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80)
180 노빠꾸
가끔 시간 날 때 읽는 판타지 소설들 보면 판교는 희망의 땅이다.
회귀한 주인공은 돈 벌겠다고 판교 땅을 사들인다. 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강남 개발 이후 최대 로또라면서 말이다. 땅값이 몇십 배씩 뛰면서 거액을 벌었다는 설정에 ‘말도 안 돼’를 외치기도 했다.
판교 개발로 몇십 배 차익을 얻으려면 88올림픽 때는 사야 하지 않았을까? 분당과 달리 판교는 땅값이 이미 오를 대로 올라 아파트 분양가가 너무 높다는 볼멘소리들이 많았던 것을 기억한다. 나와 관련 없는 얘기라고 치부하면서 말이다. 솔직히 몇십 배는 오버야.
그렇게 뉴스나 소설에서만 접했던 판교를 두 발로 걷고 두 눈으로 보게 됐다. 동네 아주 좋네!
70년대 서울에서 쫓겨나 판자촌에 살면서 끼니 해결하기도 어려워 인육까지 먹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암울했던 동네가 이리 좋아졌다니.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이리 만들었다는 말인가.
“멀리서 오느라 고생들 많았어. 점심은 어떻게 했나?”
휘황찬란한 판교를 보며 에너지밸리라 불리는 나주 혁신산단도 저렇게 될 것이라는 허황된 기대를 하고 있으려니, 먼저 와 있던 강 사장이 변함없이 환한 미소로 맞이해 준다.
“오는 길에 이것저것 많이 먹었습니다. 좀 일찍 와서 같이 점심 할 걸 그랬습니다.”
점심 안 먹어도 충분히 배부르다. 주전부리도 맛보고, 박 사장 손가락도 맛보고.
“하하.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도 고생인데, 밥 한 끼 같이 먹겠다고 더 고생시키면 되나? 아직 시간이 조금 있으니까 어디 가서 커피나 한잔하자고.”
코딩 천국 판교에 완벽한 굴뚝 산업인 변압기회사 조합사무실이 있다는 것이 너무 언밸런스하다. 오늘 만남에서 이슈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ROI는 나와야지.
“시원하게 한 잔씩 마시고, 잘 얘기하고 오자고. 이럴 때 엑시트한다고 하더군. 하하.”
“그런 말도 하실 줄 아십니까?”
“직원 하나가 얘기해 주더라고. 판교 가면 판교 사투리를 써야 한다네? 젊은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항상 파악하고 있어야지. 안 그래?”
나름 젊은이인 나도 모르는 것을 아는 강 사장. 낼모레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꼰대 냄새가 덜한 것은 다 이유가 있군. 학이시습지하려는 자세, 잊지 말자.
약속 시간에 맞춰 중전기조합 사무실에 들어갔다.
참석자는 광진변압기 사장인 최웅민 이사장과 그와 동서지간인 동서변압기 김익환 사장, 조합 상근인 박희태 상무. 저 기름진 얼굴들. 작년 신년회 때 본 뒤로 1년 반 만이지만, 여전히 구역질 나는 얼굴들이다.
우리는 4명.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일단 수적으로 우세다. 다 죽었어.
다들 환하게 웃고 있지만, 과하게 억지스럽다는 느낌이다. 서로 감정이 좋을 수 없다.
중전기조합 놈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재미있다. 여길 왜 왔냐는 표정이면서 애써 무시하자는 의도가 역력하다. 중전기조합 분열을 촉발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표정이다.
미안하지만, 분열에서 끝내지 않을 것이다. 작은 하마는 끝장을 본단 말이지. 망하기 전 애피타이저로 올해 입찰에서 좌절을 맛보길.
“다들 구면이니 바로 회의 들어가죠?”
중전기조합 최웅민 이사장이 운을 띄웠다. 구면이라고 하는 걸 보니 내 존재를 외면하지는 못했군.
우리 조합 강호창 이사장이 말을 받아쳤다.
“올해 대한전력 입찰로 여러 가지 걱정이 많을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도 우려가 많습니다. 중전기조합이 작년처럼 안 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강 사장이 첫 마디부터 강공에 나섰다.
골고루 나눠 먹자는 신사협정을 깨트린 중전기조합의 악행을 꺼내 든 것이다. 실수였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지껄였던 그 짓을 어찌 잊으리오. 덕분에 우리 조합이 예정보다 더 많은 물량을 가져가긴 했지.
“우리가 경쟁 입찰은 처음이라 실수를 했지요. 허허.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박 상무, 올해는 그런 실수하면 안 돼!”
최 사장은 조합 상근인 박희태 상무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빤한 책임 떠넘기기. 못된 놈들 하는 짓은 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구나.
“네, 그럼요. 여튼 작년 입찰 때 본의 아니게 심기를 불편하게 한 점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올해 입찰은 그런 일 없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유감 같은 소리 한다. 사과는 못하겠고, 사과 비슷한 모양새는 만들어 줄 테니 그냥 넘어가라고 할 때 쓰는 말이 유감이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단어는 누가 만들었는지 원. 쪽바리들이 즐겨 쓰는 ‘통석의 념’이라고 하지 그랬냐?
“그래서 올해 입찰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먼저 의견을 내놓아 보시죠.”
강 사장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대화를 끌고 갔다. 엄지손톱만 한 금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최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아쳤다.
“서로 공평하게 나눠 갖자는 것이 조합 취지 아닙니까? 사이좋게 나눠야지요. 박 상무? 설명 좀 드리게.”
“네. 일단 고효율주상변압기가 2,083억인데, 입찰 참가업체가 41개입니다.”
“잠깐만요. 37개사 아닙니까?”
초장부터 구라를 치는 박 상무의 주둥이를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냉큼 받아쳤다. 우리를 바보로 아나.
“전기연구원에서 시험 중인 업체도 포함해야지요.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대한전력에서 전기연구원에 시험 의뢰만 해도 입찰 자격 부여한다고 했습니다.”
“아니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37개사라구요.”
감정이 좋지 않아서인지 박 상무 저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거슬린다. 잘 모르는 모양이라고? 확, 마.
“오늘자로 시험 합격한 곳이 35개사고, 전기연구원에서 시험 중인 회사가 4개사입니다. 다 더해도 39개사밖에 되지 않는데 어떻게 41개사가 나옵니까? 그리고 지금 시험 중인 회사 중에서도 두 곳은 불합격 받고 이의 신청하지 않았습니까? 이의 신청한다고 불합격이 합격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니, 37개 업체입니다.”
“잠시만요. 제가 계산을 잘못했나? 잠깐 확인 좀 해 보겠습니다.”
혀를 날름하고는 손가락으로 입가를 닦아 내는 박 상무. 미싱으로 아가리를 꿰매 주고 싶다. 사장님들 얘기하시는데 어디 상무 따위가 장난질을 쳐!
“아, 이거. 제가 더하기를 잘못했습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고효율주상변압기가 2,083억 원에 업체 37개. 말씀대로 2개 업체는 일단 제외했습니다.”
“아, 됐습니다. 우리도 다 자료 가지고 있는데 뭘 굳이 설명을 합니까?”
강 사장이 밥상을 걷어차 버렸다. 박 상무가 초장부터 장난치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아, 네. 뭐 그래서 업체별로 나누면 업체당 최대 75억 원을 가져갑니다. 우선배정으로 빠지는 것이 많아서 많이 줄긴 했습니다. 이럴수록 상부상조하면서 위기를 극복해 가야 할 것입니다.”
“우선배정으로 빠지는 것도 있지만, 그건 입찰 전부터 확정된 것 아닙니까? 업체 늘어나서 몫이 줄어든 것이 정확한 분석이지요.”
초반 신경전이 꽤 가열된다. 강 사장이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지. 박 상무의 도발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맞받아치며 지그시 밟아 준다.
“네, 뭐가 됐든 업체별 돌아가는 몫이 작년보다 크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요. 그래서 저희가 제안하는 것은 입찰을 17개와 8개씩 나눠 가져가는 것입니다. 저희가 조금 더 가져가는데 변압기혁신조합이 지역배정으로 가져가는 몫이 많으니까 조금 배려해 주시죠?”
“허허. 배려가 그런 것입니까? 우리가 먼저 제안해야 배려지, 멋대로 우리 몫 줄여 놓고 배려해 달라구요?”
박 상무 저놈은 입만 열면 사람 화를 돋우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다. 나랑 통화할 때 나를 무시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원래 그런 사람이었네. 이 자리가 조폭들끼리 구역 나누는 자리였다면 저놈은 이미 칼빵 한 대는 기본으로 먹고 들어갔을 것이다.
중전기조합 최 사장이 바턴을 이어받았다. 최 사장도 박 상무를 계속 말하게 뒀다가는 무슨 사단이 날 것이라고 염려했으리라.
“하하. 강 사장님. 너무 예민하게 그러지 마시죠. 아시다시피 우리 조합 회원사들이 올해 많이 어렵지 않았습니까? 태양전기는 망하기까지 했습니다.”
“허허, 나 참. 태양전기 망한 것이 우리 때문입니까? 지들이 사업 못해서 망한 걸 가지고 왜 이 자리까지 끌고 옵니까?”
우리 때문은 아니지만, 내가 일조하긴 했지. 뿌듯하다.
“여튼, 올해 입찰은 서로 좋게 좋게 가시죠?”
“그럴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강 사장이 냅다 휘두른 청룡언월도에 회의실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예상대로 강경책이군.
“으흠. 그래서 서로 경쟁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못할 것도 없지요.”
“어허, 강 사장님. 사업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러십니까? 경쟁 입찰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빤히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라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서로 출혈하지 말자고 드리는 말씀인데, 그렇게 받아들이면 어떻게 합니까?”
“중전기조합이 작년처럼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 좋아 나눠 먹기지 어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작년 일은 실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쪽 조합 태반이 지역배정 받는 거 알면서도 똑같이 나누자고 한 거면 우리가 많이 양보한 겁니다. 그걸 아셔야지요.”
최 사장도 백전노장답게 만만치 않다.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강 사장과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나주 내려온 업체들은 하나같이 우리 조합입디다. 대한전력에서 그렇게 내려오라고 해도 꿈쩍도 안 해 놓고, 우리 회원사들이 받는 혜택을 특혜인 것처럼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사업이라는 것이 말처럼 뚝딱뚝딱할 수 있겠습니까? 다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역배정도 다 먹고, 일반 입찰도 다 가져가겠다는 말씀입니까?”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요.”
최 사장 미간이 찌푸려졌다. 금반지를 빨리 돌리는 것이 살짝 흥분한 모양이다.
강 사장이 대놓고 너희들 죽이겠다고 선언한 꼴이니 빡치겠지. 다 너네가 자초한 일이다. 지금껏 욕심부려놓고, 막상 욕심 부리는 상대를 만나니 미치고 팔짝 뛰겠지? 고상한 말로 자업자득, 인과응보라고 하는 것이야.
“강 사장님. 조합이 둘로 쪼개진 거야 어쩔 수 없다 치지만, 그렇다고 서로 경쟁하면서 제 살 깎아 먹을 필요가 있습니까?”
“왜 제 살을 깎아 먹습니까? 지 사장님, 이번 입찰 공고 보니까 어떻습디까? 예정가가 그 정도면 아주 넉넉하지요?”
강 사장이 나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어떤 의도인지 충분히 짐작했다. 겁을 먹이라는 뜻이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만 얘기해도 될 것 같다.
“회사마다 제조 원가가 다르겠지만, 우리 회사 같으면 예정가의 절반이라도 해 볼 만합니다. 경쟁 입찰 들어가서 낙찰률이 조금 떨어진다고 해도 제 살 깎아먹을 일은 없습니다.”
“자, 들으셨지요? 우리가 왜 손해 볼 짓을 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강 사장이 내 대답에 흡족해하며, 다시 잽을 날렸다.
저것들 표정이 여전히 자신만만하네? 좀 현실적인 느낌이 들게 얘기할 걸 그랬나? 대한전력이 제시한 낙찰 예정가의 절반이라도 남는다는 설명이 허풍처럼 들렸나 보다. 그렇게 해석해 준다면 더 좋지 뭐.
“하하하. 강 사장님. 이거 왜 이러십니까? 우리가 변압기 사업 하루 이틀입니까? 빤히 다 아는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길 하십니까? 가져갈 입찰 개수를 조정해 보자는 뜻이라면 모를까, 이런 식이면 더 이상 얘기를 진행하기 어렵지요.”
“그렇습니까? 그럼 그만 얘기하지요.”
“강 사장님! 계속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저는 우리 조합의 의사를 분명히 전했습니다. 사업 하루 이틀 한 사람도 아니니,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습니다? 뭐 또 대한전력 앞에 가서 입찰이 불공정했니 어쨌니 할까 봐 노파심에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강 사장의 빠꾸 없는 직진이 지속됐다. 이쯤 되면 저쪽도 긴가민가할 것이다.
분명히 뻥카로 알고 있는데, 노빠꾸로만 일관하니 메이드인가 싶겠지. 헷갈리기 시작하면 게임 끝이다.