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215)
난 휴일을 맞아 택규와 엘리와 함께 용인으로 향했다.
엘리가 운전대를 잡았고, 난 조수석에, 그리고 택규는 뒷자리에 앉았다.
“용인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거예요?”
엘리는 평소 입던 검은색 정장과는 달리 흰색 스웨터에 발목까지 오는 보헤미안 스커트를 입고, 보잉선글라스를 꼈다.나들이라도 가는 것 같은 상큼한 복장이다.
“임진용 회장이 보자고 해서요.”
“무슨 일로요?”
“좀 늦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 준다는데요.”
엘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선물이기에 용인까지 오라는 걸까요?”
택규가 말했다.
“네버랜드 연간회원권 주려는 게 아닐까?”
“무슨 애도 아니고.”
그거 받아봐야 갈 일이 얼마나 되겠니?
우리가 도착한 곳은 네버랜드와 붙어있는 서킷이었다. 이곳 역시 서성그룹 소유로 가끔 레이싱경기가 열리거나 기업체 행사, 신차공개 행사 등에 쓰인다.
먼저 도착해 있던 임진용 회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뭘요.”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죠.”
우리는 그를 따라 서킷 안쪽으로 들어갔다.
임진용 회장이 리모컨을 누르자 차고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마치 자동차박물관을 연상케 하듯 수많은 차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략 봐도 100개가 넘어보였다. 국산차는 하나도 없고, 전부 외제차다.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슈퍼카와 거대한 세단,출시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차부터 연식이 오래된 클래식카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롤스로이스 팬텀, 고스트, 레이스가 나란히 있고, 포르쉐 911은 아예 세대별 색상별로 있다. 부가티나 알파로메오 같이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차량도 한둘이 아니다.
택규가 물었다.
“이 차들은 뭐예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모으신 것들입니다.”
고 임일권 회장은 자동차광으로 유명했다.
일설에 의하면, 일하던 도중 근처 포르쉐나 벤틀리 매장에 가서 차를 몇 대씩 구매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고 한다.
얼마나 차를 좋아했는지 나중에는 자동차사업으로까지 손을 뻗었다. 당시는 IMF 전이라 은성차, 대후차, 청룡차가 영업 중이었고, 내수는 이미 포화상태였다.
때문에 정치권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임일권 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서성차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몇 년 못 가 폭삭 망해 르노에 인수되었다.
회장님의 취미생활이 회사를 말아먹은 좋은 예다.
뭐, 그때 한 번 사고 친 뒤로 다른 데 한눈 안 팔고 전자를 이만큼 키워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지만.
택규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내가 프라모델이랑 피규어 모으는 것과 비슷한 건가?”
“뭐…….”
비슷하다면 비슷하지만, 금액이 너무 차이나지 않나?
“이 차들 다 합치면 얼마나 되나요?”
택규의 물음에 임진용 회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500억 정도할 겁니다.”
“…….”
그래. 회장님 취미생활이 이 정도는 돼야지.
참고로 모든 부자들이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워렌 보트나 앙바르 캄프라드(AKEA 창업자)처럼 근검절약하는 부자들도 있다.(심지어는 둘 다 고 임일권 회장보다 돈이 많다!)
그룹회장이 직접 차를 몰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마 사놓고 몇 번 타보지도 않고 세워놓은 차가 대부분일 것이다.
택규는 기대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선물은 뭔가요?”
임진영 회장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바로 이겁니다.”
“예?”
“두 분께 여기 있는 차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차를 한 대씩 고르시면 됩니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자동차를 선물로 주겠다고?
“회사가 아니라 아버지 명의로 되어있던 거니, 골라서 가져가시면 됩니다.”
내 차로는 포르쉐 파나메라가 있고, 업무용차로는 벤츠 S클래스도 있는데. 내가 운전을 그렇게 많이 하는 편도 아니고.
페라리든 람보르기니든 우리 돈으로 사면 된다. 그럴 필요가 없어서 안 산 거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받은 게 있으면 그만큼 줘야하는 게 이치지.
내가 사양하자 임진용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한 번 골라보세요. 어차피 관리가 힘들어서 몇 대만 남기고 다 정리할 생각이니까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말하니 받아두는 게 좋으려나?
난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그럼 저 대신 엘리 차를 골라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엘리는 깜짝 놀랐다.
“정말이에요?”
“예. 회사차 말고는 없잖아요. 이번 기회에 한 대 선물할게요.”
정확히는 임진용 회장이 선물하는 거지만.
내 말에 엘리는 기뻐하며 내 목을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요.”
택규가 말했다.
“그럼 저도 누나 줄 거로 골라가도 될까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누나 먼저 챙기는 착한 동생이다.
임진용 회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택규는 차 한 대를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차 골라도 되나?”
난 고개를 저었다.
“부가티 베이론은 좀…….”
누가 봐도 여기서 저게 제일 비싸 보이지 않니? 25억쯤 하려나?
아무리 공짜가 좋아도 양심은 있어야지.
둘이 차를 고르는 사이 난 임진용 회장과 차고 안을 둘러보며 얘기를 나눴다.
“한국증시가 폭락하는 와중에도 서성전자는 꿋꿋하게 버티네요.”
“후배님 덕분에 인지도가 크게 올랐으니까요.”
서성전자는 빅원 발생 당시 구조와 대피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며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브랜드를 각인시켰다.
B2C 기업들이 인지도와 선호도를 높이기 위해 매년 엄청난 돈을 광고에 쏟아 붓는 점을 생각하면 큰 이익을 본 셈이다.
소비시장이 침체된 만큼 당장 매출증가로 연결된 것은 아니지만, 향후 경기가 회복되면 혜택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보다 은성차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더군요. 기사 봤습니다. 부품업체들이 한숨 돌렸겠네요.”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죠.”
“잘하셨습니다. 수출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내수마저 침체되면 큰일이니까요.”
건설과 자동차는 다른 업종에 비해 연관된 하청업체들이 많다. 때문에 서민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그만큼 크다.
경기가 안 좋을 때 정부가 괜히 SOC사업 벌이거나 자동차 취등록세를 감면해주는 게 아니다.
“은성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난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어떻게 하고 말고가 있나요?”
“어느 기업도 OTK컴퍼니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자동차 쪽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임진용 회장은 조언을 하듯 말했다.
“당분간 어려움을 겪겠지만, 은성차가 이 정도로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기왕이면 도울 건 돕고, 챙길 건 챙기는 게 좋겠지요.”
내가 피식 웃자, 그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요. 현주 누나도 똑같은 말을 해서요.”
얘기를 하는 사이 차고를 한 바퀴 돌고, 차 구경도 다 끝냈다.
택규는 아직까지 고민 중이었다.
“이계로 소환된 주인공이 드래곤 레어에서 무기를 고르는 게 이런 느낌이려나?”
쓸데없이 디테일한 비유다.
저쪽에서 엘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잠깐 여기로 와 봐요.”
빨간색 페라리에 앉은 엘리는 웃으며 말했다.
“이 페라리 어때요? 저랑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 * *
엘리는 결국 페라리 458 스파이더로 결정했고, 택규는 현주 누나 몫으로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를 골랐다.
두 대 합치면 10억 정도 하려나?
우리는 바로 서성화재에 연락해 보험에 가입했다.
택규가 말했다.
“나중에 돌려달라고 하시면 안 돼요.”
임진용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타지도 않는 차인데요. 명의이전 서류는 회사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타고 온 차는 직원을 시켜 회사로 옮겨주기로 했다.
우리는 임진용 회장과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라탔다.
엘리는 운전석에 앉아 차를 출발시켰다.
운행거리는 고작 300킬로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관리인들이 차량을 점검하며 한 번씩 타서 이 정도겠지.
“이 좋은 차를 세워만 놨다는 게 너무 안타깝네요.”
“이제부터 엘리가 많이 타면 되죠.”
엘리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야겠어요.”
막상 타보니 시트가 너무 낮아 불편하다. 인터페이스는 한글 지원을 안 해 영어만 떴고, 시트에는 그 흔한 열선조차 없었다.
요즘은 경차에도 있지 않나?
“그래도 페라리는 페라리죠.”
“마음에 들어요?”
엘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페라리인데.”
하긴, 편한 걸 찾는다면 세단을 타야겠지.
표정을 보니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뒤에서는 노란색 람보르기니를 탄 택규가 열심히 따라오는 중이다.
살면서 오택규가 람보르기니를 모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성공한 오타쿠의 표상인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난 전화를 받았다.
“예, 어머니.”
[너 혹시 추모공원에 다녀갔니?]아버지 유골은 동탄에 있는 추모공원에 안치되어 있다.
“아니요. 왜요?”
[오전에 갔다 왔는데, 꽃이 놓여있기에.]“제가 갔으면 어머니께 말씀드렸겠죠.”
[네 아버지 찾아올 사람도 없을 텐데. 설마 친척들이 다녀갔나?]“그럴 리가요.”
그때 쫓아낸 뒤로는 연락도 없다.
“알았어요.”
전화를 끊는데, 짐작 가는 사람이 한 명 떠올랐다.
정말로 아버지한테 다녀간 건가?
난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현주 누나와 임진용 회장의 말을 떠올렸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인가?
내가 해줄 수 있는 것과 받을 수 있는 건 뭘까?
그 순간, 눈앞에 뭔가 떠올랐다.
* * *
난 약속장소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에 만났을 때보다 많이 늙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표정은 훨씬 한결 가벼워보였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난 인사를 하며 물었다.
“정말로 경영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신 건가요?”
내 앞에 있는 노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진작 손을 뗐어야 했는데, 욕심 부리다가 너무 늦었지요. 이제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가서 마음 편하게 살 생각입니다. 강 대표님께서는 젊으셔서 잘 모르겠지만, 이 나이쯤 되면 이런저런 병을 달고 살기 마련이니까요.”
“…….”
그래서 검찰에 소환되는 회장님들이 다들 휠체어를 타고 계신 건가?
에어백 결함을 은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은성차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한민구 회장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그 덕에 여론을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지만.
“요즘 알베르트 매니지먼트가 은성차를 타깃으로 공매도를 쏟아내고 있던 모양인데요.”
한민구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는 있지만, 당장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우리나라 재벌그룹의 지배구조를 보면 반도체 회로만큼이나 복잡하다. 이는 은성차 역시 마찬가지.
상장계열사부터 비상장계열사까지 순환출자 고리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데다가 계열사에 포함되지 않은 친족기업들도 한둘이 아니다.
은성차는 제조업이 중심이지만, 은성캐피탈과 은성카드라는 금융업을 가지고 있다.(자동차는 집 다음으로 큰 자산인 만큼 대부분 할부나 리스를 통해 구매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자동차를 팔며 금융서비스까지 같이 판매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금산분리가 강화된 만큼 경영권승계 과정에서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해야 하는데, 주가하락과 자금부족이 발목을 잡고 있다.
에어백도 리콜해야 하고, 출고적체도 해소해야 하고, 지배구조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주주들 불만도 달래야 한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도움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혹시 원하는 게 있다면,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난 담담하게 말했다.
“은성차가 가지고 있는 대형트럭 사업부를 분할해서 매각하셨으면 합니다.”
은성차는 세단과 SUV 같은 승용차 외에도 대형버스와 대형트럭 같은 상용차도 판매한다. 세계적으로 잘나가는 승용차와는 달리 상용차는 투자대비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대형버스는 국내시장에서 대후상용차와 어느 정도 나눠먹고 있지만, 대형트럭은 스카니아(SKANIA), MAN, 볼보, 벤츠 등에 밀려 점유율이 미미한 수준이다.(포클레인, 굴삭기 등을 만드는 은성건설기계는 은성중공업계열사로 은성차그룹과는 상관없다)
은성차 입장에서는 애물단지나 다름없으니, 가격만 맞으면 충분히 팔 의사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