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172)
조금 있으면 어머니 생신이다.
난 택규와 함께 갤러리백화점으로 향했다.
나도 그렇고 택규도 그렇고 쇼핑에는 별 관심이 없다. 전자제품이나 게임이라면 모를까.
부자들이 흥청망청 돈을 쓰는 것보다 더 나쁜 건, 바로 부자들이 돈을 안 쓰는 것이다.
돈 있는 사람들이 열심히 소비하고, 열심히 세금도 내야 경제가 잘 돌아가지. 이런 점을 감안하면 우리가 버는 돈에 비해 지나치게 소비를 안 하는 건 사실이다.(대신 투자는 많이 하지만)
평일 낮인데도 백화점은 사람들로 붐볐다. 유명 명품매장 앞에는 입장을 위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미리 예약해놓은 제품을 받으러 가는 거라 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매장 안으로 들어온 택규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렇게 한산한데, 대체 줄은 왜 세우는 거야?”
“최고의 서비스를 위해 직원과 고객의 1대1 응대가 원칙이래.”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문턱 높은 매장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런 것도 없진 않겠지.”
난 가방을 받아들고 결제했다.
가격을 들은 택규는 깜짝 놀랐다.
“뭐가 이렇게 비싸? 가방 하나가 천만 원이 넘는다는 게 말이 돼?”
“TV 하나가 5천만 원이 넘는 건 괜찮고?”
“TV는 값이 비쌀수록 성능이 좋아지잖아.”
“가방도 그래.”
“성능이 좋아져?”
“주위의 시선이 좋아지겠지.”
가격과 가치의 괴리가 클수록 비싸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 이는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것들의 특징 중 하나다.
아무리 돈을 많이 보내드려도 어머니 성격상 이런 명품을 직접 살 리 없다.
그러니 아들이 선물해드려야지. 가격 아시면 충격 좀 받으시겠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좋아하실 거다.
택규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온 김에 누나 줄 거나 좀 사갈까? 가방이나 구두 같은 거.”
“좋은 생각이야.”
나도 엘리 선물 하나 사갈까?
“그나저나 이제쯤 올 때가 됐는데.”
“응? 누가 오기로 했어?”
“지금쯤이면 지체 높으신 분이 널 만나러 오지 않을까?”
“설마…….”
그런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여성이 매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큰 키에 늘씬한 미녀였다. H라인 스커트에 실크 블라우스, 겉에는 얇은 베이지색 코트를 걸쳤다.
걸을 때마다 하이힐이 또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가 택규가 말한 ‘지체 높으신 분’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줄을 서지 않고 매장 안으로 바로 들어 온 데다가 직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비켜서서는 일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뭘 이렇게 바짝 긴장해?
내 앞에서 선 그녀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강진후 대표님.”
“누구신가요?”
그녀는 자기소개를 했다.
“갤러리백화점 황주연 전무입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그래서 황주연이 대체 누구야?
젊은 나이에 전무가 될 정도면 대단히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평소 대표님에 대한 얘기는 아버지께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요?”
“아! 아버지 성함이 황현중으로, 이 백화점 사장으로 계세요.”
“그렇군요.”
뭐, 누구 말마따나 돈 많은 부모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각자 하고 싶은 일이 있을 텐데도 다들 대를 이어 가업을 물려받다니. 우리나라 재벌들이 이렇게 장인정신이 넘쳐난다.
화장을 좀 짙게 하긴 했지만, 꽤나 미인이다.
젊다고는 해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어쩌면 30대 초반일 수도 있고.
황주연 전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일전에 박상엽 대표님을 뵌 적이 있어요.”
“그래요?”
OTK컴퍼니 자회사들은 주로 외국에서 사업을 벌이기 때문에 국내 대기업과의 연관성은 별로 없다.
하지만 K컴퍼니 자회사들은 얘기가 다르다.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시작한 기업들은 덩치가 커지며 대기업들과의 협업이 많아졌다.
대부분은 자회사 경영진들의 알아서 처리하지만, 가끔은 상엽 선배가 직접 움직였다. 그래서인지 재계 쪽과 이런저런 친분이 쌓인 모양이다.
“전부터 강진후 대표님을 꼭 뵙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친구 분과 함께 쇼핑 중이셨나 봐요.”
“예. 좀 있으면 어머니 생신이라서요.”
황주연 전무는 웃으며 말했다.
“호호, 어째서 여자가방을 사시나 했더니 어머니 선물이셨군요.”
“예. 그리고 온 김에 애인 선물도 사려구요.”
내 말에 그녀는 살짝 당황했다.
“아, 애인이 있으셨군요.”
줄을 서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저 사람이 강진후야?”
“강진후 맞네. 전에 TV에서 봤어.”
“진짜? 와, 대박이다.”
“저 나이에 한국 최고의 부자라니.”
“그런데 옆에 있는 츄리닝 입은 남자는 누구야?”
계속 쇼핑하기는 글렀구나.
황주연 전무는 주위 시선쯤이야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나에게 계속 말을 건넸다.
“마침 점심때인데,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하시는 건 어떠세요? 개인적으로 대표님께 듣고 싶은 얘기도 많구요.”
이게 업무 목적인지 다른 목적인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난 쇼핑백을 챙겨들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요.”
황주연 전무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러시군요. 여기 제 명함이에요. 다음에 오실 일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VIP라운지에서 쇼핑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둘게요.”
나도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럼 전 이만.”
“조심히 들어가세요.”
우리는 매장을 나와 차에 올라탔다.
택규는 운전하며 말했다.
“저 여자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은데.”
“일 때문이겠지.”
“아니야. 수년간 미연시로 단련된 내 눈에는 분명 호감을 알리는 상태창이 보였어.”
“뭔 헛소리야?”
그런데 차가 백화점 주차장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문자가 왔다.
[오늘 저희 백화점을 이용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기회가 되면 꼭 식사 대접해 드리고 싶으니, 언제든 편하신 시간에 연락주세요. -황주연]택규는 신나서 말했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
난 조용히 번호를 차단시켰다.
* * *
우리나라에 재벌이 탄생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을 하면서부터다.
1세대 재벌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2세대가 되자 배 이상 늘어났고, 3세대와 4세대가 되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사람은 많은데 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그들에게 한 자리씩 챙겨주려면, 계열사를 문어발처럼 늘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기업들이 음식점이나 빵집 등 온갖 분야로 사업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미국으로 따지자면 엔플 계열사가 핫도그와 피자까지 파는 식이다.
고준형은 그 많고 많은 재벌 4세 중 한 명.
때문에 결혼식은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 그저 짤막한 기사가 몇 개 나왔을 뿐이다. 그래도 결혼식은 꽤나 화려하게 열렸다.
전 국토교통부 장관 등을 포함해 정재계 인사들도 여럿 참석했고, 경영학과 김명준 학과장님 등 교수님들이 참석하셨다.유리를 포함해 친한 학과 사람들도 많이 간 모양이다.
난 전에 말한 대로 축의금만 보냈다.
결국 선아는 꿈을 이룬 건가?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난 엘리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정말. 또 멍하니 있었던 거예요?”
“미안해요.”
예지를 볼 때마다 멍해지다 보니, 이제는 가끔 멍해지는 것을 버릇 정도로 생각한다.
엘리는 삐진 듯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듣고 있어요? 저 승진했다구요.”
“그럼요. 잘 듣고 있어요.”
보통 40대쯤 되어서야 팀장이 되는 걸로 볼 때 엘리 나이에 팀장이면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다.
이렇게 승진이 빠른 데에는 한국지사에 인력이 부족한 이유도 있다.
법무1팀장은 아시아지사에서 파견된 임시직. 이제 그가 돌아가 자리가 공석이 되자 엘리가 승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엘리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겠지.
지사장과의 친분 때문이 아니냐고 뒷말할지 모르지만,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현주 누나 성격상 택도 없는 일이다.
엘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연봉도 좀 올랐어요. 기념으로 오늘 밥은 제가 살게요.”
난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승진에 연봉도 인상되었는데, 겨우 밥 한 끼로 때우려구요?”
내 말에 엘리는 눈을 흘겼다.
“부르주아 자본가가 프롤레타리아 봉급생활자에게 뭘 바라는 거예요?”
말은 그렇게 해도 엘리의 연봉은 30만 달러를 가뿐히 넘는다. 각종 상여금 포함하면 50만 달러는 넘을 테고.
“모여서 축하파티라도 하자는 거죠.”
“앗, 좋은 생각이에요.”
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계절은 완연한 여름이다.
밖에는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조금만 바깥활동을 하면 땀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다.
더위에 약한 건 나나 택규나 마찬가지. 때문에 우리는 요즘 매일 같이 에어콘 밑에 늘어져 지냈다.
반면 엘리는 하루가 지날수록 예뻐지는 듯했다. 다리를 꼰 채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화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이 자꾸만 이쪽을 힐끔거리는 걸 보면, 내 눈에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여름휴가는 어떻게 할 거예요?”
“휴가요?”
“여름하면 휴가잖아요. 휴가하면 여름이고.”
“골든게이트는 요즘도 바쁘지 않아요?”
한국의 금융규제는 세계적으로도 강력한 편에 속한다. 때문에 법무팀은 새로운 투자상품 출시에 앞서 한국의 법률과 규제를 검토하느라 늘 바빴다.
엘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휴가는 가야죠. 뭐 때문에 회사 다니는데.”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너무 맞는 말이라 모든 직장인들이 공감할 듯하다.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엘리는 눈을 반짝 빛냈다.
“몰디브 어때요? 예전부터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몰디브요?”
“가본 건 아니죠?”
“이름만 들어봤어요.”
인도양에 있는 몰디브는 천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로 각 섬이 고급리조트로 개발되어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는지라, 휴양지와 신혼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난 별 생각 없이 말했다.
“다 같이 가면 재밌겠네요.”
“다 같이요?”
말을 하고서도 내가 뭔 소리를 했나 싶다. 굳이 여름휴가까지 다 같이 갈 필요는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엘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어머님도 모시고 가는 건 어떨까요? 해외여행 많이 못해봤다고 하셨잖아요. 저번에 샌프란시스코 구경시켜드리니 엄청 좋아하셨어요.”
난 슬쩍 물어보았다.
“엘리가 불편하진 않겠어요?”
“그럼요. 저번에도 얼마나 재밌게 돌아다녔는데요.”
어차피 휴양지면 리조트에서 먹고 자다가 바다에 나가는 게 전부긴 한데…… 정말 안 불편하려나?
“현주 누나가 시간이 될까요?”
엘리는 강한 의욕을 보였다.
“제시카는 제가 설득해볼게요. 지사장이 휴가를 가야 다른 직원들도 편하게 휴가를 떠나죠.”
이번에도 맞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솔선수범해서 휴가를 떠나야겠구나. 그동안 너무 일만했으니 이번 기회에 놀러가서 푹 쉬다 오는 것도 괜찮겠지.
몰디브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푸른 바다가 눈앞에서 넘실거리는 듯했다.
기대가 되긴 한다.
“비키니 사러 가야겠는데요.”
“풉.”
순간,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엘리는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왜 그래요? 바다 가는데 비키니 입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 그렇죠.”
엘리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설마 이상한 생각하는 건 아니죠?”
난 슬쩍 그 눈을 피했다.
“그럴 리가요.”
“일어나요.”
“어디 가게요?”
“말 나온 김에 비키니 사러 가요.”
“아, 그럴까요?”
이번 휴가는 꼭 가야겠구나.
* * *
퇴근 후.
난 택규와 함께 룸으로 된 이자카야로 향했다. 안주와 술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헨리가 도착했다.
이렇게 모인 건 헨리가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했기 때문.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따지듯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요?”
“도와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아무 얘기가 없는 겁니까?”
택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뭘 도와줘요?”
그러자 헨리는 당황했다.
“제시카와 잘 되게 도와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와 택규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우리가 그랬었나?”
헨리는 발끈했다.
“분명히 그랬습니다! 제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
그럼 그랬나보지.
택규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보통 서양인들은 자기 연애는 자기가 알아서 잘하지 않나?”
헨리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런 게 바로 인종적 편견이라는 겁니다. 어째서 백인들은 쿨하고 프리하게 연애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어리바리하고 멍청하게 구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누가 들으면 큰 자랑인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