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98
00997 [무도회] =========================
일반적으로, 국가 규모의 행사는 그만큼 많은 시간과 인력, 그리고 물자가 필요하게 된다. 이번처럼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참여하기로 되어 있는 행사라면 그건 말할 필요도 없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준비에만 몇 개월은 족히 걸릴 정도의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단순히 왕실에서 모든 귀족들을 불러 모으는 정도에 그친다면야, 기간을 넉넉하게 잡고 느긋하게 준비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무려 신이라는 존재가 참여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아무리 해박한 자라도, 신이 이런 식으로 공개석상에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떠올리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형진이 대관식에서 모습을 드러낸 일이 있긴 하지만 그건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고, 실질적으로 형진이 두 우주를 통할하는 주신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조차 아직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으니 적절한 예라고는 보기 어렵다.
어쨌든, 그렇게 신의 직접 참가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에 직면하다 보니 무작정 준비 기간을 길게 잡기도 어렵게 되었다. 때문에 이번 무도회를 주관하게 된 왕실에서는 최대한 시간을 단축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무도회는 그것이 결정된 날로부터 보름 뒤에 열리게 되었다.
“꽤 무리하는군.”
보고를 받은 형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류나 운송이 극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도 전국에서 사람들을 불러보아 행사를 치르려면 충분한 예산과 시간을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하물며 이제 막 걸음마 수준을 떼고 있는 타나토스라면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신전을 이용하려는 건가.”
“그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긴.”
결국 보름이라는 시간은 신전에 비치된 성물과, 요정들을 이용한 택배 서비스를 이용했을 경우를 가정한 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무리를 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말이 쉬워서 전국의 모든 귀족을 불러 모으는 것이지, 모르긴 해도 바츠크렌이라는 나라의 역사상 이런 식의 행사가 벌어지는 것조차 처음이리라.
만약 여기서 형진이 살짝 심술을 부린다면, 그래서 신전에 비치된 황혼의 성물이나 요정들의 택배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왕실은 자신들이 정한 일정을 만족시킬 수 없게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은 모처럼 일으켜 세우려던 왕실의 권위에 상당한 타격이 될만한 일이다.
“탑와와 루벨라에게는 전했고?”
“네. 하지만… 역시 그런 공개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그리 탐탁지 않으신 듯 합니다.”
“그런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추종자를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설명했겠지?”
“그렇습니다. 다만…”
“다만?”
“추종자들을 받아들이는 일의 진의에 대해서 다소 고민이 있으신 듯 했습니다.”
“흠…”
탑와와 루벨라에게는 이번에 추종자를 공개적으로 맞이하는 일에 대해 가급적 좋은 부분만 설명했다. 그 안에 감춰진, 이를테면 그들 자체가 바츠크렌이라는 나라에 변혁을 가져오기 위한 하나의 미끼라는 점 등은 말하지 않은 상태다.
“여성의 직감이라는 건가. 의외로 감이 좋은 건지도 모르겠어.”
“…”
룩스는 형진이 의자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것을 보고는 가만히 그의 입에서 새로운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뭔가 생각을 하던 형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처음에는 일이 이런 식으로 커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불참을 허락하시겠습니까.”
“그건 곤란하지. 어쨌든 자신의 추종자를 뽑는 일인데, 다른 이가 함부로 결정하도록 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선례고 뭐고 다 떠나서, 그건 신으로 당연한 의무야.”
룩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도, 추종자를 자기들 멋대로 뽑는다는 식의 선례를 만들어서 왕실의 힘을 키워줄 필요는 없는 일이니까.
사실 왕실의 입장에서 보자면 수호신이 나라를 보살핀다는 식의 일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자기들끼리 잘 해먹고 있는 판에, 갑자기 어디서 나왔는지조차 모를 상전이 떡하니 모습을 드러낸 식이니 말이다.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보살피는 것뿐이라고는 해도, 결국 왕실로서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머리를 밟고 올라섰으니 당황할 법도 하다.
만약 그것이 인간이었다면, 전쟁이든 뭐든 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으리라. 하지만 상대는 신. 인간의 힘으로는 대항할 수 없는 존재다. 사실 당장 탑와와 루벨라에게 그런 힘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신이란 그러한 불가침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왕실은 선택했다. 신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인간들 중에서는 최고가 되기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타협안인 셈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자들에게 추종자를 선별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나마 귀족층에 의해 견제되고 있던 왕실의 힘은 신이라는 배후를 등에 업으면서 완전히 날아오르는 형국이 되어 버릴 것이다. 타나토스든 바츠크렌이든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는 룩스로서도, 그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런 저런 생각에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룩스를 향해 형진은 빙긋 웃었다.
“탑와와 루벨라는 분명 여신으로서 그런 자리에 나서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고 했겠지?”
“그렇습니다. 자칫 허물이 들추어지면 좋지 않은 일이라고.”
“그렇다면 이런 방법을 써보는 건 어떨까.”
“어떤…”
“나는 그녀에게 새로운 아바타를 건네주기로 했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그래서 말인데.”
“…”
룩스는 씩 웃는 형진의 모습에 어쩐지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어김없이 적중하고 말았다.
“그녀가 사용하게 될 새로운 아바타의 모습, 네 여동생으로 하면 어떨까.”
“네? 그, 그게 무슨!”
룩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룩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저도 모르게…”
“괜찮아. 괜찮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니까.”
형진은 선선히 룩스의 사과를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황하고 놀랜 가슴이 바로 진정되는 건 아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룩스의 조심스러운 말에 형진은 어려울 것 없다는 듯이 답했다.
“첫째, 탑와와 루벨라는 여신으로서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이 탐탁지 않다고 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 추종자의 선별을 맡길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방법은 그녀이면서 그녀가 아닌 상태로 참석하면 되는 일이야.”
“아… 과연.”
그럴 듯한 얘기다. 무엇보다도 루이스가 이미 탑와와 루벨라의 추종자로 선택된 것은 이미 왕실은 물론이고 귀족들도 잘 알고 있는 얘기. 설마 여신이 루이스의 모습을 빌려 참석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테니 이것은 스스로를 감추고자 하는 여신에게 있어 꽤 그럴 듯한 제안이다.
“둘째. 너. 사실은 여동생을 다시 왕궁으로 돌려보내기 싫을 테지?”
“…”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애초에 조금 무리한 느낌으로 여신의 추종자가 되도록 손을 쓴 것 자체가 그런 이유에서니까.
왕녀라는 입장상, 아무리 여신의 추종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가끔은 얼굴을 내밀어야 할 경우가 생긴다. 이를테면 여신이 바츠크렌에 모습을 드러낼 경우 그녀를 시종하는 식으로.
하지만 여신이 루이스의 모습을 빌려 행동하게 된다면 어떨까. 이것은 앞으로 바츠크렌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 루이스가 신경 쓸 필요도 없어진다는 의미다. 루이스는 자신의 모습과 이름을 여신에게 빌려주는 댓가로 지금까지 짊어지고 있던 바츠크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던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달이 그 녀석이 네 여동생을 꽤 좋아하는 모양이야.”
“그, 그건…”
“도대체 아기다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녀석이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대상을 굳이 험한 세상에 내보일 생각은 없어. 그 관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
룩스는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은 경고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가만히 그런 룩스를 바라보고 있던 형진은 이내 피식 웃음을 지어 버렸다.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는 일이고. 아이를 괴롭히는 못된 어른으로 보이기는 싫거든.”
“감사합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완전히 어르고 달래기였지만 룩스로서는 그것에 대해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뭐라 해도 상대는 두 우주를 지배하는 주신. 그런 그에게 있어서 아직 자신은 쓰기 좋은 장기말에 불과할 뿐이다. 아직 완전히 성장한 어른이 아니니까 심하게 대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어디보자. 어디까지 했더라. 그래, 세 번째였군. 이건 간단한 얘기야. 마주하는 이가 여신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대는 좀 더 허점을 보일 수밖에 없겠지. 무엇보다도 네 여동생은 아직 어린 여자 아이. 우습게보고 덤벼드는 녀석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 아니겠나.”
“과연. 그렇군요.”
그럴듯한 미끼를 내밀어서 그것을 저들이 콱 물었다 해도 상대가 여신이어서야 그들로서도 본심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모습을 드러낸 것이 세상물정 모르는, 더구나 그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봐왔던 여자 아이라면 그만큼 방심하기도 쉬울 터.
“이해했나.”
“네. 이해했습니다.”
“좋아. 그럼 탑와와 루벨라에게 가서 전하도록.”
“주신의 뜻을 받듭니다.”
형진에게서 물러나온 룩스는 곧바로 탑와와 루벨라를 찾아 말을 전했다.
룩스의 말을 전해들은 탑와와 루벨라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자 입술을 깨물었다.
“하긴, 내 추종자를 다른 사람에게 뽑으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되겠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이었지만, 사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이라면 바로 루이스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 아이 또래라면 당연히 대화의 주제가 될 법한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내용이 루이스의 입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근에 들어서야 왕성에서 만난 환수의 아이들이라든가 달이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오는 정도. 이쯤 되면 아무리 무신경한 이라도 조금쯤은 마음에 걸릴 법한 일이다.
탑와와 루벨라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주신께서는, 나를 통해 옥석을 가리려고 하시는 건가요?”
질문을 들은 룩스는 바로 답했다.
“추종자를 뽑는 일에 있어서도 그 정도는 필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신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건 곧 추종자들이 바로 신의 얼굴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탑와와 루벨라는 이번 무도회가 단순히 가벼운 의미로 옥석을 가리는 것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 자리에서 바로 뽑아야 하나요? 저는 아직 그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데.”
여신이 느끼고 있는 부담감이 여실하게 질문이었으나 룩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여신께서 참고할 만한 정보는 이미 수집을 마치고 정리를 하고 있는 중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번 일을 진행하기에 앞서 왕실이나 귀족 가운데 추종자로 추천될만한 인물에 대한 조사와 검증은 이미 끝마쳐진 상태다.
룩스의 대답에 탑와와 루벨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과 마주하게 될 자들 역시 일종의 시범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모든 준비를 갖춰놓은 채, 그렇게 만들어진 무대 위에서 움직일 배우로 자신이 지목된 것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아 버린 것이다.
어째서 하필 자신인 건지.
어쩐지 처음 형진에게 불려갔을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하긴 세상에 마냥 좋기만 한 얘기가 어디 있겠나 싶으면서도, 왜 하필 자신이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탑와와 루벨라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다가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룩스는 말없이 그런 여신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조심스럽게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