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78
00977 [성지순례] =========================
“자, 이쪽으로 와요. 어서요.”
주시자 시절에 임무를 위해서 드나든 적도 있고 최근에는 형진을 수행하는 일로 왕래를 하는 편이긴 해도, 그런 행동들의 대부분은 특별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대부분이라 쇼핑이라든지 하는 식의 일상적인 이유로 드나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지구의 문화나 기술이 발달했다고는 해도, 굳이 물건을 사기 위해 드나든다든가 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규설과 힐리에타는 지금 자신들이 당도한 이곳이 일반적인 쇼핑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뭔가 분위기가 묘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른 종족인 그녀들의 느낌으로는 지구인들 자체가 원래 묘한 종족들이다. 그녀들이 알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지구 출신인 형진 때문에 더더욱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귀중한 물건을 파는 곳인 모양이군요.”
아침부터 나와서 줄을 지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규설이 그렇게 말하자, 아유무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아주 귀중한 것들을 팔고 있죠.”
“…”
어째서일까. 순간 아유무가 씩 하고 웃는 표정에서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그럼, 우리도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요?”
힐리에타의 물음에 아유무는 둘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더니 이렇게 답했다.
“원래는 그래야겠지만, 그보다는 다른 일을 먼저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다른 일?”
“네. 언니들을 그냥 이대로 놔두는 건 어쩐지 아쉬운 느낌이 들어서요.”
“…”
불길하다. 뭔가 아주 불길하다. 본래대로라면 이런 느낌이 들었을 때 일단 발을 빼는 것이 상책이겠지만, 불행히도 지금 규설과 힐리에타는 아유무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태라 무작정 빠져 나가기가 쉽지 않다.
“갑작스럽게 오게 된 게 아쉬워요. 그게 아니라면 이런 저런 준비를 많이 했을 텐데.”
“그런가요.”
“자, 이쪽으로.”
아유무는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찾는가 싶더니 둘을 옷가게 비슷한 곳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우월한 신장과 몸매를 지닌 둘이 안으로 들어오자, 일순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확 하고 집중된다. 아까부터 흘끔거리는 사람이 꽤 많아서 조금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던 규설은 그들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이런 저런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코스?”
그리고 그런 생각들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코스라는 단어였다.
아유무는 빠르게 두 벌의 옷을 골라내더니 규설과 힐리에타에게 한 벌씩 안겨주었다. 그리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팔짱을 끼고는 탈의실로 밀고 들어갔다.
“자, 이걸 입어주세요.”
“이걸요?”
“네. 우리가 들어갈 곳은 특별한 곳이라서요.”
“…”
아유무가 집어온 옷은 어쩐지 일상적인 옷이라기보다는 전투용 장비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안에서 전투라도 치러야 하나요?”
규설의 말에 아유무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 안쪽에는 다른 수많은 경쟁자를 쓰러뜨려야만 획득할 수 있는 보물들이 가득 들어차 있거든요. 이것은 그 장절한 전투를 치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투복이라 할 수 있어요.”
“…”
규설과 힐리에타는 그제서야 행사장 밖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내뿜고 있던 기묘한 열기라든가, 이 옷가게 안에 들어왔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지닌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상당부분 왜곡되어 버린 형태라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그런 거라면 이것보다는 우리들이 본래 사용하는 물품들이 나을 것 같네요.”
규설과 힐리에타는 일단 주위를 둘러보고는 자신들을 감시하는 무언가가 없음을 확인하자 그 자리에서 토글을 사용해 전투용의 장비로 갈아입었다.
“와!”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두 미녀가 순식간에 전투용의 장비로 모습을 바꾸자 아유무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 그거 어떻게 한 거에요? 네?”
“이거요? 토글 기능입니다. 필요한 상황에서 그에 걸맞는 장비를 빠르게 교체하기 위해 추종자들에게 지원되는 기능의 하나죠.”
“저, 저도 그거 사용할 수 있나요?”
“일정한 양의 공헌도가 필요하긴 하지만, 전투 상황에 투입되는 주시자들은 대부분 사용하고 있는 걸로 알아요.”
“와아…”
아유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녀 역시 추종자인 건 마찬가지. 그러나 세계를 넘어 우주를 주름잡으며 임무를 수행하는 주시자들과, 기껏해야 거짓된 천국 안에서 허세와 망상의 인성질을 제어하는 것이 고작인 그녀가 기본적인 장비 수준에서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 정도면 될까요?”
“…”
아유무는 자신이 들고 있던 코스튬과 그녀들이 착용한 옷차림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잘 만든 코스튬이라 해도, 실전에서 사용되는 진짜 장비들과는 비교 불가다.
“아유무님?”
“아, 네. 괘, 괜찮아요. 이건… 제가 입던가 해야겠네요.”
“…”
어쩐지 좀 풀이 죽은 듯한 느낌. 힐리에타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규설은 인벤토리 안을 잠시 살피더니 무언가를 꺼내 아유무에게 내밀었다.
“안쪽의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조악한 장비를 착용하는 건 그리 좋지 못한 생각으로 보여집니다. 제가 지닌 것 가운데 예비 장비 하나를 빌려드릴테니 이것을 입으세요.”
아유무는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하려다가 규설과 힐리에타의 모습과 자신을 비교하더니 울상이 되었다. 날씬한 모델 체형인 규설이나, 장비를 착용한 상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우월한 볼륨감을 지닌 힐리에타의 모습과 자신의 유아체형이 너무나 비교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괘, 괜찮아요. 전 그냥 이걸…”
“사양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허세와 망상님을 뵐 낯이 없습니다.”
산군 특유의 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규설의 모습에 아유무는 결국 거부하지 못하고 그녀가 건네주는 아이템을 건네받아 착용했다. 다행히 장비 자체는 착용자의 몸에 맞게 자동으로 사이즈가 조절되는 형식이라 큰 문제는 없었다.
셋이 입은 장비는 기본적인 형태는 모두 동일하다. 차이라고 해봐야 추종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량 생산된 의지의 성채에 각자의 전투 스타일이나 취향에 맞게 다소의 변형이 가해진 정도다.
육박전을 중시하는 것은 힐리에타 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취향에 맞게 이런 저런 장식이 많이 붙어서 어쩐지 변형된 드레스 같은 느낌을 준다. 그에 반해 규설은 본래의 기본적인 형태에서 거의 변화가 없는 스타일이다보니 날씬한 그녀의 체형이 오히려 부각 되는 식이다.
“불편한 점은 없나요?”
“네. 굉장히 편해요.”
“다행이군요. 자, 그럼 나갈까요.”
“네!”
그렇지 않아도 눈에 확 띄는 두 미녀의 등장을 신경 쓰고 있던 사람들은 탈의실에서 나온 셋의 모습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우와…”
“모, 모델인가?”
“저 정도면 꽤 유명한 사람들일 것 같은데?”
“찾아봐!”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규설과 힐리에타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는 바로 인식저하 기능을 사용했다.
“일단 나가죠. 시끄러워질 것 같으니까.”
“네.”
허둥대며 규설과 힐리에타의 신상을 확인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인식저하 능력이 사용되자 혼란에 빠져 버렸다. 분명히 똑똑하게 보았던 그들의 모습이 어느 순간 흐릿해졌기 때문이다.
“뭐, 뭐지?”
“어떤 모습이었더라?”
“누구 사진 찍은 사람 없어?”
“없어.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그렇게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놔둔 채 그들은 유유히 행사장으로 향했다. 이미 입장 시간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천천히 안으로 줄을 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들어가죠?”
“네? 아니… 하지만.”
줄을 서야 한다고 말하려던 아유무였지만, 진행 요원들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제지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자, 힐리에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누구를 쓰러뜨려야 하는 거죠?”
“그, 그게…”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유무는 자신이 사고 싶었던 물품을 판매하는 부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다음 순간 힐리에타가 기다렸다는 듯이 사신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낫을 꺼내들자 기겁을 하며 그녀를 말렸다.
“자, 잠깐만요.”
“네?”
“그걸로 어쩌시려고요?”
힐리에타는 문득 자신의 손에 쥐어진 무기와 주변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무슨 소린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정도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리 강한 자들도 보이지 않고.”
“…”
뭔가 초점이 어긋난 것 같기는 하지만, 적어도 힐리에타가 커다란 낫을 들고 휘둘러대는 모습을 보지 않게 된 건 다행이다.
“잠깐.”
바로 그때, 주위를 살피고 있던 규설이 문득 긴장한 표정으로 아유무의 팔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
아유무는 규설의 품에 안긴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주책없이 콩닥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에 당황했다.
“이 기척은…”
힐리에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마침내 인파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덩치의 남성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두 분이 그런 모습으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것은 바로 규설과 함께 형진의 제자로 들어왔던 나티 족의 쿠였다. 할에게 감화 받아 이런 저런 문화에 동화되었던 그는, 할이 누에족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에 홀려 외도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혼자서 꿋꿋하게 취미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딱 봐도 명백하게 전투 복장을 하고 행사장 안에 들어온 규설과 힐리에타의 모습을 보고, 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형진도 같이 온 건가 싶었던 모양이다.
“저희는 아유무님의 쇼핑을 돕기 위해 함께 왔습니다.”
“아, 그랬군요.”
단순히 쇼핑을 위해 온 것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하다. 무엇보다도 전투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부터 그렇다. 하지만 쿠는 굳이 그런 그녀들의 행동을 따지고 들지 않았다. 모처럼 시간을 내서 취미 활동을 나온 것인데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원하는 물건을 구할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저는 이만.”
“네. 수고하세요.”
쿠가 꾸벅 인사를 하고 사라지고서도, 아유무는 어쩐지 살짝 상기된 얼굴로 규설의 팔을 꼭 끌어안은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규설은 뭔가 그녀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그쪽이 그녀를 보호하기 더 수월하기 때문에 그냥 놔둔 채 행사장 안을 돌아다녔다.
인식저하의 능력부터 시작해서, 상대를 내면으로부터 압박하는 산군의 특수 능력 등을 사용해서 아유무는 훨씬 쉽게 자신이 원하는 물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거… 드릴게요.”
“네? 하지만 이건…”
“괜찮아요. 오늘 두 분이 도와주셔서 예상보다 더 많이 사버리기도 했고, 그래서 고마움의 표시라고나 할까요.”
“…”
규설이나 힐리에타로서는 아유무가 사고자 했던 물품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었지만, 모처럼 귀여운 소녀가 볼을 붉게 물들인 채 수줍은 표정으로 건네는 선물을 필요 없다고 거부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 물건들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소중하게 보관하겠습니다.”
“그래주시면 고맙구요.”
어쩐지 단순히 고마움의 뜻을 표하는 것 치고는 과도하게 수줍어하는 느낌. 물론 규설은 그럴 생각만 있다면 이 소녀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것이 가능했지만, 다른 신의 추종자이기도 하고 자신들에게 큰 도움을 줄 인물의 내면을 허락도 없이 들여다보는 건 좋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에 자제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날의 쇼핑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흠… 그림책인가?”
“아마도. 보려고?”
“그래도 선물을 받은 건데 한번쯤은 읽어봐야지. 나중에 내용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안 봐서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하긴.”
살짝 피곤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규설과 힐리에타는 아유무가 선물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들이 펼쳐든 책의 표지에는 큼지막하게 R-18이라는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