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15)
115 명절 냄새
근육질보다 살집 있는 사람이 추위를 덜 탄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다. 고기를 든든하게 먹었더니 2월 초 쌀쌀한 날씨도 하나도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다.
“여기 골프장도 있네요?”
박준희 사장이 파크골프장에 눈길을 주더니, 골프로 운을 띄운다. 박 사장도 골프 왜 안 하냐고 갈굴 것 같다. 빨리 골프 연습장부터 등록해야겠네.
“파크골프장인데, 이용하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확실히 골프도 대중 스포츠가 된 것 같습니다.”
“정수 씨는 골프 시작하셨어요?”
“레슨부터 등록해야 하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막상 몸이 가질 않더라구요. 강 사장님이 왜 빨리 안 하냐고 성화예요.”
박 사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먼저 겪어 본 사람의 노련함 같은 것인가?
“여유 없는 것, 그거 사장병이에요. 회사 일이 직원들이 다 하는 것 같고, 막상 할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정신없죠?”
“네, 맞아요.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아요. 외부에서 골치 아프게 하는 경우도 많고.”
“하하. 저도 그랬어요. 직원들은 몇십 년씩 일한 베테랑이지, 나는 변압기 아무것도 모르지. 사장이라고 앉았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런데 몸은 천근만근이고. 정수 씨도 그렇죠?”
나는 그래도 변압기는 조금 알긴 했고, 사장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긴 했는데…… 그러고 보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와서 회사를 그렇게 키운 박 사장은 대단한 사람임이 확실하다.
“사장 일이란 게 해도 해도 끝이 없더라고요. 우리 회사야 워낙 급성장한지라 챙겨야 할 것도 많고 말이죠.”
“제가 조언할 처지는 아닌 것 같지만, 정수 씨도 자기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밤잠 못 자 가면서 회사 걱정한다고 회사가 더 잘되는 것은 아니에요. 회사가 잘되려면 직원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게 해 줘야죠. 회사 일은 사장 혼자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거 새로운 멘트인데? 내가 만났던 사장들 99.9퍼센트는 회사 걱정에 밤에 잠이 안 온다고들 하던데, 오히려 걱정하지 말고 잠 잘 자라고?
“회사 일에 올인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직원들만 힘들어져요. 사장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 관리예요. 뛰어난 사장이 못 이기는 자가 오래 버티는 사장이에요. 오래 버티려면 여유가 있어야겠죠?”
훌륭한 사장 뒤에는 훌륭한 멘토가 있다고 하더니, 역시 좋은 얘기를 쏟아 내는군.
회사 일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말라는 덕준이의 조언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능력 있고, 좋은 사람들이 하는 조언은 비슷한 모양이다.
“네, 그래서 이제 골프도 배우고, 연애도 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하하.”
“어머? 연애는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연애 관심 없는 사람은 저보다 누나가 아닌가요?”
“또또!”
어깨를 매섭게 한 대 치는데, 옷이 두툼해서 그런지 하나도 아프지 않다. 이런 연약한 사람 같으니.
“주변에서 왜 연애 안 하냐, 결혼 언제 하냐는 소리 많이 하지 않아요?”
“아휴, 명절 아니랄까 봐.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니까요. 뭐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하하. 사실 연애할 상황도 아니고, 뭐 그래요.”
“눈이 엄청 높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푸하하. 진짜 무슨 소문이 도는 거예요? 눈이 높은 건 맞아요. 외모가 아니라 사람 됨됨이나 능력을 많이 봐요. 제가 너무 잘나서 그런지 성에 차는 사람이 없네요. 하하.”
저 능력에 외모까지 갖추고 있으니, 눈이 높아야 말이 되겠지. 아마 박 사장 아버지가 현역에서 계속 뛰었다면, 전국에 방을 내려 부마 찾기 대회라도 했을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올해 민수 시장은 어찌 될 것 같습니까?”
“일 얘기하지 말자더니, 정수 씨도 똑같네요. 호호. 산책은 이 정도로 하고 디저트나 먹으러 가요.”
일 얘기 말고, 지정수와 박준희의 얘기를 하고 싶지만, 선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충분히 친하긴 하지만, 급격히 친해질 만한 사이는 아니다. 서로 위치가 동료가 될 수도 있지만, 경쟁자가 될 수도 있으니 여전히 조심스럽다.
치즈케이크와 티라미수 먹는 것도 조심스럽다. 어딜 가도 맛있을 수밖에 없는 사기적인 맛인 것은 분명한다. 고민은 포크에 묻은 잔여물이다.
쪽 빨아먹는다고 해도 깔끔해지지 않고, 그렇다고 뭔가 묻은 채로 포크질하기도 뭐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각자 먹을 수 있게 주문할 걸 그랬다.
“음, 맛있네요. 역시 고기 먹고 나면 단것을 먹어 줘야 해요. 정수 씨, 잘 먹을게요.”
“고기에 비하면 약소합니다.”
“아까 민수 얘기하셨죠? 보기에 올해는 많이 좋아질 것 같지 않아요?”
좋아질 여지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태양전기가 그 난리통을 맞으며 오그라지면서 경쟁이 완화되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 업체들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나눠 먹읍시다’고 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출혈 경쟁이 계속되지 않을까요? 태양전기가 힘을 못 쓰는 상황이긴 하지만, 태양전기처럼 영업하는 업체가 한두 곳도 아니고 말이에요.”
“그래서 저랑 정수 씨가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이겠죠?”
박 사장 눈빛이 달라졌다. 달콤함을 음미하며 천국을 거니는 것 같던 눈빛이 지옥불도 두렵지 않다는 의지로 가득 찼다. 민수 시장에서 제대로 한번 붙어 보자는 것인가?
“누나는 지키는 자이고, 저는 빼앗으려는 자 아닙니까? 하하.”
“신사협정 맺자구요. 한 회사가 시장 전체를 커버하기는 어려우니까, 어차피 나눠 먹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 최소한 우리끼리는 싸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내 의도를 읽기라도 한 것인지 맘에 드는 말을 쏙쏙 골라서 꺼내 든다. 역시 총명한 사람이야. 이제 대화 잘 마무리하면서 올해 민수 시장도 확 밀어붙이면 되겠다.
“이거 담합이라도 하자는 것인가요? 하하.”
“담합이라뇨. 서로 욕심내면서 거래처 건드리지 말자는 것이죠. 아시잖아요?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서로 죽어요. 욕심낸다고 될 일도 아닌데, 왜 굳이 욕심들을 내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동의합니다. 우리 회사가 올해에는 민수 쪽으로도 힘을 쓸 생각이긴 한데, 금성전기 같은 강자랑 경쟁할 상황도 아니고, 욕심 부리지는 않으려구요. 그저 중고 변압기로 장난치는 회사들만 정리했으면 합니다.”
“맞아요. 정리가 필요해요. 요즘 어디까지 갔는지 얘기 들었어요?”
우리 회사 연합 통신인 상무 통해 온갖 얘기 들었지. 정말 가지가지 하더라.
“코아 통째로 쓰는 것 얘기하는 거죠?”
“정말 기가 차더라구요. 중고 코아 쓰는 것까지는 이해하는데, 그 기름 범벅인 것을 그대로 쓰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렇게 몇 푼 아껴서 변압기 문제 생기면 그게 어디로 돌아오겠어요?”
민수 변압기 시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변압 용량 3000kVA 이상 초고압은 대기업이 독과점하고 있지만, 그 이하 제품들은 법 때문에 대기업이 뛰어들지 못한다.
그래서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난립해 그야말로 개판 오 분 전이다. 안 그래도 개판인 시장에서 업체들은 자기 잇속만 차리겠다고 난리를 친다.
어떻게든 가격 낮춰서 한 대라도 더 팔겠다고 중고 변압기 사서 새 것으로 둔갑시키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 짓을 잘했던 회사가 태양전기였지. 양심이 있다면 중고 변압기에서 쓸 수 있는 것만 활용하고 말아야 하지만, 태양전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싸우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오해는 마시구요. 올해는 민수에서 공격적으로 해 볼 생각이에요. 몹쓸 짓 하는 업체들이 발을 못 붙이게 해야죠. 서로 선의의 경쟁 하면서 업계 정리 좀 하자구요.”
“역시 정수 씨는 무서운 사람이에요. 호호. 자동권선기 돌려 보니까 확실히 여력이 충분해졌어요. 저도 올해는 좀 달려 볼 생각이었어요. 이거 이상동몽이네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누나는 제 롤모델이라고.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해 보니까 답은 하나더라구요.”
내가 박 사장이었다면, 업계 정화의 사명을 가졌을 것이다. 혼자라면 어렵겠지만, 둘이라면 힘을 낼 수 있겠지.
“잘 생각하셨어요. 제 살 깎아먹는다는 것을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것인지 원. 몇몇 사장들 하는 것 보면 너무 답답해요. 진짜 태양전기가 했던 짓을 보면서 저렇게 하도록 놔둬야 하나 고민 많이 했어요.”
“저도 한때 거기 일원으로서, 죄송합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대부분 반대했어요. 그렇게 장난쳐서 매출 늘려 봐야 오래 못 간다고 말이죠.”
공장장과 상무가 많이 반대를 했었지. 그래서 창업주랑 갈등을 빚기도 했다. 공장장이 직책만 공장장일 뿐 명예직 수준으로 밀려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뭐 갈등이 없었더라도 공장장이나 상무에게 회사를 물려줄 일은 없었겠지만.
두 사람은 변압기 회사가 중고 사다가 외함갈이 하는 짓이 체면 구기는 일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대놓고 얘기를 못해서 그렇지, 이렇게 하다가는 회사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장난친 변압기라고 해도 싸니까 거래처들이야 좋았겠지. 싼 게 비지떡이라고 4~5년 지나면 변압기 펑펑 터져 버릴 것이다. 피해자는 소비자겠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변압기 회사다. 소비자가 국내 중소기업 변압기들을 사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에이, 정수 씨 덕분에 태양전기가 저렇게 됐잖아요. 태양전기 이제 민수에서는 힘 전혀 못 쓸 거예요. 누가 거기 제품 사겠어요?”
“여튼 올해는 서로 힘내서 민수 시장 좀 정화하자구요. 최소한 신품과 중고 시장만큼은 확실하게 구분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저야 좋죠. 혹시나 제가 욕심 부린다고 생각할까 봐 고민하긴 했는데, 정수 씨가 이해해 주니 망설일 이유가 없죠.”
“그런 의미에서 악수 한번 하시죠. 하하.”
“악수 되게 좋아하네요? 제 손 그렇게 잡고 싶어요? 푸하하.”
그러고 싶고말고.
그렇게 금성전기와 민수 시장 정화 활동 MOU가 체결됐다. 공격적인 영업으로 어설프게 장난치는 애들 정리할 토대가 마련됐다.
한 번 사면 20년은 기본으로 쓰는 제품이다. 싼 가격에 혹하지 말고, 효율 높은 제품이 장기적으로 이득이라는 것을 상식이 되게 만들어 줘야 한다. 그게 모두가 사는 길이다.
신품 시장을 엉망으로 만든 태양전기가 어디까지 구겨졌는지 궁금해졌다. 확실히 나주에 내려오니 업계 동향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4G를 넘어 5G 얘기가 나오는 세상이지만, 대면으로 얻는 정보가 여전히 중요하니.
말 나온 김에 태양전기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물어보자.
“그나저나 태양전기는 많이 어려운 모양인가 보더라고요?”
“자재업체들이 소식 물어다 주는데, 버티기 어려운 상황 같아요. 아니, 처음에 그랬다 싶으면 바로 수출 포기하고 정리해야지, 그걸 기어코 계속 끌고 간다고 하더라구요. 밑 빠진 독에 물붓기도 할 때가 있지 원.”
그 멍청한 최현아가 오기를 부리는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실패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수출하다가 회사가 망하게 생겼는데도, 수출을 못 버리고 있다. 직언하는 사람 싫어하고, 눈앞의 이익에 몰두하고, 능력 없음을 인정하지 못하니 망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겠군.
“올해도 이래저래 많이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
“변화는 늘 시끄러운 법이죠. 그렇다고 변화를 두려워하면 안 돼요. 근데 그거 알아요? 이 변화를 정수 씨가 가져왔다는 거요.”
“하하. 저야 뭐 돈 벌기 좋아하는 흔한 사업가죠.”
“저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르겠지만, 강 사장님도 정수 씨 대단하다고 생각하시는 걸 보면, 그렇게 겸손 떨지 않아도 돼요.”
“이거 뭐 치즈케이크 하나 사 주고 몇 곱절로 받네요. 하하.”
칭찬도 자꾸 받다 보니 익숙해진다. 칭찬에 기분 좋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하자.
“오늘 덕분에 즐거웠어요. 맛있는 디저트도 먹고.”
“아닙니다. 제가 누나 덕분에 호강했어요. 공장 완공하고 나주 입성하면 제가 축하연 제대로 열어 드릴게요.”
“하하. 기대할게요. 근데 누나 소리는 여전히 어색하네요.”
“누님, 조심히 올라가십시오.”
“아휴, 진짜!”
이런 사람 냄새 나는, 한우 냄새 나는 명절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