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89
00988 [마을로] =========================
눈이라는 게 보기는 예쁘고 좋을지는 몰라도 교통이 중요한 현대 사회에서는 귀찮음을 유발하는 대상일 수밖에 없다. 녹아서 질척거려도 문제고, 얼어서 미끌거려도 문제. 인력과 장비를 들여서 치우지 않으면 여러 가지 사고를 일으키니 더욱 그렇다.
특히나 나이가 있는 어르신들의 경우에는 단순히 좀 불편하다 정도로 끝날 얘기가 아니다. 미끄러져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자칫 골절 등의 중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심 같은 경우는 그나마 인력이나 장비가 충실하기라도 하지, 시골 같은 경우는 그나마도 부족한데다 주민들 역시도 노령화되니 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다.
“또 이렇게 많이 내렸네. 언제 다 치우나… 응?”
집 앞의 길을 하얗게 뒤덮어 버린 눈을 보며 한숨을 쉬던 노인은 문득 어디선가 들려오는 깔깔거리는 웃음 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빨간 산타복을 입은 젊은 아가씨 둘이서 빗자루를 든 채 웃음꽃을 피우며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꺄앗! 아하하하하!”
“그러니까 조심했어야지. 어머, 어머. 꺄아앗!”
“조심하라며? 풉!”
“엉덩이에 묻은 눈이나 털고 말하시지? 꺄앗!”
“파하하하핫!”
눈을 치우는 건지, 엉덩이로 눈을 뭉개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가는 모습. 하지만 그런 서로의 모습에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아가씨들의 모습은 보는 이의 눈을 절로 흐뭇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성대하게 넘어지면서 얼핏 드러나는 속옷 얘기가 아니라, 웃음 그 자체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저런. 저런. 저러다가 옷 다 젖겠네.”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리고는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두 여신은 제법 훌륭하게 눈을 치우며 내려오고 있었다. 저렇게 넘어지고 자빠지는 와중에도 저렇게 빠르게 눈을 치우는 게 가능한 건가 싶은 느낌이라 조금은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노인은 그녀들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그제서야 허둥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몇 가지 물건을 챙겨 나왔다.
눈을 치우면서 언덕 아래로 내려온 두 여신은 문득 길과 마주한 집에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어버린 노인 하나가 나와 자신들에게 손짓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저희요?”
“그래요. 잠깐만 이리로 와 봐요.”
탑와와 루벨라는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경계심 없는 모습으로 노인에게 다가갔다.
“이건 수건이고, 이건 핫팩이에요. 옷이 젖으면 추울 테니 쓰도록 해요.”
“네? 괘, 괜찮은데.”
“모르는 소리. 날씨가 좀 풀리긴 했어도 이럴 때가 오히려 감기 같은 것에 걸리기 쉬워요. 잔뜩 추우면 그만큼 대비를 하게 마련이지만 지금은 그렇지를 않잖아요. 게다가 옷도 젖었고. 그러니까 쓰도록 해요.”
“아… 감사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여신쯤 되면 감기 같은 것에 걸릴 일도 없다. 하지만 이것저것 챙겨주는 노인의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라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방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녀답다고 해야 하나. 인간 세상에 내려와 그들과 접촉하는 일 자체가 처음인 탑와와 루벨라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휘청거리면서 자신에게 다가와 수건과 핫팩을 내미는 친구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건이야 그런가 보다 하는데, 핫팩은 도무지 뭔지 알 수가 없다.
“이게 뭐야?”
“아… 이거? 이건 말이지.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거야. 내가 시범을 보여줄게.”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고는 몇 번 흔들어 보이고는 탑와와 루벨라의 등 뒤로 돌아가 허리쯤에 그것을 붙여 주었다. 그냥 주머니 속에 넣는다든가 하는 식이 아니라 붙이는 형태였던 모양이다.
“응?”
살갗에 직접 닿은 것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은 느낌이었지만, 이내 후끈거리는 기운이 허리로부터 전해져 오기 시작한다.
“어때. 따뜻하지?”
“응! 신기해!”
따뜻한 기운이 몸 전체로 은은하게 퍼지는 느낌이랄까. 권능을 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짓된 천국에서처럼 마법을 쓴 것도 아니다. 핫팩 하나 허리에 붙였다고 얼마나 따뜻해질까 싶기는 하지만, 이런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탑와와 루벨라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나도 붙여줘.”
“응!”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어서 친구의 허리쯤에 신중하게 붙여준다. 피부에 직접 닿지 않으면서도 외부에 핫팩이 직접 드러나지 않도록 붙여야 하다 보니 속살이 얼핏 드러나고 있었지만 두 여신은 그런 건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커흠. 대, 대단한 것도 아닌데 뭘. 여기 몇 개 더 있으니까 청소하다가 추우면 더 쓰도록 해요.”
핫팩을 건네준 노인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자 화들짝 놀라면서 그렇게 말했다. 다 큰 아가씨들이 핫팩을 붙인다 뭐한다 하면서 은근슬쩍 속살을 드러내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다.
“와아! 정말로 감사드려요!”
“감사는 무슨. 고생하는데 이 정도밖에 도움을 못 줘서 미안해요.”
“별 말씀을요! 맡겨주세요!”
선물까지 받아서인지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용기 백배해서 더욱 열심히 눈을 청소하는 일에 나섰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런 둘을 돕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원래대로라면 기껏해야 자기 집 앞이나 자동차 위에 쌓인 눈을 치우는 정도로 그쳤겠지만, 물벼룩과 클로렐라를 알아본 사람들이 나서면서 마을 대청소 같은 느낌이 되어 버렸다.
“클로에.”
“네?”
“한동안 안 보이길래 무슨 일이 있는 건줄 알았지 뭐에요. 별 일 없었지요?”
“일 때문에 조금 바빴어요. 죄송해요. 자주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스스럼없이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물벼룩과 클로렐라의 모습을 보면서 탑와와 루벨라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평균 연령이 상당히 높은 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녀를 다른 잡신들처럼 영웅놀이를 하는 철부지들이 아니라 딸처럼 대하는 모습이 뭔가 보기 좋았다.
“클로에라는 이름은 뭐야?”
“애칭.”
“애칭?”
“응. 내 이름이 뭔가 막 부르기가 좀 뭐하잖아. 그래서 몇몇 분들이 클로에라고 부르던 것이 애칭이 되어 버렸어.”
“…”
탑와와 루벨라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친구가 다른 잡신들과는 다른 목적으로 이렇게 인간 세상에 나온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 나와 이런 저런 일들을 하는 잡신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신의 이름을 인간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때문에 원래의 이름이 아닌 애칭 같은 걸로 불려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본래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한 상태로 애칭을 부르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냥 애칭만 기억된다면 모처럼 인간 세상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는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물벼룩과 클로렐라가 하고 있는 일은 다른 신들에게는 바보짓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모처럼 힘들게 이런 저런 일을 해놓고,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시키지 못해서야 본말전도 아니겠는가.
하지만 탑와와 루벨라는 오히려 이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여기서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가족이나 다름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여느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세월을 살아온 여신들이기에,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기분 나쁠 수도 있다. 하지만 물벼룩과 클로렐라는 그런 것 따위는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들과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었다.
“이쪽의 예쁜 아가씨는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네? 저요?”
“실례가 아니라면 이름을 알려주지 않겠어요?”
“탑… 아니, 그냥 벨라라고 불러주세요.”
자신의 신격을 그대로 말하려던 탑와와 루벨라는 주민들과 함께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는 그냥 부르기 쉬운 이름을 알려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탑와와 루벨라 같은 이름을 대봐야 의미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이름을 물어본 노인은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 이름 말고. 진짜 이름 말이에요.”
“네?”
“음… 저분 같은 이름이 있지 않아요? 물벼룩과 클로렐라님 말이에요.”
“…”
탑와와 루벨라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인간 세상에 대한 것을 잘 알고 있지는 못했다. 하지만 형진에게서 새로운 임무를 전해듣고는 이런 저런 정보를 모았다. 물론 다급하게 알아본 것이라 여러모로 상식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신들이 사용하는 이름들이 인간들에게 생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벨라라는 애칭을 스스로 만든 것도 결국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물벼룩과 클로렐라와는 다르게, 그녀는 제법 신중하고 준비성이 철저한 여신이었다.
눈앞의 노인에게서 물벼룩과 클로렐라라는 이름이 나오자 놀란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 그게…”
“알려줘요. 물벼룩과 클로렐라님의 친구 분 이름도 몰라서야 되겠어요.”
“…”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지금 함께 청소를 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 하나 물벼룩과 클로렐라에게 함부로 말을 놓거나 하고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곳의 문화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경애의 의미였다.
클로에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건 물벼룩과 클로렐라라는 이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 이름에는 그들에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밀함과 애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물벼룩과 클로렐라라는 이 천진난만한 아가씨가 보통 존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탑와와… 루벨라입니다.”
조금쯤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자, 이름을 물어본 노인은 공손하게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역시 그쪽 분도 보통 분은 아니셨군요.”
“알고… 계셨나요? 저 녀석에 관한 것도.”
“보통의 평범한 아가씨는 트럭을 뒤집어서 그 안에 깔린 사람을 구하거나 하지 못하니까요.”
“하하하.”
탑와와 루벨라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그런 일을 벌이는 상대를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노인은 고개를 돌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마을 주민들과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고 있는 물벼룩과 클로렐라를 푸근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분이 아니었다면, 난 벌써 몇 달 전에 사고로 죽었을 거에요. 그때 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아…”
탑와와 루벨라는 방금 전에 나온 트럭 어쩌고 하는 얘기가 이 노인의 경험담임을 알아차렸다.
“아실 거라 생각하지만, 저분이 좀 불안한 면이 있잖아요.”
“그런… 면이 좀 있긴 하죠.”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맹하다고 해야 하나. 물론 스스로는 제법 똑 부러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도,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뭔가 우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은 느낌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탑와와 루벨라가 그녀와 급속도로 친해진 이유 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저희들이야… 평소에 저분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가 없으니 아무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항상 이 마을을 찾을 때는 혼자인 것도 그렇고.”
뭐랄까. 이래서야 인간을 보살핀다기 보다는 보살핌 받는 쪽이 아닐까 싶음 느낌이다. 어쩐지 그녀답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조금은 안심했어요. 이렇게 똑 부러진 친구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하하…”
“앞으로도 클로에님을 잘 부탁드려요.”
자신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부탁하는 노인의 말에 탑와와 루벨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