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99)
유리는 몇 군데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한 곳에서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난 유리를 조수석에 태우고 청담동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이면도로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레스토랑이었다.
창가자리는 이미 만석이라, 우리는 안쪽으로 안내되었다.
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가정집 같은 분위기네.”
“메뉴판 보면 그런 말 안 나올 걸요.”
메뉴판을 펼쳐 보니 무슨 말인지 알겠다. 가격이 웬만한 호텔 레스토랑 이상이다.
난 조용히 메뉴판을 덮었다.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
“진짜 그래도 돼요?”
“물론.”
유리는 애피타이저와 함께 파스타와 피자를 시켰다.
“와인 어때요?”
“좋지.”
유리는 따로 와인을 주문했다.
요리가 준비되는 동안 와인이 먼저 나왔다. 웨이터는 코르크마개를 따고 잔에 와인을 채워주었다.
우리는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난 학교 분위기부터 물었다.
“완전 난리 났죠. 경영학과만이 아니라, 인문대, 공대 할 것 없이 학교 전체가 들썩거렸어요.”
“그 정도야?”
“그럼요. 모이기만 하면 선배 얘기하느라 수업이 힘들 정도였어요. 한동안 교수님들도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었고.”
한국대에는 재벌가 자식들이 꽤 많다. 당장 고준형만 해도 GH그룹 사람이고. 직계와 방계를 다 따지면 적어도 수십 명은 넘을 것이다.
아마 그중에는 정체를 숨기고 있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래도 OTK컴퍼니 CEO라는 건 확실히 임팩트가 컸던 모양이다. 당시 상황이 상황이기도 했고.
“민영이와 경일이는 뭐래?”
“깜짝 놀랐죠. 말 안 해줬다고 서운해 하기도 하고, 검찰에 잡혀간 후에는 걱정도 많이 하구요.”
학기 초부터 연애하고 동아리 활동하느라 정작 과에는 친한 애들이 많지 않았다.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은 민영이와 경일이가 전부다.
미안해서 언제 술이라도 한 번 사야겠다.
“그러고 보니 걔들도 이제 졸업이네.”
일찌감치 군대를 다녀온 나와는 달리 둘 다 아직 미필이다. 현역으로 가기는 싫은지, 방위산업체 대체복무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유리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한테도 미리 말 해주지 않았으면, 정말 서운했을 거예요.”
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미안해.”
“그동안 왜 숨긴 거예요?”
“말했잖아. 처음에는 그냥 친구가 만든 페이퍼컴퍼니에 불과했어.”
어쩌다보니 같이 핸드폰 사러 간 대리점에서 L6 폭발을 예지했고, 그때부터 투자대박을 터트렸지.
“선아는 어떻게 지내?”
“잘 지내요. 가끔 저한테 선배랑 연락 안 하냐고 묻던데요.”
“그래?”
유리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왜요? 신경 쓰여요?”
“아니.”
딱히 감정이 남아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 만나서 얘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 혜미 선배가 썸 타던 사이였다고 주장하던데. 사실이에요?”
“……걔 허언증 있니?”
조별과제 때문에 한 판 한 뒤로 인사도 안 하고 지냈는데, 뭔 썸이야?
이러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이제 복학은 안 하실 거예요?”
“당분간은 힘들겠지. 해야 할 일도 많고.”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건 많이 아쉽다. 졸업장은 둘째 치고 경영학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었는데.
이론과 실전이 다르다지만, 이론은 실전의 밑바탕이다. 그래서 IB나 PEF에 취직한 사람들도 더 배우기 위해 MBA나 CFO 과정을 밟는 거고.
그나마 1학기 때야 한가한 편이라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나중에 상황이 좀 정리되고,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유리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결국 선배랑은 한 학기 밖에 같이 못 다녔네요.”
“그러게.”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다니는 건데. 그래도 한 학기 동안 나름 재밌었다.
치킨집 아들은 뭐하고 사나 몰라?
“내년이면 너도 3학년이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빨리 졸업해서 OTK컴퍼니에 취직하려구요.”
“풉!”
순간, 와인 마시다가 뿜을 뻔했다.
“진심이야?”
“요즘 금융권에서 OTK컴퍼니가 제일 잘 나가잖아요. 연말 보너스도 엄청 줬다던데.”
“어떻게 알았어?”
“학교 사람들 전체가 알고 있던데요.”
소문의 진원지가 정 대리님이라는데 내 전 재산을 걸어도 좋을 것 같다.
“졸업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잖아.”
“학점 잘 따서 조기졸업하면 되죠. 그리고 인턴십도 있잖아요. 선배랑 같이 일하면 재밌을 것 같아요.”
유리는 짐짓 자신 있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디 가서 저만한 인재 찾기도 쉽지 않을 걸요.”
난 피식 웃었다.
“그건 일을 시켜봐야 알지.”
현주 누나 밑에서 몇 개월 구르다 보면 ‘아! 내가 여기 괜히 들어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겠지. 그걸 버텨내면 훌륭한 금융인으로 성장할 테고.
“저도 사실 선배한테 할 얘기 있는데.”
“뭔데?”
“마음의 준비해요. 들으면 놀랄 테니까.”
유리는 바로 말하는 대신 뜸을 들였다.
이러니 왠지 궁금해진다.
“혹시 남자친구 생겼어?”
그러자 유리는 화들짝 놀랐다.
“그런 거 아니에요! 선배는 진짜…….”
유리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얼굴이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설마 이거 고백 분위기인가?
……라고 잠시 생각해보았다.
유리는 결심한 듯 잔에 남아있는 와인을 한 번에 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성함이 병자 두자예요. 신병두.”
“응? 그래서?”
갑자기 아버지 이름은 왜 말해?
내가 모르겠다는 듯 묻자, 유리는 답답해하며 말했다.
“RCK브로스 아세요?”
“당연히 알지. 류철균 회장이 운영하는 사모펀드잖아.”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지만, 금융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제품과 브랜드가 잘 알려진 대기업들과는 달리 금융회사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은행과 증권사야 곳곳에 지점이 있고, 일반 고객들을 상대하는 만큼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지만, 헤지펀드나 사모펀드는 찾아보지 않는 이상은 잘 모른다.
그렇다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뉴스에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예외가 있다면 론스타다.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는 외환은행 먹튀 건으로 뉴스에 여러 차례 등장해 전 국민에게 이름을 알렸다.
“거기 부회장으로 계세요.”
“부회장이면…… 헉!”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는데, 이제야 생각났다.
난 깜짝 놀랐다.
“신병두 부회장이 아버지라고?”
“맞아요.”
“자, 잠깐. 저번에 펀드하신다고 하지 않았어?”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모펀드.”
“…….”
아, 그 펀드가 이 펀드였어?
펀드하신다기에 증권사에서 잘나가는 펀드매니저 정도로 생각했지, 설마 RCK브로스 부회장일 줄은 몰랐다.
현재 RCK브로스가 운용하는 자금은 약 40조 원.
물론 자기자본이 아닌 대부분 출자자들 돈이지만, 이 정도면 재계 15위 안에 가뿐하게 들어가는 수준이다. 현금동원력으로 따지면 그 이상일 테고.
RCK브로스는 사모펀드인 만큼 일반 재벌그룹과는 여러 차이가 있다.
재벌그룹의 가장 큰 특징은 핏줄을 통한 족벌경영이다. 인수한 회사를 계열사로 편입해 직접 경영에 나서는 것이다. 반면 사모펀드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며 각 기업의 독립성을 보장한다.
전자는 하나로 뭉친 그룹이 되는 반면, 후자는 사실상 투자자만 같은 개별 기업의 형태를 띤다.
OTK컴퍼니와 K컴퍼니 역시 사모펀드와 흡사한 형태로 운영한다. 단 우리는 펀드레이징 없이 자기자본만으로 투자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만약 내가 재벌그룹을 모델로 했으면, 사명 앞에 OTK를 붙이고 내 핏줄이나 인맥을 경영자로 내려 보냈을 것이다.
난 혀를 내둘렀다.
“너 완전 금수저였구나.”
아니, 이 정도면 다이아몬드수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리가 부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청담동 수십억짜리 아파트에 혼자 살고, 용돈으로 서성전자 주식을 50주씩 살 수 있을 정도니까.
그래서 적당히 자산 수백억 정도되는 부잣집 딸이라고 생각했다. 강남 쪽에 그 정도 부자들은 널려 있기도 하고.
그런데 RCK브로스 부회장이라니!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 딱히 힘들게 산 건 아니지만,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RCK브로스가 탄생한 건 10년 전쯤이다. 재벌그룹 수준으로 성장한 건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고.
어쨌거나 마스터치킨 아들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 레벨이다. 만약 채명호가 유리의 정체를 알았다면, 들이대기는커녕 알아서 기었을 것이다.
RCK브로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마스터치킨 쯤이야 씨를 말려버릴 수도 있다.
잠깐. 그래서 채명호랑 돈 쌓기 게임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가? 만약 내가 못 쌓으면, 아빠 부르면 되니까?
유리는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집안이 무슨 상관이에요? 아빠는 아빠고, 저는 전데.”
“그렇긴 하지.”
세상에는 부모 잘 만나서 설쳐대는 놈들이 넘쳐나는데, 얘는 잘도 숨기고 있었구나.
“학교에서는 누가 알고 있어?”
“김명준 교수님만요.”
“그래?”
학과장님은 알고 계셨구나.
티를 전혀 내지 않아 알고 있는 줄도 몰랐다. 학생들 배경이야 어떻든 특혜를 주지 않는 게 그 교수님의 성격이지.
“친구들도 몰라?”
“지혜도 몰라요. 선배한테만 특별히 말해주는 거예요.”
“어째서?”
“선배도 저한테 솔직하게 말해줬으니까요. 딱 하루 먼저긴 했지만. 사실 그날 저도 말해주려고 했는데, 선배가 먼저 가버렸잖아요.”
“…….”
내가 그랬나?
검찰 들어갈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서 할 말만 하고 간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유리가 뭔가 말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류철균 회장이 펀드레이징과 딜소싱을 위해 대외활동이 잦은 반면, 신병두 부회장은 외부에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기업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수완을 발휘했다. 때로는 과한 금액으로 인수했다고 생각하는 매물도 알고 보면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만약 신병두 부회장이 뒤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RCK브로스가 이 정도로 성장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단한 아버지를 뒀네. RCK브로스면 한국 금융계의 신화나 다름없는데.”
내 말을 들은 유리는 소리내서 웃었다.
“아빠랑 철균 아저씨도 똑같은 말씀하시던데요. 선배가 한국금융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그거야 뭐…….”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든다.
“두 분 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 토종 사모펀드를 만드는 게 꿈이었데요.”
“꿈을 이루셨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RCK브로스를 세계적인 사모펀드로 만드는 게 꿈이래요.”
비록 아시아시장 한정이긴 하지만, 그 꿈도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선배는 꿈이 뭐예요?”
“글쎄.”
돈을 더 벌고, 은성차에 복수하면 모든 게 끝나는 걸까?
시작은 별 거 없었다. 그냥 뭔가가 보였고, 그걸 이용해 돈을 벌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돈이 일정 이상 모이면 그 자체로 힘을 갖는다. 돈이 많은 사람은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때문에 정부에서는 법과 세금 등으로 기업과 재벌을 규제하는 것이다.
동네 구멍가게는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아도, 대형마트는 출점과 영업시간을 규제하는 것처럼.
카로스 CEO 데릴은 자신이 하는 일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더 맛있는 피자를 사람들에게 먹이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통해 기존 시스템을 개선하려 하고, 또 누군가는 사람들이 언제든 좋아하는 포르노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만들고 싶어 한다.
산업의 성장을 위해 자본을 대는 것이 금융의 역할이다. 만약 내가 제때 돈을 투자하지 않았다면, 그들 중 일부는 사업을 접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걸 계속 해나가는 게 내 역할이 아닐까?
유리는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OTK컴퍼니도 엑스캅 입찰에 참여한다면서요?”
“어떻게…… 아! 아버지한테 들었겠구나.”
아직 언론기사는 나가지 않았지만, 참여업체들에게는 다 알려진 상황.
“인수할 수 있겠어요?”
난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워낙 쟁쟁한 후보들이 많아서.”
그 순간,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