다양하게 겪었으니 보통의 신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희망과 생명은 코가 꿰인 경우다. 형진을 이용하려다 되레 자신의 성녀인 유아의 몸에 갇히는 바람에, 유아의 생각이나 다른 여러 가지에 영향을 받아버려서 결국 형진과 함께 하게 된 경우다.
보호와 균형은 말할 것도 없다. 심각한 의존증인 그녀는, 결혼이고 뭐고를 떠나서 형진이 곁에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미 푹 빠져 버린 쪽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결국 형진이 아내로 삼은 세 여신 쪽이 오히려 일반적인 신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는 셈이다.
“그럼… 내가 잘못 생각한 거라는 얘긴가?”
“이 경우엔, 잘잘못을 따질 계제가 아니라고 하는 편이 맞겠지.”
형진은 잔에 담긴 술을 입에 머금고 잠시 혀로 굴리며 그 향기와 맛을 음미했다. 하지만 신뢰와 헌신은 그 잠시의 시간도 기다리기 어렵다는 듯이 계속해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후… 어차피 네가 싫다는 것도 아니잖아? 성급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녀의 말대로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그냥 함께 시간을 보내는 쪽을 선택하면 어때?”
“그건…”
사실 그건 형진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서로에게 부담 주는 일 없이, 그저 좋은 관계로만 남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신뢰와 헌신은 애꿎은 술잔만 만지작거리면서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형진은 그 모습을 보고는 혀를 찼다.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건가. 아니면, 그녀의 자유분방함이 두려운 건가.”
신뢰와 헌신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형진은 그가 움찔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말한 두 가지가 전부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너도 꽤 욕심이 많은 녀석이었군.”
형진은 우선 그의 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나 같은 녀석이 그녀를 꼬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거야?”
순간 신뢰와 헌신의 눈에서 번쩍하고 빛이 발했다.
“그럴 생각이라면, 네가 아무리 강한 힘을 가졌어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워. 워. 만약의 경우를 말한 것뿐이야. 진정하라고.”
“…”
형진이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지만, 신뢰와 헌신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매도당하면 형진으로서도 조금 울컥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눈 깔아라. 확 정말로 꼬시기 전에.”
“미안.”
그렇게 금방 꼬리를 말거면 애초에 눈을 부라리거나 하지를 말던가. 형진은 금새 풀이 죽어 버린 신뢰와 헌신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어 버렸다. 꽃과 바람도 은근히 귀여운 이런 모습에 마음이 끌린 것이 아닐까.
“애초에 그런 일을 했다가는 아무리 나라도 마누라들이나 아이들을 어떻게 보겠냐. 남의 떡이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그걸 얻기 위해서 내 손 안에 있는 떡을 버리는 짓은 안 해. 그러니 안심해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형진을 찾아와 자초지종을 말한 것 자체가, 단순히 의견을 구하는 것을 넘어서 이미 그녀는 내가 찜했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식의 영역 표시를 하려는 속셈도 있었던 모양이다. 너무 속셈이 뻔히 드러나 보이긴 해도,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 아닐까.
잠시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신뢰와 헌신은 조심스럽게 다른 의견을 냈다.
“보호와 균형이라면… 그녀의 진짜 뜻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오랜 친구이기도 하니까.”
확실히 보호와 균형이라면 꽃과 바람이 잊혀진 신이었을 당시부터 친구로 지내온 사이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직접 꽃과 바람의 진의를 따지고 들기 어려운 신뢰와 헌신으로서는 그녀의 도움을 받고 싶은 것이리라.
하지만 형진은 고개를 저었다.
“미아에게 이 일을 부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그녀를 보내는 순간 꽃과 바람은 네가 나에게 부탁해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걸 바로 알아차리게 될 거야. 그리고 생각하겠지. 그새 가서 다 떠벌이고 다녔냐고. 신뢰와 헌신이라는 이름은 어디다 팔아먹고 둘 사이의 일을 그렇게 남들에게 떠들고 다니냐고.”
“그건…”
“물론 네 입장에선 충분히 떠올릴 만한 생각이긴 하다만, 내가 보기엔 득보다는 실이 더 클 것 같다. 애초에, 그녀는 네 생각처럼 진의를 숨기고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에 결혼을 피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신뢰와 헌신은 형진의 그와 같은 말에 반박할 수 없는 자신을 깨달았다. 애초에 진의가 아닐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미련 때문임을 이해한 것이다.
“그럼… 도저히 더 이상은 방법이 없는 건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신뢰와 헌신의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깡패신으로 악명이 자자한 이 녀석이 사랑 때문에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어쩐지 신선하다고 해야 하나.
생각 같아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살살 놀려 먹으면서 이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계속 이어가고 싶지만, 그래도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고 이렇게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 녀석에게 그런 식으로 못된 장난을 하기는 역시 좀 미안한 게 사실이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뭐?”
방금 전까지 그대로 땅을 파고 들어갈 것만 같았던 신뢰와 헌신의 눈빛이 확 하고 밝아진다. 밝아지다 못해 번쩍번쩍 빛나는 것이, 좀 전에 그렇게 우울하고 힘들어 하던 그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다.
“방법이 있어? 정말? 그게 뭔데? 어서 말 해봐!”
“어어, 진정. 진정하라고.”
“이게 진정할 일이야? 어서 말하라니까!”
“진정해. 그렇게 윽박지른다고 될 일이 아니란 걸 너도 알 텐데?”
형진이 얼굴을 찌푸리자 그제서야 신뢰와 헌신은 움찔하며 슬쩍 물러섰다.
“미, 미안. 그러려던 게 아니라.”
“네 심정은 이해한다만 그녀를 얻고 싶다면, 조금은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급하게 몰아쳐서 될 일이 있고, 느긋하게 만들어가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
“알았어. 그런데… 정말 방법이 있는 건가?”
반신반의하는 신뢰와 헌신의 표정에 슬쩍 웃음으로 마주하며 형진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일단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도록 하자.”
“무슨…”
“인간들이 굳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이어가고 있는 이유가, 넌 뭐라고 생각하지?”
“글쎄?”
간절하게 결혼을 원하고는 있지만, 그 유래나 의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탓에 신뢰와 헌신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초에,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얘기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건 시대나 문화에 따라 여러 가지 의의를 가지게 되지. 때문에 종족이나 국가에 따라서는 그 의미가 크게 변화하는 경우도 꽤 많아. 하지만 본질적으로 수컷과 암컷이 짝을 이루어 함께 생활하는 이유는, 문명이란 걸 만들어 영위하는 인간이나 보통의 동물들이나 결국 하나 뿐이야.”
“그게 뭐지?”
“바로, 자손의 번식과 양육이지.”
신뢰와 헌신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형진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인간의 경우는 임신은 물론이고 아이가 온전히 자라나 어른으로서의 몫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우 긴 편이야. 그런 상황에서 안정적으로 양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남과 여의 역할 분담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거지. 이건 동물도 마찬가지야. 인간만큼 고등적인 사회를 이루지는 않더라도, 암컷과 수컷이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는 동물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을 보다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가기 위함이지.”
이어지는 설명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신뢰와 헌신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자, 잠깐. 그렇다면… 네가 말한 방법이란 건, 설마?”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신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을 보내야만 비로소 자손을 낳고 기르는 것이 가능해지지. 여신 혼자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그렇지 않나?”
“그건… 그렇지.”
신뢰와 헌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형진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을 마쳤다.
“그녀는 또한 네가 원한다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까지 거부하지는 않겠다고 했어. 게다가 네 청혼을 거절한 것 때문에 조금은 미안한 감정마저 가지고 있는 상황이지. 이 정도면,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고 보여지는데? 물론, 나는 보다 확실한 성공을 위해서 사랑에 마음 아파하는 친구를 위해 약간의 도움을 줄 생각도 있지. 어때, 해볼 생각이 있나?”
어쩐지 사악하게 느껴지는 형진의 미소를 보면서, 신뢰와 헌신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뭔가 시커먼 구멍 같은 것이 자신을 빨아들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차피 물러설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하겠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형진은 그런 신뢰와 헌신을 보며 작게 웃었다.
“큭큭… 그 말을 기다렸다네. 친구.”
========== 작품 후기 ==========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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