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74)
174 빅 엿
변압기혁신조합 사장단 회의가 열린 안성파워 회의실이 살짝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속내를 아는 나는 조용히 비밀 유지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 박준희 사장은 나를 조용히 있게 내버려 두지 않을 심산이다.
“뭐 때문에 저러시는 건가요? 정수 씨는 아는 것 있어요?”
박 사장이 나한테 최대한 다가와 속삭인다. 박 사장도 모르고 있는 걸 보니, 강 사장이 정말 비밀을 제대로 지킨 모양이다.
“뭐 바로 얘기하실 것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죠.”
“뭐예요? 뭔가 아는 눈친데? 나 빼놓고 두 분이서 뭔가 얘기했다 이거죠?”
박 사장의 삐친 척하는 표정에 정신이 아련해진다. 이런 곳에서 팔색조 매력을 자랑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두 번째 안건은 말입니다.”
강호창 사장이 운을 띄웠다. 이목이 집중됐다. 다들 군말 없이 서약서에 서명했기에, 엄청 궁금할 것이다.
“이번에 일반형 주상변압기가 없어지고 고효율로 바뀌지 않습니까? 대한전력에서 재고품을 처리해 주기로 내부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원래 올해 발주를 늘릴 계획이었는데, 그 예산으로 재고 처리를 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아마 새 입찰 직후에 처리할 것 같습니다.”
회의실이 또다시 술렁였다. 저 말의 뜻이 무엇이며, 어떤 이득이 될지 짱구 굴리는 소리도 요란하다. 성질 급한 수원중전기 박철원 사장이 또 나섰다.
“그 말인즉, 우리가 미리 재고품을 만들어 두자 이겁니까?”
“맞습니다. 근데 대한전력이 공기업 아닙니까? 우리가 나랏돈 빼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눈치껏 적당히 만들어 두자 이거지요. 대신 수익금 일정액은 조합 기금으로 활용했으면 합니다.”
“그거 좋지요. 우리가 돈 벌자고 이러지만, 이왕이면 조합 키워서 다 같이 잘 벌어야지요.”
박 사장, 성질 급하고 화통한 것이 참 맘에 드네. 자고로 사장은 저래야지. 꼼바리 같은 사장은 재미없어.
“그렇지요. 조합 기금으로 아직 나주 못 내려온 회원사들한테 자금 지원을 해 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강 사장이 자기 의도대로 회의가 진행돼서 그런지 얼굴이 환하다. 돈도 벌고 조합도 키우고. 좋은 일 하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없겠지…… 는 오산이었군.
아주전기 이충원 사장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신청했다. 이 사장을 쳐다보느라 눈 돌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사장님 뜻이야 좋습니다. 그런데 중전기조합이 지켜만 보고 있겠습니까? 걔네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말입니다.”
“제가 그래서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이렇게 말이 나온 이상 지켜질지 모르겠습니다.”
회의실이 웅성거리는데 정적이 흐르는 이 형용 모순된 현상은 뭐지?
“지금 여기 있는 사장님들을 못 믿겠다는 말씀입니까?”
회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함에서 냉랭함으로 바뀌었다. 안성파워 사장이자 조합 이사장인 강 사장의 일갈 때문이지만, 그 이전에 아주전기 이 사장의 조소 섞인 도발이 초래한 것이었다.
비밀이 지켜질 리 없을 것이란 이 사장의 반발.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제가 여기 계신 사장님들을 못 믿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솔직히 말이라는 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든 퍼지게 마련입니다. 설령 비밀이 지켜진다고 해도 중전기조합이라고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씀입니까?”
강 사장의 말에 짜증이 묻어 나왔다.
기껏 얻은 귀한 정보를 조합 위해서 내놨는데, 비밀이 지켜지니 마니 토를 달고 있으니 언짢아질 만하다. 토론이니 자유롭게 의견 개진하라고 하지만, 막상 반대 의견 내면 짜증 나는 것이 사람 심리 아니겠는가.
“제가 오해하도록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입찰도 그렇고 재고품 생산 계획을 얘기하는 것도 다 중전기조합을 좀 밟아 주자는 취지 아닙니까? 이왕 하는 것 제대로 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뭐 좋은 방안이라도 있습니까?”
“정보를 역이용하자 이겁니다. 이사장님, 대한전력이 재고품 구매해 준다는 정보는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대한전력 아닙니까?”
“그렇지요.”
“이사장님께서 번거로울 수 있지만, 그 인맥을 조금만 더 활용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아이, 거참. 속 시원하게 쭈욱 말씀을 해 보세요.”
강 사장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났고, 나 역시 그렇게 되고 있다.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원. 무슨 대안이길래 저렇게 서론을 길게 뽑는지 궁금해 죽겠다.
“중전기조합도 그걸 안다는 것을 전제로 일을 진행하자 이겁니다. 우리가 정보를 몰래 흘려줘도 되고 말이죠.”
“함정을 파 놓자는 얘기 같습니다?”
“맞습니다. 중전기조합 회사들이 어떤 회사입니까? 대한전력이 재고품 구매한다는 정보를 얻자마자 아마 변압기 엄청나게 만들어 놓겠지요.”
그렇군! 대충 윤곽이 잡힌다. 죽 써서 개 준다는 속담이 떠오르네. 이 사장, 저 사람 언제부터 저렇게 강경파가 됐나? 중전기조합을 아주 피 말려 죽일 생각이로군.
“이사장님께서 대한전력에 건의해서 그 계획 취소시켜 주시죠. 뭐 아직 발표도 안 했으니, 취소랄 것도 없네요. 원래 계획은 작년 계약 물량보다 더 많이 발주하겠다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원래 계획대로 해 달라고 하거나 새 입찰 이후에 그만큼 추가해 달라고 요구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대한전력이 재고품 사 줄 것으로 알고 잔뜩 만들어 놓은 중전기조합에 물을 먹이자 이거군요?”
“그렇지요. 물론 이사장님 생각대로 하는 것이 더 좋겠지만,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중전기조합도 저들 욕심에 확정되지도 않은 계획 믿고 저지른 것이니 어쩌겠습니까?”
“또 대한전력 앞에 가서 피켓 들고 시위하겠지. 하하하.”
회의실이 또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번 술렁임은 화기애애한 느낌이다. 중전기조합에 더 큰 엿을 먹일 수 있다는데, 여기 있는 누가 마다할 것인가?
이쯤에서 나도 한마디 거들여야겠다.
“저도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38개의 눈이 나로 향한다. 부담스럽네.
“이충원 사장님 계획은 아주 좋습니다. 다만, 대한전력이 그 계획을 취소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중전기조합만 재미를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나름 안전장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안전장치라 하면 뭡니까?”
“사장님들께서는 평소대로 일반형 주상변압기 생산 계속해 주시죠. 완성품 말고 중신까지만 만들어 놨다가, 필요하면 바로 조립해서 완성품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대한전력이 계획을 취소하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하는 얘기 아닙니까? 내가 그 정도도 못할 것 같습니까?”
강 사장 오늘 여러 번 흥분하네. 강 사장이 가진 대한전력 인맥을 아는 내가 그런 소리를 하니 또 언짢아졌으리라.
“이사장님이야 당연히 믿지요. 0.1프로라도 안 될 가능성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평소대로 하시고, 남는 중신들은 전량 제가 사겠습니다. 저희야 수출품으로 만들어서 팔면 되니까 재고 부담이 전혀 없습니다.”
“허허. 그러면 지 사장님께서 손해를 많이 보는 것 아닙니까? 생산 원가가 우리랑 크게 차이날 것 같은데요.”
이 사장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자기 의견에 동조해 준 사람에 대한 대우인가?
“여기 계신 사장님들께서 우리 회사 주요 고객이기도 한데, 그 정도도 못해 드리겠습니까? 값 후하게 쳐 드리겠습니다. 하하.”
“좋습니다, 좋아요. 그럼 정리를 해 봅시다. 아니, 아예 투표를 붙이도록 하지요. 대한전력 계획을 이용해 재고 생산을 해 둔다와 그 계획을 취소시킨다를 놓고 투표를 하지요.”
강 사장이 의견 조율에 나섰다. 나는 뭐든 좋다. 다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있으니 말이다.
“참, 재고품이 필요하다 싶으면 저희 회사가 당장이라도 몇천 대 뽑을 수 있습니다. 저쪽이 눈치채면 우린 원래 계획대로 재고품 만들어 두면 됩니다.”
“아니, 그러면 지 사장님께서 총대를 메면 좋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납품할 것만 만들면서 내년 사업 준비하고, 여차하면 프라임일렉트릭이 재고품 잔뜩 만들어서 납품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게 편하긴 합니다. 그렇긴 해도 고효율 개발한 회사가 없어질 일반형 잔뜩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 썩 좋아보이진 않습니다. 대한전력 눈치도 봐야지요.”
이 사장이 총대 메 달라고 요청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는 대한전력의 선의를 이용해 먹을 순 없다. 앞으로 도움 받을 일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부터 뿌리까지 다 캐먹으면 안 되지.
“지 사장님. 그러면 혹시 혁신산단 입주한 회사들 것만이라도 대신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외함, 코아 다 직접 하시니 해당 업체 외함으로 만들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요.”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정 그래야 한다면 얼마든지 해 드리지요. 그래도 그 정도 다급한 상황은 생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은근 집요한 데가 있군. 그래도 내가 저들에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뿌듯하다.
강 사장이 상황을 정리하고 나섰다. 슬슬 밥도 먹으러 가야 하는데, 이걸로 계속 시간 끌 수는 없으니.
“이 사장님, 우리 지 사장님 그만 괴롭히십시오. 우리가 지 사장님한테 많은 도움 받고 있는데, 그것까지 떠넘길 수 있습니까? 하하.”
“저는 그저 사장님들께 제안드린 겁니다. 평소대로 생산하시라, 남으면 제가 다 사겠다 이겁니다.”
“하하. 그럴 일 없도록 내가 힘을 쓰겠습니다. 아니지, 일단 결정을 하고 봐야지.”
오늘 강 사장 언짢아졌다 기분 좋아졌다, 감정 기복 심하네.
그렇게 투표가 진행됐다. 역시나 중전기조합 물 먹이자는 주장이 17표나 받으며 채택됐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수 년간 조합의 횡포에 당하고만 살았던 사장들이라 복수심이 아주 뜨끈뜨끈하다.
결론이 났다.
한 달 뒤에 있을 입찰은 입찰 전문가인 강 사장과 조합 상근 이호영 상무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강 사장은 조합 회원사들의 이익과 중전기조합에 안길 패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호언했다. 든든하다.
대한전력의 재고 구매 계획은 공식 발표 전까지 취소시키기로 했다. 어려울 것도 없다. 이춘배 부사장 만나서 설득하면 그만이다. 중전기조합 이것들아, 배 터지게 물 마셔 봐라.
“자, 이제 마지막 안건입니다. 조합 회원 가입에 대한 건입니다.”
앞선 두 안건에 비해 무게가 떨어지는 것 같지만, 나한테는 중요한 안건이다. 개나 소나 다 회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중전기조합 엿 되면 이탈해 넘어올 회사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생 회사들은 대부분 우리 조합으로 가입하려고 하고, 중전기조합에서도 두 군데가 가입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무나 다 받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장님들 의견을 여쭙겠습니다.”
다행히도 대부분 사장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속내까지는 모르겠지만, 회원사 늘리는 것은 좋지 않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또 한마디 해야겠군.
“중전기조합에서 나와 새 조합 만든 취지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 조합 회원사들은 악랄하게 사업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업했거나, 동조했던 회사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맞습니다.”
잠잠히 있던 박준희 사장도 거들고 나섰다. 좋은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는 확실하게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이다.
“이참에 조합 가입 조건을 확실하게 만들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외형도 평가해야 하고, 급여 수준도 최저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정성 평가도 들어가면 어떨까 싶네요. 가입기업 평가위원회를 만들어서 심사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좋은 말씀입니다. 괜찮은 회사만 들어올 수 있다. 이것만 확실해지면 이 바닥도 나아지질 것 같습니다.”
조합을 이끄는 큰 회사 3곳이 한목소리를 내니, 여론은 당연히 이쪽으로 쏠렸다.
“위원회는 박 사장님이 맡으시고, 이사장님과 지 사장님이 위원으로 들어가면 어떻겠습니까?”
일심전기 유원태 사장의 제안이 마지막 안건을 마무리 지었다. 다른 사장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일이 또 하나 늘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