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209)
CL그룹 양준모 회장의 손녀 양하나.
그녀의 아버지 양호영은 CL화학의 사장이고, 어머니 홍은주는 유명 여배우였다. 재벌 2세와 당대 최고 여배우의 결혼식은 당시에도 꽤 큰 화제였다.
양하나는 어머니의 끼와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았고, 여기에 비용을 아끼지 않은 관리가 더해져 웬만한 연예인보다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CL그룹 홍보 CF에 나왔을 때 큰 이슈가 됐고, 연예기획사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그녀가 참석한 파티나 행사에 참가한 모습을 찍은 사진이 기사화 될 정도였다.
역시나 그녀가 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만약 아버지와 함께 오지 않았다면, 진작 남자들이 달려와 말을 걸었을 것이다.
파티장의 분위기를 즐기는 양하나와는 달리 양호영은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강진후는 아직 안 온 건가?”
서성그룹이 OTK컴퍼니와 손을 잡았듯 CL그룹은 전장사업과 배터리분야에서 은성차와 손잡고 있었다.
규모나 매출 면에서 CL전자는 서성전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배터리 생산에 있어서 만큼은 CL화학이 서성SB를 제치고 국내 1위 자리를 지켰다.
현재 배터리 업계의 가장 큰 이슈는 김호민 교수가 개발해낸 차세대 배터리다.
만약 상용화에 성공한다면, 그 수혜는 당연히 합작사인 TS컴퍼니와 서성SB가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CL화학은 자연히 뒤처지게 될 것이다.
전장분야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배터리분야 만큼은 OTK컴퍼니의 협력을 얻어내야 했다.
때문에 이번 자리는 인연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양하나는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얘기해서 자리 한 번 만들어 볼게요.”
그룹 일을 떠나서 그녀 개인적으로도 강진후에게 관심이 있었다.
이제까지 재계의 수많은 젊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구애했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OTK컴퍼니 CEO라면 얘기가 다르다.
OTK컴퍼니는 비상장기업이고 지분 80퍼센트를 강진후가 가지고 있다. 현재 기업가치를 생각하면, 개인자산만으로 100조가 넘는다. 이 정도면 한국부자 순위 1위는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강진후라고 별 거 있겠어? 그래봐야 남자일 뿐이지.’
재계 4위라는 집안 배경에 타고난 미모까지. 양하나는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주위사람들의 시선이 분산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와 비슷한 또래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치마가 짧은 캐주얼한 드레스를 입은 귀여운 얼굴의 미녀다. 특이한 것은 머리카락이 금발이라는 것이다.
재계는 보수적이라 저렇게 눈에 띌 정도의 금발로 염색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만약 전에 본적이 있다면 머리색 때문에라도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누가 파트너로 데려온 건가?’
어쨌거나 그녀 외에 시선을 끄는 여자가 있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드디어 강진후가 파티장 안으로 들어왔다. 양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방송에서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굴은 괜찮게 생겼네.’
놀랍게도 그는 갈색 머리카락의 백인여성과 함께였다. 얼굴이나 비율로 봐서는 모델인 듯했다. 단지 얼굴이 예쁜 것을 넘어서 특유의 매혹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대체 저 여자는 어디서 나온 거야?’
강진후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단순히 파트너로 동행한 걸까, 아니면 애인일까? 애인이라면 얼마나 깊은 관계일까?
강진후는 서성그룹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임진용 회장과 임수미 사장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기회를 보고 있던 양하나는 강진후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강진후 대표님. 전 CL그룹 양준모 회장님의 손녀 양하나라고 해요.”
강진후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부터 꼭 한 번 뵙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괜찮으시다면…….”
그런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오랜만이에요.”
옆에는 어느새 아까 본 금발 여성이 서있었다. 말하는 걸 보니,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양하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뭐 이렇게 여자가 많아? 바람둥이인가?’
* * *
한옥호텔답게 홀은 전통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 같은 모습이다. 거대한 샹들리에 대신 벽과 천장에 박힌 은은한 조명이 주변을 밝혔다.
엘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제일 먼저 임진용 회장과 임수미 사장이 다가왔다.
“두 분이 함께 계신 모습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네요.”
엘리와 함께 실리콘밸리에 갔을 때 임진용 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카로스와 서성전자 지분을 맞교환했었지.
난 임수미 사장에게 말했다.
“호텔개관 축하드립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임수미 사장은 엘리와 인사하며 말했다.
“듣던 대로 대단한 미인이시네요. 강진후 대표님이 반할 만하시네요.”
엘리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현주 누나가 현대판 귀족파티라고 말한 건 농담이 아니다. 재계는 회사규모에 따라 계급이 나눠져 있다.
5대 그룹이 공작가라면, 그 밑의 10개 기업은 후작, 또 그 밑의 20개 기업은 백작, 재계 말석은 남작쯤 되려나?
한국 산업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이 자리에 거의 다 모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처음 보는 얼굴도 있고, TV에서 몇 차례 본 얼굴도 있다. 몇몇은 로날드가 주최한 간담회에서 만나 인사한 적이 있다.
“외국인도 많네요.”
임수미 사장이 말했다.
“명품브랜드 관계자들이에요.”
호텔사업은 영업이익률이 별로 높지 않았다. 때문에 보통 힐튼, 하얏트, 매리어트처럼 대규모로 전 세계에서 사업을 벌이거나, 아니면 대기업 계열사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다.
회사명과는 달리 실론호텔의 주력사업은 호텔이 아닌 면세점이고, 영업이익도 대부분 면세점에서 발생한다.
내가 좀 긴장한 것처럼 보였는지, 임진용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전혀 긴장하실 것 전혀 없습니다. 아쉬운 소리해야 하는 건 저쪽일 테니까요.”
맞는 말이다. 내가 대기업 회장님들께 아쉬운 소리할 게 뭐가 있겠나?
“이번 기회에 얼굴 익혀둔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예.”
“다른 분들과 인사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파티를 주최한 호스트인 만큼 손님들을 챙겨야하는 것은 의무다. 임진용 회장과 임수미 사장은 홀 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CL그룹 손녀와 인사하는데, 아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난 깜짝 놀랐다.
“여긴 어쩐 일이야?”
“오랜만이에요.”
어깨가 완전히 드러나는 짧은 오프숄더 드레스, 무릎까지 오는 치맛단 아래로는 늘씬한 다리가 뻗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건 밝은색 금발. 하지만 외국인은 아니다.
“제가 못 올 데라도 왔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학교 후배를 이런 자리에서 보니 신기해서 그러지.
유리는 배시시 웃었다.
“아빠랑 같이 왔어요.”
RCK브로스 부회장이면 이런 자리에 초대 받기에 차고도 넘치지.
“류철균 회장님은?”
“아저씨는 지금 중국에 가셨어요.”
“그렇구나.”
이따가 신병두 부회장님께 인사 드려야겠다.
“이런 파티 자주 와?”
내 물음에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처음이에요. 선배 온다고 소문이 쫙 퍼져서 궁금해서 와봤어요. 얼굴본지 오래 되기도 했고.”
생각해보면 정말 꽤 됐구나. 그 사이 엄청난 일들이 있었지.
“잘 왔어.
유리는 엘리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엘리 언니. 오늘 너무 예쁘세요.”
“고마워요. 제 눈에는 유리가 훨씬 더 예쁜데요. 여기 있는 사람 중 가장 빛나 보여요.”
“헤헤, 감사합니다.”
난 유리에게 물었다.
“방학했지?”
“그럼요.”
“학점은 잘 받았어?”
그러자 유리는 눈을 흘겼다.
“선배 방금 우리 아빠 같았어요. 이런 기분 좋은 자리에서 꼭 그런 안 좋은 얘기를 해야겠어요?”
“……미안.”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망했나보구나. 내 성적표 보여주며 위로해주고 싶다.
“선배랑 인사하고 싶은 사람들 많을 테니, 좀 있다가 다시 올게요.”
“응.”
유리가 가고 나자 엘리가 나에게 물었다.
“유리 정말 예쁘네요. 그렇죠?”
“예. 뭐.”
난 괜히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현주 누나는 언제 오지?”
그러자 엘리가 말했다.
“아! 저기 왔네요.”
난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턱시도를 차려입은 헨리는 마치 스크린에서 걸어 나온 할리우드 배우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굉장한 미녀가 함께 있었다.
순간, 현주 누나가 아닌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항상 끼고 있던 안경을 벗었고, 늘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는 풀어서 한쪽으로 늘어뜨렸다. 허리를 꽉 조이고, 등이 깊게 파인 짙은 청색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킬힐을 신었다.
난 깜짝 놀랐다.
저 미녀가 현주 누나라고?
이런 자리가 익숙한 듯 표정이나 걸음걸이가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헨리가 훨씬 긴장한 모습이다.
“누나가 저렇게 예뻤어요?”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엘리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홍콩 파티에서 인기폭발이었다니까요.”
말만 들었을 때는 과장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현주 누나 모습을 보니 사실이라는 걸 알겠다. 게다가 그때는 지금보다 더 젊었을 테니.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선남선녀가 따로 없다.
“이렇게 보니 굉장히 잘 어울리는데요.”
어째서인지 더더욱 뿌듯한 표정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엘리는 손을 흔들었고, 둘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난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너무 예뻐서 누나인지 못 알아볼 뻔했어요. 택규가 봤으면 깜짝 놀랐겠는데요.”
현주 누나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말이라도 고마워. 그보다 간만에 렌즈 꼈더니 좀 불편하네.”
엘리는 방긋방긋 웃으며 두 사람에게 샴페인잔을 건네주었다.
“자, 다 같이 한 잔 해요.”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잠시 후, 상엽 선배도 도착했다. 옆에는 키가 크고 약간 마른 체형의 미녀와 함께였다.
전에 열애설 났던 여배우가 아니라(본인 말로는 썸만 타다가 끝났다고 한다) 얼마 전 새로 만나기 시작한 패션모델이다.
일만큼이나 연애사업도 열심이구나.
K컴퍼니는 국내 대기업들과 접촉이 많은 만큼 상엽 선배는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상엽 선배는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저기 있는 애들 보이지?”
고개를 돌려보니 한쪽에 젊은 남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쟤들 재벌 3세, 4세들인데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거야. 얼굴 봐봐. 표정이 썩었잖아.”
“왜요?”
“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인데, 갑자기 니가 나타나 관심을 다 빼앗아갔으니까. 그렇다고 OTK컴퍼니 CEO를 상대로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상엽 선배는 이번에 다른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젊은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저 여자들은 왜 저렇게 꾸미고 왔겠어? 만약 혼자 왔으면, 좋다고 달려드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을걸.”
“에이, 설마요.”
“생각해봐. 어느 그룹이든 너와 결혼만 하면 단번에 재계 1위를 노릴 수 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있겠어? 재벌들이 사랑만으로 결혼했으면, 범서성가니 범은성가니 하는 게 만들어졌을 것 같아?”
“……그렇긴 하네요.”
별 관심은 없다만.
사람들은 먼저 상엽 선배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박상엽 대표님.”
“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 전무님.”
그러면 자연스럽게 상엽 선배가 나에게 소개시켜주었다.
“강진후 대표님. 이쪽은 GJ쇼핑의 유정현 전무입니다.”
“반갑습니다.”
일일이 인사를 나누는 것만 해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잠시 한숨 돌리는데, 아까와는 달리 주위가 좀 소란스럽다.
문득 택규가 생각났다. 아까 부산에서 출발했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서울에 도착했으려나?
엘리는 내 표정을 보며 물었다.
“왜 그래요?”
“택규 생각이 나서요.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내 말에 현주 누나는 피식 웃었다.
“귀찮아서 싫어할걸. 트레이닝복에 슬리퍼 끌고 오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그렇긴 하죠.”
그래도 이런 자리에 나만 온 게 왠지 미안하다.
원래 게임쇼에 같이 가자고 했는데, 일 때문에 혼자 보낸 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냥 따라갈 걸 그랬나?
“지금도 어디선가 택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엘리는 웃음을 지었다.
“기분 탓일 거예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래도 왠지 택규가 저를 애타게 부르는 것 같은…… 응?”
환청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미소를 머금고 있던 현주 누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와 누나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소리쳤다.
“오택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