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309)
본사 회의실에는 가끔 뉴스에 나오는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SSK그룹 채원태 회장과 CL그룹 양준모 회장. 그 둘 외에도 SSK닉스 박동욱 사장과 SSK이노베이션 채원호 사장, 그리고 CL화학 양호영 사장과 CL전자 양호경 사장 등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일전에 청와대나 호텔 등에서 만난 적이 있다.
“반갑습니다.”
택규는 능글맞게 웃으며 CL화학 사장에게 말했다.
“따님은 잘 지내시죠?”
그 말에 양호영 사장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일은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양호영 사장의 딸은 양하나. 예전에 파티장에서 택규와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난 그만하라는 의미로 택규의 옆구리를 찌른 다음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가 농담한 거예요. 지난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난 양호영 사장과 채원호 사장을 보며 말했다.
“요즘 CL화학과 SSK이노베이션 주가가 많이 떨어졌던데요.”
내 말에 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한국의 배터리 제조업체는 크게 세 곳이다. 서성SB, CL화학, SSK이노베이션. 그런데 서성SB는 폭등한 반면, 다른 2차전지주는 폭락을 거듭했다.
내연기관차에서 가장 비싼 부품은 엔진인 반면 전기차에서 가장 비싼 부품은 배터리다. 배터리야말로 전기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만큼 그동안 각 업체들은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CL화학과 SSK이노베이션 모두 뛰어난 기술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완성차업체들의 납품계약을 줄줄이 따냈다. 향후 시장이 커질 것을 대비해 R&D 투자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덕분에 NCM배터리의 성능은 과거와 비교도 안될 만큼 발전했다.
그런데…….
OTK배터리로 인해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처음 발표됐을 때만 하더라도 양산은 힘들 거라 예상했는데 보란 듯이 상용화까지 성공했다.
양사는 그동안 엄청난 비용을 쏟아 부어가며 하던 연구개발은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NCM배터리를 개량해봐야 만들 수 있는 것은 그저 더 나은 NCM배터리일 뿐이다.
전고체나 신소재 등 차세대 배터리도 개발 중이지만,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성공한다 해도 OTK배터리 성능을 뛰어넘기는 힘들다.
아마 OTK배터리를 입수해 분석해 봤겠지만, 핵심기술에 대해 알아내지는 못했을 테고, 설사 알아낸다 하더라도 특허권이 풀릴 때까지는 생산이 불가능하다.
일단 방향성은 확인한 만큼 특허를 우회할 방법을 찾으려 하겠지만, 역시 쉽지 않을 테고.
다행히 OTK배터리의 생산량은 한정돼 있고, TS컴퍼니가 생산하는 자동차용 대형배터리는 타업체에 공급하지 않는다.때문에 다른 완성차업체들은 어쩔 수 없이 기존 NCM배터리를 계속 탑재했다. 그러나 NCM배터리 가격은 점차 하락세였고, 판매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진용 회장 말에 따르면 폭스바겐그룹과 피아트그룹 측에서는 기존계약의 물량과 가격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전기차 분야에서 CL그룹과 협력하던 은성차는 우리 쪽으로 돌아섰고, GM과의 협력도 기존 계약물량을 끝으로 완전히 끊기게 될 것이다.
“아시다시피, 무인전기차는 모든 분야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배터리, 통신, 전자 등등. 그룹 계열사 중에서는 SSK이노베이션, CL화학, SSK텔레콤, CL텔레콤, SSK닉스, CL전자 등이 직접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말인데, 먼저 CL화학과 SSK이노베이션에 OTK배터리 위탁생산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폭락한 주가만큼이나 둘의 심기도 안 좋아 보였다. 자체기술로 생산하던 배터리 대신 위탁생산을 하라니,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겠지.
그러나 최첨단을 달리던 NCM배터리 기술은 OTK배터리 등장으로 인해 한순간에 구닥다리가 되어버렸다. 당분간은 수요가 없진 않겠지만, 마차는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마차다.
“우리는 더 많은 배터리가 필요하고, 두 그룹은 공장 가동률이 60퍼센트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미 얘기 들으셨겠지만,서성전자 역시 자체 생산물량으로는 부족해 대만의 TMSC나 SK닉스에 파운드리를 의뢰할 예정이구요. 앞으로 서로 협력해 나가야 할 일이 많을 거라 생각하는데,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채원태 회장과 양준모 회장 모두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새파랗게 젊은 청년에게 이런 얘기를 듣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
대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기업은 이익을 우선시 한다. 자존심이 밥 먹여 줄 것도 아니고.
* * *
난 오랜만에 김명준 교수님의 연락을 받았다.
[카로스 예약판매 대박친 거 축하해.]“감사합니다.”
[우리 학과뿐 아니라, 화학과와 자동차학과도 기대가 매우 커. 덕분에 다들 취업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다고 좋아하고 있어.]“그래요?”
[SSK그룹과 CL그룹과도 협력한다며? 이건 뭐 한국경제는 이제 OTK컴퍼니가 먹여 살리는 거나 다름없네.]계속 칭찬을 하는 걸 보니,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단도직입적으로 하셔도 됩니다.”
“…….”
이건 너무 단도직입적이지 않나?
“무슨 청탁인데요?”
[한국교향악단 알지?]“알죠. 1년에 한두 차례 한국대에 와서 공연하잖아요.”
내가 클래식을 찾아 듣는 편은 아니라서, 공연을 듣지는 않았다.
[맞아. 1955년에 한국대 음대생들이 주축이 되서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 깊은 오케스트라야. 한국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고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지.]“그래서요?”
[역사가 깊은 만큼이나 연습실 겸 공연장으로 쓰는 한국음악전당도 오래됐거든. 이번에 안전진단을 받았는데 개보수가 시급하대. 시설개선도 좀 필요하고. 그래서 지금 기업들 후원을 모집하고 있다는데…….]“OTK컴퍼니가 후원해달라는 건가요?”
[내가 원래 이런 청탁 받지도 않고 하지도 않는 사람인데, 한국대 기악과 학과장이 하도 부탁을 해서 말이지.]“기악과 학과장님이요?”
음대 건물은 경영대 건물과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 그래도 경영학과 애들 중에서 기악과 학과장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사모님이잖아요.”
[……그러니까.]김명준 교수님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다른 교수가 말했으면 칼 같이 자르겠는데, 와이프가 그러니 어쩌겠어? 매일 같이 쪼아대는데, 버틸 수가 있어야지. 지금 단원들 중 제자들이 많아서 신경이 쓰이나봐. 많이 낼 필요 없고, 소액이라도 후원해주는 척만 해줘. OTK컴퍼니가 후원금 내면 다른 기업들도 후원하지 않겠어?]별로 어려운 청탁(?)은 아니다.
돈 벌었으면 예술을 적극 후원하는 것은 자본가의 역할이기도 하고.
메디치가의 경우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등을 후원해 수많은 예술작품을 세상에 남겼고, 앤드루 카네기가 카네기홀을 짓고, 록펠러가가 링컨센터를 지었다. 서성그룹과 CL그룹 등도 아트홀을 운영하고 있고.
그 정도는 못 하더라도 후원금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겠지.
“맨입으로요?”
내 말에 김명준 교수님은 화들짝 놀랐다.
[응? 가난한 교수한테 뭘 바래?]난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잖아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절대 결혼하지 마. 이건 스승이 제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가르침이야.]“…….”
농담이라고 하기엔 강렬한 진심이 느껴진다.
* * *
안경을 쓴 중년여성이 회사로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한국교향악단 박혜진 대표입니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것은 지휘자지만, 대표가 해야 할 일도 만만치는 않다. 악단에 소속된 인원들을 관리해야 하고, 공연스케줄과 대관 등도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바로 예산확보.
공연을 할 때마다 수익이 들어오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유지가 힘들다. 웬만큼 규모가 크고 흥행하는 오케스트라가 아닌 이상 지자체의 지원과 기업의 후원은 필수다.
특히 이번처럼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시설 개보수의 경우 서울시도 난색을 표했고, 결국 이렇게 대표가 직접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발 벗고 돌아다니는 중이다. 그런데 대기업들도 요즘 사정이 좋지 않다보니, 후원받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기업이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일단은 세금감면 혜택이 주어지고(우리는 어차피 법인이 조세피난처에 있어서 해당사항이 없지만) 기업을 홍보할 수 있다. 연주회 관람시 각종 혜택이 주어지는 건 덤이고. 특별공연 초청, 전용좌석, VIP대우 등등.
택규가 물었다.
“얼마나 필요한가요?”
그러자 박혜진 대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27억 원입니다.
금액을 들은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녀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이 금액을 다 후원해 달리는 건 아닙니다. 일부만 후원해주셔도 충분합니다.”
택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수백억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싸게 먹히겠는데.”
“그러게.”
나도 한 100억 생각했는데. 이거 얼마나 내는 게 좋으려나?
내가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택규가 말했다.
“여러 군데 찾아갈 것 없이 저희가 다 후원하겠습니다.”
그 말에 박혜진 대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저,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뭐, 크게 어려운 건 아니니, 안심하세요. 다른 게 아니라…….”
택규의 조건을 들은 그녀는 깜짝 놀랐다. 나도 놀랐다. 이게 뭔 뜬금없는 얘기야?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박혜진 대표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러니까 로스트판타지 음악을 오케스트라로 공연해 달라는 말씀이시죠?”
“그 게임에 좋은 음악이 정말 많거든요. 특히 7 엔딩곡과 12의 오프닝곡은 진짜 감동이었죠. 혹시 들어보셨나요?”
“아니요.”
“그 명곡을 안 들어보셨다니. 안타깝네요. 에이튜브에 있으니 한번 들어보세요. 감탄이 저절로 나올 테니까요.”
난 당황하며 말했다.
“갑자기 뭔 로스트판타지 오케스트라야?”
“예전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모두가 알다시피, 내년이면 로스트판타지 출시 30주년이니까.”
“…….”
모두가 아는데, 왜 나만 몰랐을까?
“30주년 기념 음악회를 개최하면, 로스트판타지 팬들에게 좋은 추억이 되지 않겠어?”
“그걸 오케스트라로 공연하면 누가 들어?”
“팬들이 듣지.”
“음악회 수요층과 게임 수요층은 완전히 다르잖아.”
“왜 다르다고 생각해? 게이머들이 사운드에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는데. 우리는 게이밍용 헤드셋까지 따로 갖추고 있어.게임을 하며 음악감상도 하는 거지.”
“…….”
뭐지? 나름 논리적이라 반박하기가 힘들다.
택규는 흥분했는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언제까지 모차르트와 베토벤만 연주할 거야? 오케스트라도 이제 새로운 음악을 연주할 때가 됐어.”
“그건 니가 아는 음악가가 모차르트와 베토벤밖에 없는 거고. 요한 스트라우스 2세라든지 요하네스 브람스도 있잖아.”
“그리고 콘도 하야시도 있지.”
“그게 누군데?”
“모두가 알다시피, 로스트판타지 음악감독. 설마 몰랐어?”
“…….”
대체 그 모두에 왜 나는 계속 포함이 안 되는 거지?
택규는 박혜진 대표를 보며 물었다.
“어려울까요?”
“아, 아니요. 어려운 건 아닌데…….”
“생각해보세요. 한국교향악단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제가 홍보도 팍팍 지원하고, 빵꾸나면……아니, 손해 보면 비용도 전부 메워드리겠습니다. 보나마나 흥행해서 수익을 벌어들일 테지만요.”
박혜진 대표는 전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27억 원의 후원금이 걸려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겠지.
예술은 매우 고귀한 일이지만, 돈이 있어야 할 수 있지 않겠나?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