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is a dimensional bag RAW novel - Chapter 94
94화 글리제 차원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튀어나왔다.
밀수 거래.
‘설마 내가 밀수를 했다는 건 아니겠지?’
밀수, 밀무역이라는 것이 뭔가.
세관을 거치지 아니하고, 즉 관세를 지불하지 않고 몰래 물건을 들여오는 것. 불법 보따리상이란 의미다.
‘관세를 빼먹은 적 있나?’
그럴 리가!
그렇다면 자신의 눈 밖에서 일어난 일, 누군가 에론 대륙과 지구 사이에서 밀무역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광휘?”
때가 왔다.
그동안 정말 궁금했다. 신의 행사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존재, 스스로를 선배라 말하며 대륙을 지배하고 있다던 그 존재, 던전의 이치까지 안다는 자칭 현자.
왜 이계의 신은 그자를 그냥 내버려 두고만 있었을까?
마침 신어 소통이 확장 모드로 변했다. 양방향 소통이 가능해졌으니 물어보면 대답을 해 줄 터.
“설명해 줄 때가 되지 않았나?”
“냥?”
“돼지야, 쉿! 너한테 이야기한 거 아니야.”
“냐앙…….”
“광휘는 누구지?”
그러자 응답이 왔다.
태초의 차원 거래자. 즉, 광휘를 이르는 말일 터.
[방대한 기록입니다. 시간을 단축하려면 가이드 슬롯을 추천합니다.]가이드 슬롯이라, 그러고 보니 슬롯의 여유가 얼마나 남아 있을까?
[현재 남은 가이드 슬롯의 개수는 여섯 개입니다.]“어우, 겨우 여섯 개밖에 남지 않았어?”
신어 체계가 에고 가이드를 흡수하면서 생긴 최고의 혜택, 슬롯에 책자 같은 걸 삽입하면 뭐든지 스킬로 변화시켜 익힐 수 있다.
처음 트리플 슬롯이었던 가이드가 업그레이드로 인해 100개로 늘어난 것.
당시엔 100개씩이나 배울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마법을 7클래스까지 올리면서 배운 마법서들, 그리고 무기 교본 등등 닥치는 대로 꽂아 넣다 보니 어느새 100개에 육박했다.
“가이드 슬롯을 늘일 방법은 없나?”
“냥?”
[가이드 슬롯 확장에 개당 10,000pt의 차원 기여도가 필요합니다.] [가이드 슬롯의 최다 한계 개수는 1,000개입니다.]예상했던 바다. 뭐든 차원 기여도 점수만 투입하면 만사형통이지. 그래도 일만 포인트면 저렴한 수준.
먼저 슬롯을 10개 정도 늘리고.
그리고 광휘에 대한 기록을 장착.
[태초의 차원 거래자에 대한 기록을 가이드 슬롯에 장착합니다.]그러자 머릿속에서 과거의 기록들이 다큐멘터리처럼 재생되었다.
“아!”
차원의 발전이란 것이 무엇인가? 인간 문명의 발전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정체된 차원.
신도 어찌할 수 없는 자연도태의 저주, 아주 오래전 과거, 에론 대륙은 멸망의 끝자락에 서고 말았다.
원인이 뭔지는 모른다.
단지 알 수 있는 건 에론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차원이 많다는 것. 모두 퇴보의 전염병이 차원을 휩쓴 결과였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멸망의 증거가 에론 대륙 전체에서 나타났다.
식물들이 새로운 씨앗을 맺지 않았다. 곤충들이 낳은 알은 부화하지 않았고, 동물들은 번식 행위를 중단했다.
그 징후는 드래곤들에게서 먼저 나타났다. 그들은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않았다. 엘프들은 노쇠해졌고, 드워프들은 우둔해졌다.
그들은 그나마 괜찮은 편, 여타 유사인류 종족들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요정, 수인족, 마족, 신의 의지를 전하는 천족까지.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인간들도 상황은 심각했다.
그들은 욕망을 거세당했다.
재물에 대한 욕심, 이성에 대한 욕구, 권력에 대한 의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욕망이 사라진 인간은 무력하다.
인간들마저 정체에 빠지자 신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변화의 바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체 어떤 방법으로?
신은 방법을 찾았다.
차원 내부에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면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까진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고.’
그러자 새롭게 나타나는 사실.
신은 가장 변화가 왕성한 ‘글리제 차원’이란 곳과 에론 차원을 연결시켰다. 던전을 통해서 말이다.
‘글리제? 흐음, 문명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지구는 아니야. 지구는 두 번째였구나.’
고작 던전만 연결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새바람이 불어왔다.
도태의 저주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연결이 답이었네.’
신은 거기서 더 나아가기로 했다.
적극적으로 차원과 차원을 교류할 수 있는 대리인을 내세워 발전을 도모하기로 말이다.
누굴 내세워서?
드래곤은 현명하지만 오만하다.
엘프는 신중하지만 고지식하다.
드워프는 우직하지만 고집불통.
인간!
그것도 이계의 인간.
욕망에 충실하면서 창조적인 인간.
그래서 선택된 이가 광휘라는 글리제 차원의 인간.
에론의 신은 이계의 인간에게 자신의 신격을 떼어 주었다.
“아하!”
그리고 그에 대한 기록이 본격적으로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처음엔 열정적으로 나섰지만 자신의 고향 차원이 파멸하자 에론 차원의 변화를 철저하게 통제한 광휘에 대한 이야기가 말이다.
* * *
일전에 운호는 정지훈과 민기철을 함께 만난 자리에서 UH 재단에 대해 사업이 잘되어 가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걸 들은 민기철은 곧바로 홍민기 변호사와 정휘선 회장을 만났다.
대놓고 조사해 보라는 말은 없었다. 그냥 궁금하다고 했을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재단의 설립자 그것도 헌터 정운호가 알아보라고 한 일.
운호에 대한 민기철과 정휘선의 신뢰는 절대적. 심심해서 알아보라고 했겠나? 그가 UH 재단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다.
그리하여 재단의 감사팀이 나섰다.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다.
명확하게 드러난 문제점도 없다. 공개적으로 조사를 하다 아무런 혐의점이 없으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는 곧 나왔다.
홍민기 변호사가 정휘선 회장에게 보고했다.
“조사가 끝났나?”
“1차적인 조사는 완료했습니다.”
“그럼 보고해 보게.”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회계 처리도 완벽하고 사업의 성과도 확실합니다.”
“으흠, 그런가. 수고했네.”
기우였나?
‘하긴, 나정이가 부정을 저지를 담력은 없는 아이지.’
비록 가진 야망은 큰 편이지만 말이다.
현재 UH 재단 책임자는 정휘선의 조카손녀인 정나정. 똑똑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친족이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들어오는 돈 만큼이나 덩치가 커져 버린 UH 재단, 원래는 손자인 지훈이에게 맡기고 싶었는데, 그 망할 놈이 죽는 것보다 싫다고 뻗대는데 어떻게 이겨?
뭐가 더 남았는지 홍민기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번뜩이는 정휘선 회장의 눈빛.
하지만이라니!
다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회계 장부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정나정 님의 행보가 다소 이상하긴 합니다.”
“자세하게!”
“아시다시피 UH 재단의 복지 사업은 가장 필요한 곳에 우선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최근 들어 특정 분야에 집중적으로 자금이 투입되고 있습니다.”
“으흠, 특정하다?”
“일부 광역시를 중심으로 노후 시설 정비나 환경 사업, 교육 사업 등등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건 내가 봐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홍민기가 조심스럽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
“이건?”
“UH 재단이 남부 지역 광역시에 사업을 진행하기 전에 그곳의 시장과 비밀리에 만난 사실이 포착되었습니다.”
“…….”
자세를 고쳐 앉고 홍민기가 내민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휘선.
“이 사람은 최동호 시장이 아닌가?”
“맞습니다.”
“공익 사업 특성상 진행하기 전에 시장을 만나 행정상 편의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은데…….”
“사실 사업의 방향성이 매우 이상합니다. 사업 선택이 정나정 님의 독단으로 이루어지고 대부분 환경 사업입니다. 그 때문에 소년 소녀 가장, 독거 노인, 결식 아동에 대한 직접 지원 예산은 줄어들었고요.”
“흐음.”
“결정적인 건 진행하고 있는 재단의 사업이 지방 선거 당시 최동호 시장이 했던 공약과 겹친다는 겁니다.”
“허어!”
환경 사업이라.
가장 생색내기 좋은 사업. 선전하기도 좋고 눈에 잘 띄고, 일단 착수하게 되면 대규모 공사를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인들이 공약으로 내세우기에 딱 좋은 것이기도 하고.
정휘선 회장이 침중하게 말했다.
“자료를 더 수집해야겠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의 사업도 어땠는지 알아봐.”
“착수하겠습니다.”
“전수 조사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나?”
“글쎄요. 일단 재단 내부에서 믿을 만한 사람부터 포섭해야죠.”
“들키지 말아야 해. 감사가 진행된다는 걸 알면 꼬리를 잘라 버릴지도 몰라.”
“네, 알겠습니다.”
사업의 선정과 방향을 정나정 혼자 결정했다면 대체 다른 이사진은 뭘 하고 있었지?
UH 재단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재단. 이사진도 수십 명, 한국인도 있고 미국인도 있다. 그들이 정나정이 전권을 행사하도록 그냥 내버려 뒀다고? 그런 이유 때문에 이사진들도 믿을 수 없다.
‘분명 이해관계가 있겠지.’
더구나 정나정은 어리다.
혼자서 절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터.
그렇다면?
‘혹시 광선이 그놈이?’
의심이 간다.
자신의 동생이자 정나정의 조부인 대영 건설 정광선 사장. 친혈육이지만 욕심이 많은 놈이다.
‘후우,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구만.’
정휘선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 * *
아무리 비밀리에 진행했다지만 재단의 감사를 사무총장인 정나정이 모를 리 없었다.
“뭐? 감사팀이 움직였다고?”
측근을 통해 들어온 정보에 충격을 받은 정나정.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그녀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설마 큰할아버지가?’
재단의 감사는 법무법인 홍&장이 맡고 있다. 홍민기 변호사가 움직였다면…….
‘큰할아버지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잖아.’
정휘선이 확신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복지 사업을 진행했는지 알아내는 건 금방일 터.
‘방법을 찾아야 해.’
사실 그녀 혼자 이런 일을 진행한 건 아니다.
그녀의 뒤엔 자신의 친조부인 정광선 대영 건설 사장이 있었다.
정광선은 친손녀가 대한민국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길 바랐다. 그래야 자신의 사업도 순조로울 것이고. 그런 식으로 정나정을 부추겼다.
그녀 또한 속셈이 있었다. 정나정의 꿈은 정치인, 재단 사업을 통해 자신만의 인맥을 구축하는 것이 목적.
하지만 할아버지의 도움을 기대하면 안 된다. 상대는 큰할아버지 정휘선.
그리고 재벌이라는 존재들이 다 그렇지 않나? 돈을 위해선 자신의 친족마저도 스스럼없이 외면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최후의 순간, 친할아버지 정광선은 자신을 버릴 것이 틀림없다.
가장 최선은 정휘선도 건드리지 못하는 커다란 배경을 등에 업는 것.
‘어떡하지?’
사무총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건 문제가 아니다.
자칫하면 매장당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정휘선은 무서운 사람이다.
그때!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오는 정나정의 비서.
“총장님.”
“으응? 무슨 일이야?”
“미 대사관에서 통화를 요청해 왔습니다.”
갑자기 미 대사관에서 왜?
정나정은 자리에 앉아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정나정입니다.”
꽤 오랫동안 이야기가 오고 갔다.
“네? …마나 골드?”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얼굴에서 점점 짙어지는 미소.
“그래요. 그런데 마나 골드 광산도 UH 재단의 소유라는 건 알고 계시죠?”
목소리엔 생기가 돈다.
“영리 목적으로 반출 금지 물건이라는 것도 아시겠고요.”
느긋하게 협상을 이끌어 가는 정나정.
그녀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가능해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녀는 조건을 말했다.
마침내 전화 한 통화로 그녀가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졌다.
그것도 미국 정부 백악관의 보증으로!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대체 마나 골드로 뭘 하려고…….’
뭐, 알 필요가 있나?
중요한 것 살아날 길이 열렸다는 거지.
* * *
기록의 재현이 끝났다.
운호는 한숨을 쉬었다.
비로소 광휘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것.
“바보 같은 새끼!”
“냥?”
“아니, 너 말고.”
결국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그래 놓고 누굴 탓해?
가서 조사를 해 봐야 한다.
놈이 밀무역을 통해 지구로 넘긴 물건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지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반드시 찾아서 없애야 하고.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밀수로 넘어간 물건의 정체는 그렇다 쳐도 언제 어디로 전달되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것.
지구에 존재하는 던전의 숫자만 수십만 개.
바로 그 순간!
[지구와 글리제 차원과의 교류를 제안합니다.]잘못 들었나?
글리제 차원이라니!
태초의 차원 거래자 광휘의 고향.
“거기 망했잖아!”
[글리제 차원으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던전 연결도 끊어졌다는데 어떻게 가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