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88
00987 [마을로] =========================
“자, 이걸 입어 봐.”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수호신 가운데 가장 성공한 경우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쉴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추종자들도 있으니 어느 정도는 맡기고 쉬어도 될 법 한데. 탑와와 루벨라가 그렇게 말하면 말없이 빙그레 웃을 뿐이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 그런가보다 싶어지는 미소라고나 할까. 조금은 계산적인 그녀가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친구가 되어 버린 건, 그런 그녀의 미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인간 세상에 내려가는 것도 일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많은 잡신들이 교단의 기반을 닦는다든가, 인간들에게 지명도를 높이고자 하는 목적으로 열심히 인간 세상을 들쑤시고 다니니까. 하는 일만 놓고 봐도 놀이라든가 유흥이라든가 나들이 같은 표현은 쓰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런 저런 옷을 꺼내는 물벼룩과 클로렐라의 표정은 기대와 흥분으로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누가 보면 오랜 만에 휴가를 내서 친구와 나들이를 가기 전의 모습인 줄 알겠다.
“이건?”
왕성에서 일을 하는 수호신들은 요정들을 통해서 필요한 옷가지를 얻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옷가지는 대부분 아이들을 돌볼 때 입는 일종의 작업복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작업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왕성의 다른 식구들이 입는 옷을 흉내 낸 것이 많다는 정도다.
이를테면, 메이드복이라든가 메이드복이라든가 메이드복 같은 것이 그런 종류다.
요정들도 그렇고, 형진의 아내들도 그렇고, 어느 틈엔가 왕성에서는 일을 할 때 메이드복을 입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하기야 유아부터 시작해서 형진의 아내들이 이 왕성에 들어왔을 때 처음 입은 옷부터가 메이드복이고, 요정들도 다소 자기들 나름대로 어레인지를 하기는 했어도 역시나 평소에 가장 많이 입는 옷은 메이드복이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메이드복과 작업복이 동일시되어도 이상한 일은 아닌 셈이다.
탑와와 루벨라가 처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을 때 지급 받은 옷도 사실은 메이드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요정들 취향에 맡게 조금은 치렁치렁하면서도 조금은 야시시한 느낌의 그런 메이드복은 처음부터 취향이 아니었고, 이내 남자 수호신들에게 지급된 집사복 쪽을 선호하게 되었다. 깔끔하면서도 나풀거리지 않는 복장이라 일할 때도 꽤 편리했기 때문에, 당연히 메이드복을 입어야 하는 줄 알았던 수호신들도 차츰 그녀를 따라 집사복을 입는 경우가 많아졌다.
모처럼 왕성 안에 가득한 메이드들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던 형진은 이내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쉬긴 했지만 그렇다고 수호신들에게 복장을 강제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바빠서 그들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부족했다는 쪽이 맞다. 쓸데없는 일에 파고들 여유가 없었다고나 할까.
메이드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인식한 몇몇 수호신들은 요정들을 통해 다른 옷을 손에 넣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모델이 되는 건 왕성의 다른 식구들인 경우가 많았다. 돌보고 있는 환수들의 전통 복장 같은 것이라든가, 형진의 아내들이 입고 다니는 옷도 인기가 많았다. 특히 왕성 내의 유행을 선도하는 여성들을 꼽으라면 제랄딘과 요안나, 그리고 희망과 생명 정도를 들 수 있었다.
제랄딘과 요안나는 각기 머물던 곳은 다르지만 오랜 세월 동안 상류층으로 살아온 경험이 있었다. 희망과 생명은 아예 헐리웃에서 여배우로 잘나가던 몸이다. 옷차림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유아나 미엘과는 경험치 자체가 다르다고 할 정도로 자신들에게 어떤 옷이 잘 어울리는지 알고 있었다. 인간 세상에 대한 경험치 자체가 현저하게 부족한 수호신들에게는 그 자체로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탑와와 루벨라가 특히 눈 여겨 보는 쪽은 바로 요안나였다. 임신한 상태라 최근엔 넉넉한 옷을 주로 입기는 해도, 패션 감각 자체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귀족적인 느낌이 풍겨나오는 제랄딘이나 희망과 생명과는 달리, 실용적이면서도 깔끔한 그녀의 옷차림은 탑와와 루벨라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 그녀의 취향으로 보자면, 지금 물벼룩과 클로렐라가 꺼내드는 옷은 뭔가 좀 당황스런 느낌이다.
“오늘 가려는 곳은 좀 추운 편이라서.”
추우니까 두툼한 옷을 걸쳐야 한다는 것도 뭔가 신선하긴 하다. 왕성 라이언하트는 계절에 따른 기후 변화 자체가 거의 없어서 그럴 생각이 있다면 일 년 내내 비키니 수영복만 걸치고 다녀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다.
확실히 지금 건네진 옷은 옷감도 꽤 두툼하고, 살과 맞닿는 부분에 폭신한 느낌의 하얀 털이 달려 있어서 꽤 따뜻할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소재의 측면을 제외하고 보자면, 정말로 추운 곳에서 입는 옷이 맞는 건가 싶은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우선 어깨가 완전히 드러나 있다. 원피스 형태의 치마는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다. 아무리 소재가 좋아도, 이렇게 맨살이 훤히 드러나 있는 형태인데 정말로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 뿐이야?”
혹시나 해서 묻자,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아차 싶었던지 얼른 다른 것을 꺼낸다.
“이건 팔에, 이건 다리에… 그리고 이것도 머리에 쓰면 돼.”
팔과 다리를 감싸는 토시와 함께 두건이 달린 케이프가 따라 나온다. 확실히 이렇게 갖춰 놓고 보니 아까보다는 좀 나은 느낌이긴 하지만, 그래도 맨살이 드러나는 부분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물벼룩과 클로렐라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어서 입어보라는 식의 눈길로 그녀를 마주볼 뿐이다.
아무런 의혹도 없이. 너무나 순진무구하게. 이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기대된다는 느낌으로.
“왜?”
그리고는 오히려 그렇게 물어보기까지 한다.
“아니, 아무것도.”
만약 형진 같은 인물이 이런 옷을 입으라도 내밀었다면, 대번에 이 변태 같은 작자가 뭐하는 짓이냐는 생각을 떠올렸으리라. 하지만 상대는 이보다 더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착한 여신. 게다가 탑와와 루벨라는 인간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었다. 최소한 그녀에게 지금 눈앞에 내밀어진 이 빨간 옷감과 복슬복슬한 하얀 털이 조합된 옷이 산타복이라고 불린다는 지식 정도만 갖춰져 있었더라도 상황은 아마 여러모로 많이 달라졌겠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인간들의 복식에 대해서는 왕성의 식구들이 입고 다니는 옷 정도 밖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결국 탑와와 루벨라는 기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친구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옷가지를 챙겨든 채 칸막이 뒤로 가서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다.
“와아! 너무 예뻐!”
“그, 그래?”
허벅지를 넘어 속옷이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짧은 치마에, 케이프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복장을 입고 있으니 뭔가 마음이 진정되지를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감탄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니 또한 한편으로는 뿌듯한 기분도 느껴진다. 이래저래 이율배반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둘 다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둘 다 인정하기는 미묘한, 그런 심정으로 머뭇거리는 것이 고작이다.
“응. 내가 입으면 뭔가 좀 어색하고 그랬거든. 역시 어울리는 사람이 입으니까 정말 너무 너무 예뻐.”
적어도 빈 말은 아니다. 팔다리가 길어서 맵시가 산다고 해야 하나. 드러난 부분이 신경 쓰이긴 해도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칭찬을 받으니 탑와와 루벨라도 조금쯤은 우쭐해지고 말았다.
“잠깐만 기다려봐. 나도 갈아입고 올게.”
“응.”
잠시 기다리자 물벼룩과 클로렐라도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녀가 입은 것도 일종의 산타복이었지만, 탑와와 루벨라가 입은 것과는 달리 보다 정통 스타일의 산타복에 가까운 형태다. 외투 형태로 두툼하게 만들어진 상의를 제외하면 비슷한 건 무릎이 살짝 드러나는 스커트와 따뜻해 보이는 발 토시 정도다. 섹시하지는 않지만, 귀여운 느낌은 이쪽이 더 하다고 해야 하나.
“어때?”
“잘 어울려. 너무 귀여워서 집에 가지고 가고 싶어.”
“뭐야, 그게. 아하하하.”
이 산타복들은 물벼룩과 클로렐라가 지난 번에 인간들의 마을로 내려갔을 때, 그곳의 사람들이 선물한 것들이다. 성탄절이 가까워오는 때이니 마을의 마스코트 같은 느낌으로 자리 잡은 그녀에게도 그런 기분을 나누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실 선물 받은 산타복은 이 두 가지 외에도 몇 종류가 더 있었다. 누군가는 귀여운 그녀에게 모처럼의 명절 분위기를 나눠주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섹시한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엉큼한 생각에서 그렇게 옷을 선물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식으로 다른 마음을 품고 옷을 선물한 이는 물벼룩과 클로렐라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곧바로 응징을 받았지만, 그건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다.
“자, 가자.”
“응.”
선물 받은 옷을 입기는 했지만, 그 옷을 입을 시기가 이미 한참이나 지났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두 여신은 물벼룩과 클로렐라가 자주 들르는 마을로 향했다.
“와아…”
탑와와 루벨라가 처음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본 것은,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눈이었다. 폭신폭신 느낌의 솜털 같은 함박눈이 세상을 온통 뒤덮은 채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드러나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는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우와아…”
그런 그녀보다 한 박자 늦게 물벼룩과 클로렐라 역시 탄성을 터트렸다. 만약 그녀가 아닌 다른 신이라면 스스로 감탄하기 보다는 괜히 우쭐한 느낌으로 어때 하면서 조금쯤은 잘난 척을 했을지도 모른다.
“너까지 감탄하면 어떻게 해?”
“응? 왜? 예쁘잖아. 멋지잖아.”
“풋. 그래. 네 말대로야.”
탑와와 루벨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친구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마을은 어느 쪽이야?”
인간 세상에 도착하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 그래서 탑와와 루벨라는 즐거운 기분으로 그렇게 말을 돌렸다.
“저쪽. 저기 보여?”
“아… 저기구나.”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골짜기 안에 자리 잡은 아담한 마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언덕에 가려진 부분을 감안하면 사실 그리 작지 않은, 소도시 규모 정도는 되는 곳이었지만 이곳에서 보면 산속에 숨겨진 작은 마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가자.”
“응!”
둘은 손을 잡고 소풍 나온 듯한 느낌으로 즐겁게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살짝 녹기 시작한 눈 때문에 성대하게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꺅!”
“아코!”
두툼한 산타복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얼얼할 정도로 엉덩이가 아파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탑와와 루벨라가 손을 꼭 잡아줬길래 망정이지, 자칫하면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그대로 주욱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갈 뻔 했다.
“우… 아파.”
“괜찮아?”
두 여신은 그제서야 눈앞에 쌓인 눈이 그저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엉덩이에 묻은 눈을 털며 조심조심 일어난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듯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빗자루?”
빗자루라니. 물론 왕성에서 아이들을 돌보다 보면 어질러진 것을 치우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처럼 인간 세상에 나왔는데 뜬금없이 빗자루라니.
“응. 원래는 마을에 가서 시작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 만이라도 우선 치우자.”
“…”
애초에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눈이 많이 내리면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곳이다.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면 몰라도 마을 사람이라면 눈이 많이 왔을 때 위험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누군가 다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대뜸 눈을 쓸기 시작했다. 아직 인간 세상에 대해 잘 모르는 탑와와 루벨라는 뭔가 좀 아니다 싶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런 그녀의 행동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