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81
00980 [실사] =========================
두 나라의 수운이 만나는 상업 도시이며, 또한 관광으로도 이름 높은 곳이다보니 밤이 되었다고 해서 금방 조용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긴 항해의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항구로 몰려나온 뱃사람이나 승객들로 더욱 흥청거리기 시작한다.
오늘 밤,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를 놓고 머리에 김이 나도록 고민하고 있는 힐리에타의 시야 한 쪽에 뭔가 반짝거리는 메시지가 도착한 건 천천히 강둑을 따라 시내로 들어서고 있을 때였다.
[시내에 있는 근사한 식당을 예약해뒀다. 힘내!] “…”힐리에타는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혹시나 아버지인 즈라탈이 자신들을 훔쳐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왜?”
그런 힐리에타의 행동에 형진이 말을 걸어온다.
“그, 그게… 시내에 식당을 예약해 두었다고 연락이…”
“그래?”
혹시 자신들의 동향을 남몰래 살피고 있는 것에 대해 불쾌해 하거나 하면 어쩌나 싶어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형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시장에서 먹을거리를 사서 요리를 해야 할지, 아니면 적당한 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나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 되었네. 예약한 곳이 어디야?”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질문을 받자 바로 비서 모드로 바뀌는 힐리에타의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감추려고는 해도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여실히 눈에 들어온다고나 할까.
허둥거리며 예약한 식당의 위치를 찾은 힐리에타가 시각화 정보로 그것을 전달하자 형진은 느긋하게 둘의 허리를 감싸 안은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훌륭한 맛집이라도 형진의 실력보다 훌륭하지는 않겠지만, 모처럼 다른 세계에 왔는데 그 세계의 음식도 경험하지 않는 것도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다.
위치 정보대로 찾아가 이름을 밝히자 직원이 나와 정중하게 그들을 맞이한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곳은 일종의 극장형 식당이었다. 중앙에 원형의 무대가 자리잡고, 그 아래쪽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이 배치되어 있다. 손님들은 그 주위의 테이블은 물론이고, 이층과 삼층에 자리 잡은 테라스 같은 곳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며 식사를 하게 되어 있는 구조다.
“이런 곳이었군. 멋진데. 자, 앉자.”
“네.”
테이블은 반원형으로서 무대를 내려다보면서도 서로 바라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형태다. 형진이 가운데, 그리고 규설과 힐리에타가 각각 좌우로 자리를 나누어 앉자 곧바로 직원들이 줄지어 들어와 그들의 앞에 놓여진 테이블 위에 음료와 간단한 음식을 차려 놓는다.
식욕을 돋우는 약한 도수의 술과 전채를 입으로 가져가는데, 문득 주위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대신 무대를 밝히는 조명이 천장으로부터 비춰지면서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뭔가 싶어 잠시 기다리자, 잘록한 허리와 풍성한 가슴을 강조한 드레스를 입은 가수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와 노래를 부른다. 차분하면서도 은은한 목소리가 꽤 고혹적이다.
식사 중에 간단한 음악을 곁들이는 건 어디서든 있는 일이지만, 이런 아날로그적인 감성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형진은 물론이고 규설과 힐리에타 역시 조금은 몽환적인 가수의 목소리에 빠져드는 느낌마저 받고 있었다.
잠시 이어지던 가수의 노래가 끝나자, 셋은 식당 안에 있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열렬한 박수를 보내다가 작은 방울 소리와 함께 음식들이 테이블을 채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일종의 코스 메뉴인지, 아니면 미리 즈라탈이 이런 것까지 다 예약을 해둔 것인지는 몰라도 따로 음식을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이내 상다리가 휘어진다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그득하게 테이블이 채워진다.
메인은 갖가지 해물을 중심으로 한 찜 요리다. 아마도 게의 한 종류라 생각되는 커다란 갑각류를 중앙에 두고 다른 여러 가지 생선들을 양념에 푹 졸인 느낌이랄까. 여기에 생선살을 스테이크 형태로 큼지막하게 구운 것이 놓여지고, 커다란 조개 비슷한 것으로 국물을 낸 요리, 그리고 아마도 그 국물에 찍어 먹는 것이 아닐까 싶은 바삭하게 구운 빵 같은 것이 은은하게 그들의 후각을 자극한다.
“자, 먹자.”
“네.”
스프인지 스튜인지 모를 국물 요리에 빵을 찍어 한 입 가져가자 갖가지 향신료의 맛이 입안에 확하고 퍼져 나온다. 재료 그 자체의 풍미보다는 향신료를 아낌없이 부어 넣은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빅토리아 시대를 연상시키는 의복과 마찬가지로, 음식 역시 조금은 과시의 경향이 있는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맛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진한 향신료의 향기가 좀 과하다는 느낌일 뿐.
일반적인 인간보다 냄새에 좀 더 민감한 쪽인 규설이나 힐리에타는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재료 본연의 맛과 향취를 살려내는데 초점을 맞춘 형진의 음식에 길들여진 탓에 이렇게 향신료를 퍼부은 음식에는 아무래도 거부감이 생기는 모양이다.
어쨌든, 그렇게 서로 다른 느낌으로 음식을 즐기고 있자니 다시 음악이 바뀌면서 무대에 몇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뭔가 하고 바라보니, 노래와 연극을 합친 일종의 가극이 상연되기 시작한다.
각종 미디어에 익숙한 형진이나, 그런 그를 보좌하는 입장에 있는 규설과 힐리에타로서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느낌. 하지만 막상 가극이 상연되기 시작하자 식당의 분위기는 앞서와는 달리 상당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각 장면마다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나 탄성 같은 것이 이전의 무대와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다.
예상 외로 과열되는 느낌에 형진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뭐랄까. 이 정도로 환호할 정도의 무대는 아닌 것 같은데 사람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열광적이라 조금 놀랐다고 해야 하나.
“꽤 인기 있는 연극인가 봐.”
“그러게요.”
사실 규설이나 힐리에타의 반응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애초에 그녀들은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간 뒤의 일을 생각하느라 다른 것에 열광하고 말고 할 겨를도 없는 상태다. 줄거리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형태의 가극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고나 할까.
음식도 무대도 기대보다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형진은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 힐리에타는 작게나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형진이 식사나 여흥에 트집을 잡아서 추종자를 질책하거나 하는 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조심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거처럼 단순히 신과 추종자의 관계가 아니라 부부 관계가 되었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자, 그럼 이만 돌아갈까.”
식사를 마친 그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 나갔다.
“뭔가 특이한 점은 없었나?”
“네. 그냥 조용히 음식과 무대를 즐기다 나갔을 뿐입니다.”
“그래? 달리 누군가와 접촉하는 기색도 없었고?”
“그렇습니다.”
안카로 사와 인접한 양국이 영토 분쟁에 대한 판단을 신에게 일임했다는 첩보를 접한 뒤, 행정청 산하의 조사원들은 도시에 들어온 이방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 상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의 목표 중에는 오늘 갑자기 도시에 모습을 드러낸 형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형진은 처음부터 영토 분쟁에 대한 실사 같은 건 뒷전이고 비서이며 또한 아내이기도 한 규설과 힐리에타와 느긋하게 관광이나 즐기러 온 상황이라 그들의 눈에 이상하게 비칠만한 일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세 번째 테이블에 있던 이들이 조금 수상합니다. 가극이 상연되는 동안 뭔가 쪽지 같은 것을 주고받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래?”
“혹시나 싶어 마차를 불러주었습니다. 마부를 통하면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수고했다. 아주 잘 했어.”
“별말씀을.”
그렇게 조사원들이 헛다리를 짚고 있는 동안, 형진은 자신들을 향해 가해지던 감시의 눈길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느긋하게 밤거리를 지나쳐 자신들이 머물 저택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기가 무섭게, 형진은 규설과 힐리에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들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그렇지 않아도 머리속이 복잡하던 그녀들은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버리고 말았다.
“씻자.”
“이대로요?”
“이대로.”
“…”
규설과 힐리에타는 뭐라 대답도 못하고 허둥대기만 했다. 형진은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껄껄 웃더니 허리를 감싸 안은 손을 풀어주었다.
“먼저 들어가 있을게. 준비가 되면 천천히 들어와.”
“가, 감사합니다.”
과연 이게 감사할 일인가 싶긴 하지만, 규설과 힐리에타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형진은 두 아내를 바깥에 남겨두고는 저택 안에 마련된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법 널찍한 탈의실이 있었지만, 그는 귀찮다는 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 던진 다음 욕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겉모습은 이 세계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지만, 욕실 안쪽은 지구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서너명이 들어가 수영을 해도 될 것 같은 커다란 욕조에는 물거품이 뿌연 안개를 피워 올리며 부글거리고 있었고, 폭포를 연상시키는 샤워기는 앞에 사람이 서면 자동으로 그것을 감지해 물을 뿜어내도록 되어 있었다.
형진은 일단 간단하게 샤워로 몸을 씻은 다음 커다란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 뿌연 유리 너머에 자리 잡은 탈의실에 규설과 힐리에타의 모습이 살짝 비치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며 누군가를 호출했다.
“즈라탈.”
작은 목소리였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 말에 호응한다.
“부르셨습니까. 두 우주의 주인이시여.”
간단하지만 뭔가 중2병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거창한 호칭이다. 물론 즈라탈이 중2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아부를 하는 것도 아니다.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고, 그저 목소리로만 화답하는 수준. 그러나 즈라탈의 목소리에는 또한 조심스러움과 긴장감이 뒤섞여 있었다. 힐리에타가 형진의 아내가 되면서 노스페라투 안에서 그의 위상이 한층 격상되기는 했지만, 즈라탈에게 있어 이 강력한 신은 여전히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이다.
“조사는 잘 되어 가고 있나?”
“말씀하신대로, 안카로 사의 시민들은 물론이고, 그곳을 드나드는 자들과 관련된 이권을 가진 자들, 그리고 인접한 양국에서 제공한 자료들을 종합해 조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전의 즈라탈이라면 조사고 뭐고 다짜고짜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족치는 쪽이었겠지만, 주시자들 중에서도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선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과격함보다는 신중함이 많이 늘어났다고 해야 하나.
“오늘 보니 나를 감시하던 자들이 있는 것 같더군.”
“행정청의 조사원들입니다. 일단 도시 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은 모조리 확인을 하는 모양입니다만, 눈치는 채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형진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정도라면 마음 놓고 느긋하게 휴가를 즐겨도 될 것 같다고.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보고를 받는 일을 마치자, 욕실의 문이 열리며 규설과 힐리에타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대놓고 알몸을 드러내기는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있기는 했으나, 오히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형진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지어진다.
느긋하게 욕조에 몸을 기댄 채 바라보고 있자니, 규설과 힐리에타는 조심스럽게 한쪽에 앉아 몸을 씻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두 아내가 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감고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샤워기 앞에 서 있는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흐뭇한 광경이다.
형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간단하게 몸을 씻는 일을 마친 둘은 수건으로 앞을 살짝 가린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욕조 안으로 들어와 몸을 담갔다. 부글거리는 물거품과 피어오르는 안개 때문에 그녀들의 몸을 속속들이 살필 수는 없었지만, 말아 올린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가느다란 목덜미와 부드럽게 이어지는 쇄골의 곡선은 그것만으로도 남자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에 충분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가까이.”
형진의 입에서 한 마디 말이 흘러나오자 규설과 힐리에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다가앉았고, 다음 순간 자신들의 허리를 감싸오는 강인한 팔의 느낌에 작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오늘 밤은 꽤 길어질 거야. 각오는 되었겠지?”
조금은 음흉한 느낌으로 형진이 그렇게 속삭이자, 규설과 힐리에타는 차마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 작품 후기 ==========
아웃…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