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100)
예지를 보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반갑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난 잊지 않도록 금액을 머릿속에 새겼다.
29억3천만.
단위는 당연히 달러다.
엑스캅이 한국기업이긴 하지만, 본사인 타이포그룹은 미국기업. 따라서 금액은 달러로 지불한다.
원화로는 대략 3조2200억.
이 정도면 예상보다 높은 금액인데.
은성차가 정말로 본입찰에서 이 금액을 써낸다고? 엑스캅에 과연 그 정도 가치가 있을까?
“선배!”
들려온 외침에 난 정신을 차렸다. 홀로그램은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유리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으응. 아무 것도 아니야. 뭐 더 먹을래?”
“그거 알아요? 선배 얘기하다말고 가끔 멍한 표정 짓는 거. 저번에는 운전하다가 그래서 사고 날 뻔했었잖아요.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그게…… 가끔 뭔가 생각날 때가 있어.”
내 말에 유리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무슨 생각했는데요?”
“…….”
눈앞에 은성차의 입찰가가 보였다고 하면 안 되겠지?
난 아무렇게나 머릿속에 떠오른 대로 말했다.
“오늘따라 예뻐 보인다는 생각.”
반응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유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진짜 뜬금없이 뭐예요? 사람 부끄럽게.”
“미안.”
막상 말하고 나니, 나도 이 말을 왜 했나 싶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유리는 괜히 볼을 부풀렸다.
“예쁘다고 말해준 건 이번이 처음인 거 알아요?”
“그런가?”
평소 생각은 많이 했는데, 말한 적은 없었나 보다.
유리는 배시시 웃었다.
“히히, 선배한테 예쁘다는 말 들으니까 기분 좋네요. 고마워요.”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 * *
우리는 와인 한 병을 다 마시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둘 다 술을 마셨기 때문에 대리기사를 불렀다. 이번에는 세단을 타고 와서 다행이다. 저번에 i8 타고 와서 술 마셨을 때는 앉을 자리가 없어서 택시 태워 보냈다.
나중에 무인차가 출시되면, 대리기사를 부를 필요도 없겠지?
세상은 사람의 인식보다 훨씬 빠르게 변한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운전석에 앉은 사람들이 게임을 하거나 뉴스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 대리기사가 도착했다. 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먼저 유리를 집 앞으로 바래다주었다.
차는 단지 앞에 멈춰 섰고 우리는 같이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갈게요.”
“괜찮아?”
술에 취한 것 같아서 좀 걱정된다.
유리는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려보였다.
“그럼요. 단지 안은 안전해요.”
“조심해서 들어가.”
“예비입찰은 언제에요?”
“내일모레 3시였나?”
“잘 되길 응원할게요.”
난 피식 웃었다.
“아버지 회사는 어쩌고?”
“앗, 그러네요. 그래도 전 선배가 잘 됐으면 좋겠어요. 파이팅!”
“고마워.”
응원을 들으니 힘이 난다.
“다음에는 제가 밥 살게요. 핸드폰번호 바꾸지 마요. 바꾸게 되면 꼭 말해주고.”
“알았어.”
“약속해요.”
유리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난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 * *
난 돌아가는 길에 택규에게 전화했다.
“너 지금 어디야?”
[회사.]“거기서 뭐해?”
[열심히 게임 중.]“…….”
누가 보면, 야근하는 줄 알겠다.
“금방 갈게. 기다려.”
난 대리기사에게 말했다.
“테헤란로에 있는 쌍둥이 빌딩 아세요?”
“예. 알고 있습니다.”
“거기 OTK컴퍼니 빌딩으로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난 뒤로 등을 기대며 안경을 벗었다. 안 쓰던 안경을 쓰니 얼굴에 뭔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다.
가는 도중 유리에게 문자가 왔다. 집에 잘 들어갔다는 내용이다. 난 잘 자라는 답장을 보냈다.
20대에 S클래스를 타고, 이 시간에 OTK빌딩에 가는 게 신기한지, 대리기사는 곁눈질로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혹시…… 강진후 CEO님이신가요?”
거짓말하기도 뭐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아보니, 뭔가 신기한 느낌이다.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대리기사는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워했다.
“이거 놀랍네요. 기자회견 잘 봤습니다. 이렇게 젊은 분이 그런 엄청난 회사를 세우다니.”
나도 편하게 얘기했다.
“대리운전은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시작한 건 2년 정도 됐습니다. 아내랑 같이 편의점을 하는데, 장사가 잘 안 돼서요.”
묻지도 않았는데 얘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원래 중소기업을 다녔으나 명예퇴직 했고, 퇴직금으로 사업을 벌였으나 실패. 남은 돈에 대출까지 끌어 모아서 편의점을 차렸다.
월 500만 원은 벌 수 있다는 본사의 말만 듣고 차렸는데, 이게 웬걸?
처음 몇 달은 장사가 좀 되나 싶었는데, 근처에 다른 편의점들이 들어서자 매출은 금방 줄어들었다. 여기에 본사 수수료와 임대료는 매년 큰 폭으로 올랐다.
지금은 알바 한 명만 쓰고 부부가 교대로 운영하는 데도 월 순이익은 300만 원 수준. 이 돈 받고 운영하느니 차라리 부부가 다른 곳에서 가서 알바하는 게 나을 정도다.
그렇다고 장사를 접을 수는 없다. 계약기간 내에 폐점하면 본사에 위약금을 물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녁시간에 아내가 카운터를 보는 사이, 부업으로 대리운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버는 돈이 약 80만 원.
“힘드시겠네요.”
내 말에 대리기사는 허허 웃었다.
“뭘요. 다들 이렇게 삽니다.”
남 얘기 같지 않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 상황도 크게 나을 건 없었다. 어머니도 돈 버느라 이 일 저 일 안 해본 일이 없었으니.
수출이 늘고 지표가 회복되고 있다지만, 아직 서민들은 잘 체감하지 못한다. 특히 자영업자들이 느끼는 경기는 심각한 수준이다.
문제는 공급과잉이다. 고기집 앞에 고기집이 들어서고, 편의점 앞에 편의점이 들어서니, 서로 버텨낼 재간이 없다.
원인은 결국 기업이 고용을 하지 않기 때문.
취직이 안 되니, 자영업에 뛰어들고, 가게가 늘어나니 임대료는 오르고 경쟁은 치열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얘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했다.
“여기 세워주세요.”
요금은 이미 어플을 통해 결제되었다.
지갑에는 현금 30만 원 있었다. 난 그 돈을 다 꺼내서 팁으로 주었다.
“덕분에 무사히 잘 왔네요. 힘내세요.”
대리기사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 * *
난 38층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택규는 한걸음도 안 나갔는지, 아예 피자까지 시켜서 먹고 있었다.
CEO실에서 웬 트레이닝복 입은 백수가 게임을 하고 있으니, 배달 온 알바생이 황당해하지 않았을까?
“잘 다녀왔어?”
난 녀석에게 말했다.
“은성차 입찰가를 알아냈어.”
택규는 깜짝 놀라 하던 게임을 멈췄다.
“어떻게?”
입찰가는 철저한 극비사항이다.
혹시라도 정보가 새나가는 것을 우려해 입찰 직전에 정해서 써넣기도 한다. 그런데 난 그것을 지금 알아낸 것이다.
“예지가 보였어.”
택규는 눈을 껌벅거렸다.
“되게 오랜만이네.”
“그러게 말이다.”
“얼마야?”
“29억3천만 달러.”
“이 금액으로 인수한다는 거야?”
“그건 모르지.”
예지가 보여준 것은 은성차의 입찰가 뿐. 낙찰 여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게다가 이게 적당한 가격인지도 모르겠다.
“비싼 거 아니야?
“그럴 지도?”
타이포그룹은 3조 이상을 받고 싶다고 얘기했지만, 이건 자기들도 3조를 최대치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업체들 역시 3조를 마지노선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난 책상 위에 있는 엑스캅의 재무제표를 살펴보았다. 자기자본은 4130억, 작년 기준으로 매출은 8940억, 영업이익은 1890억.
“3조2천억이면, PER가 17인데.”
“주가수익비율?”
“맞아.”
한마디로 3조2천억을 벌기 위해서는 17년 동안 같은 영업이익을 내야한다는 뜻이다.
업종마다 PER가 천차만별이라 일률적으로 비교하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바이오나 제약의 경우 PER가 200배를 넘어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당장은 이익을 내지 못하더라도 향후 성장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3년 치 매출과 영업이익을 살펴보았지만, 눈에 띄는 성장세는 보이지 않았다.
이게 정말 3조2천억의 가치가 있을까?
“어떻게 할 거야?”
“만약 은성차가 과한 금액을 적어낸 거라면 우리가 신경 쓸 건 없겠지. 이게 괜찮은 가격이라면 우리가 가져와야 할 테고.”
결국 적정가치가 관건이다.
“일단 현주 누나랑 얘기를 해봐야겠는데. 누나 지금 어디 있어?”
택규는 창문을 가리켰다.
“보면 몰라?”
늦은 시간임에도 옆 건물 꼭대기 층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 * *
현주 누나는 지사장실이 아니라 아래층에 실사단과 함께 있었다.
지금 시간까지 일하는 건 현주 누나만이 아니었다. 회의실에는 엘리와 헨리를 포함해 20명이 넘는 실사단이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신음하고 있었다.
이중 절반은 아시아지사에서 파견 온 사람들이다.
기업매각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1년 이상 걸린다.
하지만 타이포그룹은 분식회계를 수습하기 위해 연말 전까지 현금이 필요하다. 때문에 어떻게든 크리스마스 이전에 매각협상을 끝마친다는 계획이었다.
매각과정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실사기간도 고작 열흘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제대로 실사를 끝마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싫으면 입찰에 참가하지 않는 거고. 그러나 그러기에는 매물이 너무 매력적이다.
덕분에 실사단만 죽어나가고 있다. 이건 골든게이트만이 아닌 다른 업체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사는 변호사, 회계사를 포함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회계, 법률, 비즈니스, 세무 등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고 분석한다.
숫자 하나만 달라져도 모든 게 바뀌기 때문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언론에는 누가 얼마에 인수했다는 식으로 짤막하게 나가지만, 그 뒤에는 이런 엄청난 노력들이 숨어있는 것이다.
밖에 있는 나를 발견한 엘리가 회의실에서 나왔다.
“이 시간에도 일하고 있었네요.”
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내일모레가 예비입찰이잖아요. 법무팀 소속 변호사들과 함께 법률적 문제를 검토 중이었어요.”
“별 문제는 없죠?”
“예. OTK컴퍼니와 골든게이트 모두 금산분리와 독과점방지, 어느 쪽에도 걸리지 않으니까요.”
돈이 있다고 무조건 기업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산업자본은 금융자본을 소유할 수 없고, 특정사업자가 시장을 독과점하는 형태의 인수합병은 승인되지 않는다.
얼마 전, SSK텔레콤의 GJ모닝 인수합병이 무산된 것도 바로 이 독과점방지에 걸렸기 때문이다.
“세부적인 문제는 좀 더 검토해야…….”
말을 하던 엘리는 갑자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거의 몸이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왜, 왜 그래요?”
내가 당황하며 묻자, 엘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와인 냄새 나네요. 누구랑 마셨어요?”
“…….”
이렇게 바로 알아챌 줄이야. 이라도 좀 닦고 올 걸 그랬나?
“가, 간만에 학교 애를 만나서요.”
“학교 사람이요? 누구요?”
“그게…….”
왠지 유리랑 마셨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엘리는 투정부리듯 말했다.
“히잉, 너무해요. 전 이렇게 일하고 있는데, 진후 혼자서만 마시고. 저도 와인 좋아하는데.”
“다음에 제가 살게요.”
내 말에 엘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이죠? 약속한 거예요.”
“물론이에요.”
오늘따라 약속을 많이 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뒤따라서 현주 누나와 헨리가 나왔다.
“왔어?”
“잠깐 할 얘기가 있어요.”
우리는 다 같이 지사장실로 이동했다.
역시나 퇴근을 못하고 있는 비서가 커피를 내왔다.
“예비입찰 금액은 얼마로 생각하세요?”
예비입찰이라고 금액을 함부로 적어서는 안 된다. 규정상 본입찰에서 예비입찰보다 낮은 가격을 적을 수 없다.
“25억 달러. 그 이하는 아마도 예비입찰에서 탈락할 거야.”
참여업체들은 대략 15곳.
예비입찰은 이들 중 지나치게 낮은 가격을 적어내는 업체들을 걸러내는데 의의가 있다. 예비입찰이 끝난 후, 일주일 뒤 시작되는 본입찰이야 말로 진짜 게임이다.
“엑스캅에 3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요?”
엘리는 깜짝 놀랐다.
“30억 달러요? 그건 너무 과하지 않아요?”
현주 누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 며칠에 걸쳐 분석한 실사자료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치안이 안정적인 편이야. 때문에 다른 선진국에 비해 경호와 보안에 대한 수요가 그리 높지 않아. 하지만 부자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고, 기업보안도 점점 중요해지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과 기업의 수요가 증가할 가능성이 높아. 그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 30억 달러를 내더라도 큰 무리는 아니겠지.”
“그렇군요.”
역시 은성차가 아무 생각 없이 그 금액을 쓰는 건 아니구나.
계열사로 편입해 얻을 수 있는 시너지를 생각한다면, 그 이상의 금액을 내더라도 인수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본입찰가는 제가 정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