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75)
175 포만감
2시간 남짓 진행된 변압기혁신조합 사장단 회의가 끝이 났다.
간단히 얘기하다 밥이나 먹으러 갈 줄 알았던 회의가 꽤 길었다. 매번 모일 때마다 두둑한 선물을 챙겨 갔었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수확이 없다. 그래도 만족한다.
매번 재미만 보고 살 수 있나. 악질 경쟁자들을 밟아 주고, 우리도 좋은 회사 만들자고 다짐한 것만으로도 성과는 충분하다. 악질들 사라지고 나서 펼쳐질 세상에 어떻게 대응할지나 고민하자.
저녁 식사는 풍성하게 차려진 한정식당에서 이뤄졌다. 지글지글 고기 한번 굽고 싶었는데, 더운 여름에 땀 흘리며 고기 굽는 것도 고역이니 뭐.
“자, 자, 잔들 채우셨습니까? 우리 변압기혁신조합과 회원사들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해 건배 한번 하겠습니다.”
강호창 사장의 선창에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회식 때 부장급들이 외친다는 온갖 유치한 건배사들이 난무했다. 깨톡으로 섬마을 민박집에서 있을 법한 노래방 배경 화면 보내며 흐뭇해하는 오육십 대 감성에 술이 절로 독해졌다.
“다들 어련히 잘하시겠지만, 오늘 회의에서 나온 얘기들은 절대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됩니다. 입이 간질간질해도 한 달만 참으시죠. 하하.”
소주 한 잔 시원하게 털어 넣은 강 사장이 재차 입단속을 시켰다. 대한전력이 준 정보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끼리의 일은 유출돼서는 안 되지.
“입찰에 관한 것은 특히나 조심해야 해요. 중전기조합에서 미리 알고 대비한다면 서로 손해가 막심할 것 같아요.”
“박 사장, 말 잘했어. 저놈들은 손해 보더라도 이 악물고 덤빌 놈들이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 원가 따라오지는 못할 거예요.”
“작년 입찰 봤지? 내가 우리 회원사들 손해 안 보게 기가 막힌 결과 가져올 테니까 걱정 말고 밥이나 잡숴. 하하.”
“저희는 입조심하면서 부지런히 변압기 만들어 내겠습니다.”
“뭐가 됐건 이번 입찰에서 제대로 밟아 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내가 입찰만 30년 넘게 한 사람이야. 하하하.”
다정한 부녀 같은 강 사장과 박 사장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내년 농사도 걱정할 필요 없겠다 싶다. 계획대로 안 돼도 나야 우선 배정 물량이 있고, 수출도 있고, 민수도 있고, 걱정할 일이 무엇이겠나!
사장들끼리 모여서 먹는 한정식. 1년 반 전 중전기조합 신년회 때 얻어먹은 한정식과는 아주 다른 맛이다. 우선배정 토해 내라며 다구리당하면서 꾸역꾸역 먹던 그때와 크게 달라졌다.
멀리 떨어진 음식을 집으려 팔을 뻗으면 건너편 사장이 접시째 들어서 갖다 준다. 든든한 내 편과 함께 먹는 음식은 꿀맛이다.
포만감은 위장이 아니라 뇌에서 알리는 신호임이 분명하다.
식당 테이블에 음식들이 가득 쌓여 있는데도 젓가락 움직이는 속도가 한없이 느리다. 다들 얼마 먹지 않았음에도 배부른 표정들이다.
계획대로 대한전력 입찰을 거머쥔다면 변압기혁신조합 회원사 대부분이 작년 입찰 수준 정도의 매출을 기약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우선 배정으로 왕창 가져가고 회사도 늘어난 상황이니, 매출이 유지만 돼도 기쁨에 겨울 것이다. 눈앞에 빤한 음식 따위가 성에 찰 리가 없다.
“입찰은 잘되겠죠?”
옆에 앉은 금성전기 박준희 사장이 입찰 걱정을 하며 말을 건넨다. 진짜 걱정돼서 하는 소리인지 말이 하고 싶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사장님답지 않게 그런 걸로 걱정이십니까?”
“입찰이 한두 개면 모르겠는데, 사십 개 정도라 후반으로 갈수록 낙찰률이 크게 떨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하네요.”
“솔직히 독식은 불가능할 거고, 몇 개는 저쪽에서 가져가겠죠. 그렇게 몇 년 하다 보면 중전기조합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고요. 강 사장님께서 걱정 마라고 하시니, 맘 편히 기다려 보죠.”
“중전기조합이 허세만 가득해서 무서울 것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게 있어요. 뭔지 아시죠?”
“그럼요. 자만은 금물이죠.”
박 사장이 얘기하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다. 막연한 걱정 같기도 한데, 일단 동조해 주는 것이지 뭐.
그런 사람이 있다. 대화 분위기상 적당히 눈치채고 넘어가야 하는데, 맹랑한 눈빛을 유지하며 꼬치꼬치 물어보는 사람 말이다. 대화 흐름보다는 자신의 궁금증 해소가 우선인 사람이다. 박수 쳐 달라고 손을 내밀었으면 맞장구는 쳐 주는 사람이 되자고.
박 사장이 역시나 하는 눈빛이다. 굳이 점수 딸 생각은 아니었는데, 잘 공감해 주는 사람이 됐네.
“지 사장님, 중국에 수출도 하신다면서요? 할 만하십니까?”
건너편에 앉은 아주전기 이충원 사장이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금성전기 이후로 혁신산단에 4번째로 입주한 회사이지만, 고만고만함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잘나가는 사장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뭔가 발판을 마련하고 싶겠지.
“아, 네. 뭐 손해만 안 볼 정도로 만들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관수 물량이 워낙 기복이 심해서 캐파 활용하기가 쉽지 않잖습니까?”
“그렇죠. 일 없을 때는 하나도 없고, 몰릴 때는 엄청나고. 하하. 그래도 어떻게 중국을 생각하셨습니까? 필리핀도 쉽지 않은데, 중국이라니. 대단하십니다.”
“필리핀이라 해 봐야 컨테이너 한두 개 나가는 정도인데, 그 단가로 그렇게 팔아 봐야 좋을 것 없죠. 이왕 하는 거 물량 많이 뽑아낼 수 있는 곳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도 뭐 여기 지 사장님이랑 같이하는데, 지 사장님 아니었으면 생각도 못했을 거예요. 단가는 맘에 안 들지만, 물량이 워낙 많아서 매출은 확실히 크게 늘긴 할 것 같아요.”
박 사장의 부연 설명이 적재적소에 들어갔다. 매출이 크게 늘어날 것이란 얘기에 이 사장의 침 삼키는 소리가 살짝 들린다. 이 사장도 해 보고 싶겠지. 쉽지 않을 것입니다요.
“지 사장님이야 우리 변압기 업계의 신성 아닙니까? 하하. 자동권선기 납품 받아서 돌려 보니까 이거 돈 6억이 아깝지 않더라니까요. 봐도 봐도 신통방통한 설비입니다.”
“제가 좀 비싸게 부른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동권선기 몇 대 더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두 대로는 감질나서, 원. 하하.”
“저도 그러고 싶은데, 회원사들 두 대씩 납품하는 것도 벅찹니다. 늦어도 9월까지는 납품하려고 하는데, 저희도 죽어납니다.”
“아, 그렇습니까? 하긴 보니까 한 대 만들기도 쉽지 않을 것 같긴 하더군요.”
이 사장이 자꾸 말을 빙빙 돌린다는 느낌이다. 중국 수출에 어떻게 숟가락 하나 얹고 싶은데, 대놓고 말 못하는 느낌이랄까? 그럴 땐 먼저 던져 줘서 희망을 놓게 만들어 줘야지.
“자동권선기 더 필요하다고 하시는 것 보니까 수출도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수출도 하면 좋지요. 저희야 관수밖에 안 하니까 회사가 그냥 그 수준으로 쭉 가지 않습니까? 새로운 먹거리가 필요한 시점이긴 하죠.”
이 사장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관수만 하는 사장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회사는 안정적인데 매년 입찰 때마다 스트레스 받고, 회사는 성장이 정체된다는 고민 말이다. 민수 시장은 워낙 개판이라 뛰어들기 싫으니, 남은 것은 수출뿐이지.
“중국 수출은 단가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출 생각하신다면 다른 업체들처럼 필리핀이나 동남아 쪽으로 생각해 보시죠?”
“저도 필리핀 여러 번 다녀오면서 물색해 봤는데, 필리핀도 아주 복마전입디다. 변압기 하나 파는 데 몇 다리를 거쳐야 하는지 원.”
“사장님, 준비되시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제가 괜찮은 에이전트 소개해 드릴게요. 지금은 직계약은 거의 힘들어요. 그래서 별의별 에이전트들이 다 튀어나오는데, 옥석 가리기가 쉽지 않죠.”
박 사장이 거들고 나섰다. 남 도와주기 좋아하는 박 사장. 우리 조합의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람이다. 근데 이 사장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하하. 박 사장님 감사합니다. 필리핀도 잘만 하면 좋지요. 그런데 중국 수출은 많이 어렵습니까?”
역시나 중국 시장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 사장이다. 빨리 현실을 알려 주자.
“단가가 뽑기 나름이긴 한데, 평균적으로 키로당 15,000원 잡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50키로면 75만 원 정도죠. 포장, 운임, 수수료 다 포함해서 말입니다.”
50kVA에 75만 원이란 얘기에 동공이 살짝 커지는 것이 뚜렷이 보인다. 이내 아닌 척했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하하. 그렇군요. 사장님께서는 그 가격에도 남으십니까?”
“저도 사업하는 사람인데, 손해 보면서 할 수 있겠습니까? 다 남으니까 하는 것이죠.”
“네에. 대단하십니다.”
이 사장의 눈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 바닥에서 내로라하는 금성전기도 주상변압기는 본전이라고 할 정도인데, 아주전기는 어림도 없지.
저 단가로 수익 낼 수 있는 업체는 우리 회사뿐일 것이다. 그 수익도 배선체결기와 조임쇠체결기의 등장으로 더 높아졌다. 마진이 미쳐 날뛰면서, 대박 게임 터트린 IT회사 영업 이익률도 우스울 정도다.
“사장님, 수출 생각 있으시면 제 말씀대로 필리핀부터 시작해 보세요. 여기 지 사장님이야 특이한 분이라 우리랑 똑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하.”
박 사장이 이 사장의 실망한 눈빛을 읽었는지 필리핀 수출로 달래 준다. 그래, 괜히 따라 하려다 가랑이 찢어지지 말고 남들 하는 것처럼 동남아에서 소박하게 하시라고.
잠깐의 대화는 나와 우리 회사의 위대함을 확인시켜 주며 마무리됐다. 중소기업을 넘어 중견기업으로 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것에 만족할 생각 없으니 계속 달릴 테지만, 아닐 것 같은 사장들은 현실에 만족하며 내실을 다지는 것이 좋지.
대화가 다시 나와 박 사장의 독대로 바뀌었다.
“정수 씨. 이번에 중국 발주 나온 것, 제가 조금 더 드린 것 알고 계시죠?”
“부담스럽게 왜 그러셨어요? 이거 저녁을 얼마나 좋은 걸로 사 드려야 합니까?”
“만들려면 어떻게든 만들겠는데, 포장해서 내보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더라구요. 이럴 줄 알았으면 분양을 더 받을 걸 그랬어요.”
우리 회사도 하역 작업할 공간이 충분치 않아 개고생인데, 공장이 넓지도 않은 금성전기는 말해 무엇 하랴. 지금도 많을 때는 하루에 트레일러 10대 정도 들어와서 아침부터 하루 종일 싣기만 한다. 대한전력 출하까지 겹치면 혁신산단 오일장이 따로 없을 지경이다.
“저는 그래서 하역장으로 쓰려고 땅 또 분양받았어요. 변압기 만드는 것보다 싣는 게 더 일일 줄 몰랐습니다.”
“필리핀 수출이야 많이 나오면 500~600대 수준이라 이삼일 실어 보내면 그만인데, 중국 물량은 너무 많아요. 근데 포장도 직접 한다면서요?”
“아시잖아요? 우리 회사는 뭐든 스스로 하는 거요. 하하. 급한 대로 10명 뽑아서 맹훈련시켰습니다. 누나도 다른 회사에 맡기지 말고 저한테 포장비 주세요. 제가 말끔하게 해 드릴게요. 하하.”
“포장비가 만만치 않아서 직접 해 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그러려면 사람도 뽑아야 하고 목재도 사야 하고,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긴 했어요.”
“뭘 고민하세요. 옆에 든든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요.”
포장해 봐야 얼마 남지도 않지만, 몇 푼이라도 벌면서 좋은 일 하는 것이지 뭐. 최봉숙 원장이 전라도 전역에서 보호종료아동들 다 데리고 오는 판이라, 채용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정수 씨네 회사 바로 옆으로 분양 받을 걸 그랬네요. 내일 저희 직원 한 명 보낼 테니까 상세하게 얘기해 주세요.”
“제가 업계 최저가로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문자님의 계시는 항상 두세 다리 건너가며 더 많은 재미를 안겨 준다. 계시만으로도 포만감이 아주 든든하다.
처음에 포장 계산기 프로그램을 받았을 때만 해도, 수출이 성사된다는 암시와 포장 쉽게 하겠다는 정도만 생각했다. 이게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될 줄이야. 포장부서도 부지런히 키우자.
“참, 정수 씨. 그 유해 발굴은 어떻게 됐어요?”
“빠르면 10월부터는 발굴 들어간다고 하더라구요.”
“10월요? 너무 오래 걸리는 것 아니에요?”
“아휴, 그것도 엄청 빠른 거예요. 정부 조직이라는 것이 얼마나 굼뜨고 절차 따지는지 아시잖아요? 아마 내년 말 정도엔 유해 송환 얘기가 나올 것 같네요.”
“진짜 생각하면 할수록 놀랍고 신기해요. 그걸 또 어떻게든 성사시키는 것도 대단하구요.”
박 사장이 감탄하면서 내 무릎에 살짝 손을 올렸다 내렸다.
내 몸을 쓰다듬을 정도로 감탄했단 말인가? 거칠지만 섬세한 배관공의 잔근육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런 것인가? 나도 손이 있는데, 박 사장한테 감탄할 일 좀 있었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